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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www.taylorleopoldphoto.com/] | | |
1.
“와 이래 안 죽노? 내 얼마나 더 살겠노?”
볼 때 마다 치매 병동의 할매는 묻는다.
잘 안 들리는 귀에다 바짝 대고 언제나처럼 나는 대답한다.
“멀었심더. 한 10년은 더 살아야 됩니더.”
90년을 산 할매의 주름이 환하게 펴지며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아이고, 지겨워서 우째 더 살꼬...”
2.
“할매, 하루 종일 이래 누워있으면 이제 못 걸어요.”
“일어나서 뭐하꼬?”
“텔레비젼도 보고, 다른 할매들이랑 이야기도 하고, 뭐라도 좀 하세요.”
“테레비는 뭔 소린지 모르겠고 저 할마이는 노망들었다 아이가.”
“안 심심합니꺼?”
“죽었뿌마 좋겠는데 지겨워 죽겠다.”
3.
아기 귀신이 언제나 걸어가는 자신의 발목을 잡는다는 할머니.
오늘은 두 손을 동그랗게 모으고 서서 그걸 내려 보고 있다.
“뭐하세요?”
“오늘은 그 귀신이 내 손 안에 들어 있네...”
아침 출근길에 본 허리 구부정한 목련 나무가 문득 생각났다.
손 안에 한 줌의 햇살을 오무려 받고 있는.
4.
ars moriendi (죽음의 기술).
서양 중세에 있었다던 이 기술이 왜 현대에는 이름조차 생소해 졌을까?
사람들은 죽음의 채찍이나 파도가 자신을 채어갈 때 까지 그저 기다려야 한다. 과학의 힘으로 생명의 시간은 늘어났지만 삶의 시간은 늘어나지 않았다. 손 안에 있는 한 줌의 시간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기를 노인들은 기다리고 있다. 멍 한 눈빛으로.
5.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귀천 (歸天)」>
그러나 그 소풍의 마지막 날은 질퍽거리는 산길이거나 자갈길이다. 소풍은 쉽게 끝나지 않고 노래는 모음을 잃어버린 자음처럼 누구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한 쪽 폐에 물을 한가득 담은 할매가 내 손을 잡고 뭐라고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의 입에서 물 마른 시간들이 모래처럼 흘러나온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차라리, 시간이여, 이제 멈출 때가 되지 않았는가?
6.
그리하여 손 안에 한 줌의 시간은 계급적이다. 생뚱맞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생을 무식하게, 자리에 누울 때까지 노동으로 보내 온 할매들에게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은 사막을 뒤덮은 모래 바람과 같다. 누가 손 안의 그 물을 달게 다 마시고 떠날 수 있겠는가?
7.
질퍽하게 욕을 잘 하던 100세 할매가 갑자기 피를 한 사발 쯤 토한다. 피를 토하면서도 뭐라 뭐라 중얼댄다. 고향집에 배꽃도 피었겠다 이제 손가락을 열고 시간을 다 흘려 보낼 때도 되었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내 발 밑이 반짝반짝 한다. ars moriendi (죽음의 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