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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백목사의 예수읽기(46)
요한복음 4:5-28 "물동이를 버려두다"

백창욱(대구새민족교회) baek0808@hanmail.net

오늘 복음말씀 이해를 돕는 두 가지 사례를 먼저 말하겠다.

장면 1. 영화 "벤허"에서 주인공 벤허가 로마군 장교인 친구의 배신으로 총독을 해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노예 신세로 전락한다. 뜨거운 태양아래, 노예들은 완전 기진맥진으로 끌려가다 한 동네에서 잠시 쉰다. 그러자 불쌍히 여긴 동네사람들이 그릇에 물을 담아서 노예들에게 먹여준다. 그런데 인솔장교는 유독 벤허만 물을 못 마시게 막는다. 심히 목이 타는 벤허는 죽기 일보직전이다. 그때 뒷모습만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서 벤허에게 물을 먹인다. 덕분에 벤허는 살아난다. 그 물은 벤허에게 생명수였다. 장교가 그 모습을 보고 뿔난 표정으로 다가오는데, 뒷모습만 보이는 사람과 대면하더니, 우물쭈물 뒷걸음치면서 모르는 체한다. 예수의 위엄에 눌린 거다. 나중에 벤허는 그때 일을 회고하면서 말하기를, 잊을 수 없는 것은 목마름을 풀어준 물 보다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로마장교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물을 떠 먹여준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장면 2. 독자들은 우물가의 기억이 있는가? 어느 동네 우물가나 아침이 제일 분주하다. 아침만 되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나와서 설거지와 빨래를 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우물가는 동네사랑방이 된다. 지난밤 일어났던 이야기에서부터 자식들 이야기, 남편들 직장이야기 등 다양한 이야기로 우물가는 왁자지껄하다. 그런데 다양한 이야기 중에는, 누구 흉보는 말이 많았다. 사람 DNA에 흉보는 말을 하면 어떤 쾌감을 느끼는 인자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게 한참 수다를 떨면서 할 일을 다하면 어느새 우물가는 조용해진다. 지금 그때를 회상해 보면, 오늘 복음말씀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가 한창일 아침시간에 나오질 않고, 정오쯤에 나온 그 심정을 충분히 공감한다. 동네여인들 입장에서, 남편이 다섯이었던, 그러니 누구보다 스캔들이 많았을 사마리아여인은 정말 고소한, 흉보기 딱 좋은 이야기소재였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저런 이유로 사마리아 여인은 동네사람이 아무도 없을 시간쯤에 나왔을 거라고 충분히 짐작한다.

오늘 복음말씀의 핵심은 물 이야기이다. 요는 어떤 물이냐이다.

▲ 우물가에서 만난 예수와 사마리아여인

사마리아 여인이 찾는 물과 예수가 말씀하는 물이 부딪히고 따로 놀고, 여러 이야기가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 결국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 말씀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얻는다.

여인의 변화를 바로 보여주는 모습은 7절과 28절이다. 7절은 "사마리아 여자가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으러 나왔다" 그런데 28절을 보면,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가기 싫은 우물가, 할 수 없이 물동이를 들고 나왔는데, 그 물동이를 버려둘 정도로 행동이 확 바뀐 여자의 모습이다.

여인의 달라진 행동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자.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여러 소재-예수 일행이 사마리아에 들어간 것, 수가마을에 이른 것, 야곱의 우물을 만난 것,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간 것-은 본론을 위한 설정이다. 본론은 예수와 사마리아 여자의 대화이다. 예수의 행보를 보면,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상황을 주관한다. 어쩌면 처음부터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려고 일부러 수가마을을 지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예수가 사마리아 마을을 지나가신 거다. 4장 3, 4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가셨다. 그렇게 하려면, 사마리아를 거쳐서 가실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께만 해당한다. 유대사람들은 절대로 사마리아를 거치지 않았다. 갈릴리로 갈 때는 요단강을 건너 우회하거나, 아니면 서쪽 해변길로 다녔다. 사마리아를 거치면 훨씬 시간과 거리를 단축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는 일부러 사마리아로 갔다. 사마리아에 대한 유대인의 터부를 따르지 않는 분이기도 하지만, 어떤 목적이 있는 게 분명하다.

저자는 예수가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는 과정이 매우 자연스럽게 이야기 전개를 한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의도성이 보인다. 제자들이 모두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로 들어갔다고 했는데, 굳이 먹을 것을 사러 제자들이 다 갈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일부러 자리를 피했나? 하여간 우물가에는 예수와 사마리아 여자 단둘만 있어야 했다. 

예수는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라고 한다. 그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물이고,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4:14)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여인은 자꾸 딴소리를 한다. 자기의 관심사가 아닌, 거대담론을 이야기 주제로 꺼낸다.

처음에는 민족주의 문제를 꺼냈다. 예수가 물을 청하자, "선생님은 유대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라고 대꾸한다. 그만큼 두 민족 간에 갈등과 대립이 심한 현실을 방증하기도 하지만, 좀 생뚱맞기도 하다. 우물가에서 목말라서 물을 찾는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이 급하지, 민족주의나 국수주의는 무관하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맞는 생각, 말, 행동할 필요가 있다. 당연한 말 같지만, 저절로 되지 않는다.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관조와 성찰훈련을 해야 한다.

하지만 예수는 타박하지 않고 성실하게 응답한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알고, 또 너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네가 그에게 청하였을 것이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예수는 네 관심사를 다른 데 분산시키지 말고,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고 말씀한다.

그러자 여인은 또 반문한다. "선생님에게는 두레박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에서 생수를 구하신다는 말입니까?"(4:11) 하지만 예수는 역정을 내지 않고 다시 친절하게 응답한다. 예수는 여인이 찾는 물 말고, 다른 물이 있다고 말씀한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4:13,14)

계속 튕기던 여자는 이번에는 구미가 당겼는지, 물을 구한다. "선생님, 그 물을 나에게 주셔서, 내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게 해 주십시오."(4:15)라고.

여인의 요구는 합당한가? 예수 입장에서 들어줄 만한가? 아니라면 어떤 문제가 있나? 여인의 요구 밑바탕에는 이기적인 심정이 가득 담겨 있다. 사람 사이에 섞이고 싶지 않은, 그 욕구를 채우기 위해, 목마르지 않는 물을 구한다. 그 속내는 여인의 말 속에 노골적으로 담겨 있다.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게 해 달라"는 말에.

설령, 그런 물이 있더라도 여인의 실존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는 직답 대신에 여인의 신상문제를 꺼낸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에게는 더욱 근본적인 해결책을 써야 할 때가 많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자,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한다. 그러자 예수는 남편이 없다고 한 말이 옳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사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바로 말하였다"라고 한다. 도대체 예수는 여인의 남편이력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가? 외롭고, 이기적이 된, 한 여자를 되돌리기 위해 신적인 능력을 발휘했다고밖에.

그때야 여자의 태도가 약간 바뀐다. 무엇보다 호칭이 바뀌었다. 일반남자를 부르는 선생님에서 예언자로.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라고. 자신의 내밀한 일을 꿰뚫어 보는 사람 앞에 태도가 수그러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이다. 여자는 여전히 남 얘기를 한다. 이번에는 예배장소를 시비한다.

▲그리심 산에서 사마리아인들이 유월절 제사를 지내고 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4:20) 처음에 물을 달라고 했을 때는 민족 간 갈등문제를 꺼내더니, 이번에는 종교문제를 꺼낸다. 성전문제 역시 유대와 사마리아 사이에는 매우 깊은 앙금이다. 포로귀환 이후, 유대는 이방인과 피가 섞인 사마리아를 배척했다. 사마리아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올 수 없었다. 그래서 사마리아는 그리심산에 따로 성전을 짓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했다. 유다에 배척당한 원한에 사무쳐서, 그들 역시 자신들 성전에 대해 예루살렘 성전 못지않게 정통성을 부여했다. 두 민족의 역사와 관련하여 얽힌 예배장소 문제가 중요하지만, 지금 여인의 실존에는 별 관계없는 말이다. 여인의 말을 보면, 자신이 그곳에 가서 예배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기 문제를 대면하기 싫어서 거대담론으로 회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수는 딴소리하는 여인에 대해 인내로 성실하게 답을 한다. 

급기야 대화는 메시아 주제로 이어진다.

계속 자신과 무관한 주제를 말하던 여인이 처음으로 자신과 연관을 짓는다.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압니다."(4:25)라고.

그러자 예수는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라고 정공법으로 답했다. 더 이상 여자는 피할 곳이 사라졌다. 이제 여인도 결정해야 한다. 받아들이든지, 거절하든지.
 
결과는?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4:28) 자신이 집착하던 물을 담기 위해, 꼭 있어야 하는 물동이를 버려둔다. 일차원적 수준에서 벗어났다는, 더 중요한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람들 피하려고 우물가에도 가기 싫었던 사람이 자청해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간다.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다.

여자가 예수를 유대남자에서 메시아로 받아들이기까지 있었던 여러 주제와 과정을 봤다. 우리도 여자처럼 처음에는 나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한 동기로 시작했을지라도, 예수를 메시아로 모시는 데는 더 성숙하고 깊은 신앙고백이 뒤따라야 한다. 나의 내면을 마르지 않는 샘물로 바꿔야 한다. 나도 고백하건대, 예수는 샘물처럼, 신선함과 감도가 결코 감소하지 않는 생명력의 원천이다. 폭력적인 지배질서에서 목마름이 가실 날이 없는 시절에 예수의 생명력으로 힘을 얻기를 빈다. 

▲지난 3월 22일 밀양시 상동면에서 열린 송전탑 반대 촛불문화제

백창욱(대구새민족교회) baek08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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