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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관리툴 2014년02월25일 10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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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백목사의 예수읽기(44)
마태복음 5:38-42 "맞서지 말아라"

백창욱(대구새민족교회) baek0808@hanmail.net

오늘 복음말씀을 준비하면서 좀 난감했다. 예수는 우리가 악한 자에게 '맞서지 말라'고 말씀한다. 또 상대(상대가 악한 자이다)의 요구를 거부하지 말고 그냥 받아주라고 한다. 그렇다면, 공권력의 불의가 난무하는 현장에서 맞서는 사람들은, 이 말씀에 비추어볼 때, 잘못하는 것인가?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악덕 사업주의 요구를 다 받아줘야 하는가? 강자가 강요하는 이데올로기에 그냥 순순히 세뇌당해야 하는가? 등 많은 의문점을 양산한다.

우선 독자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기 위해, 오늘 복음말씀을 그대로 옮기겠다.

38-'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39-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대어라. 40-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41-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42-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 "(마태 5장 38-42절)

어떤가? 예수의 말씀을 따를 수 있겠는가? 이천 년 전, 예수가 제자와 민중들에게 명한 말씀이지만, 오늘 우리도 이 말씀 앞에 서 있다. 오늘 성경말씀은 마태복음 5장 21절-48절까지에 있는 여섯 개의 반대명제 중, 다섯 번째 명제이다. 반대명제는 율법을 반대하여 예수의 독자적인 말씀이 나오는 형태를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예수는 율법 자체를 반대하기보다는 율법의 가르침을 반대했다. 율법의 해석이 본래 취지와는 다르게 변질해서 평등사회를 깨뜨리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반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율법의 해석을 변질시키는가? 율법의 해석전문가들인 바리새의 서기관, 율법학자들이다. 그들은 율법의 원뜻을 왜곡해서 체제를 정당화하는 구실로 삼았다. 그래서 복음서에서 그들은 예수의 대표적인 적대자로 나온다.

그럼, 오늘 말씀인 다섯 번째 명제를 보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야 한다"의 출처는 구약 출애굽기 21:24, 레위기 24:20, 신명기 19:20 등이다. 이 말씀의 본래 취지는 무제약적 보복을 금지하는 규정이다. 한 대를 맞았는데, 일곱 대를 때리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악한 자들은 이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무제약적으로 보복했다. 지금은 악한 권력이 이런 짓을 자행한다. 하지만 구약도 실제로는 되갚음을 지지하지 않았다.

한 가지 예만 들자면, "너는 그가 나에게 한 그대로 나도 그에게 하여, 그가 나에게 한만큼 갚아 주겠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잠언 24:29)
율법의 본래 취지는 옳다. 그런데 율법이 제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하면서 본래 취지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힘있는 자들이 율법을 자의적으로 남용하는 폐단이 일어나서 힘없는 사람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바뀌어 버린 게 문제이다.

그런데 예수는 율법의 본래 취지보다도 더욱 파격적인 말씀을 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라고. 이 말씀에서 보듯이, 예수는 악한 사람을 전제한다. 경험으로 알듯이, 악한 사람이 있다. 요는 우리가 악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이다. 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 인데, 예수는 맞서지 말라는 거다. 그리고 네 개의 실천지침을 말씀한다. 필자는 성경해석의 기본원리를 따라, 컨텍스트(시대상황)와 텍스트(성경 본문)를 연관 지어서, 로마 시대라는 시대 상황 안에서 본문 말씀을 조명했다.

하지만 오늘날 사회가 워낙 복잡 다양해서 인간상황을 성경 말씀에 하나하나 연결지을 수는 없다. 아니나다를까, 주일예배설교 후, 한 교우가 말하기를, 지금도 직장 안에서는 생존을 위하여 부득이, 똥이 더러워서 피하듯이, 진상이 부리는 해코지로부터 방어를 위해, 오늘 성경 말씀이 문자 그대로 필요한 현실도 있다고 했다. 나는 주로 공권력 남용 현실에 집중했는데, 삶의 자리가 다른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또 다른 방식으로 그들의 생존을 위해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알았다. 결국, 성경말씀을 잣구대로 이용하는 것은 올바른 방식이 아니고, 분별력으로 적용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지침은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대어라"이다. 뺨을 맞는 일은 상대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심각한 모욕행위이다. 왼손으로 맞든, 오른손등으로 맞든, 뺨 맞고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나 지금 우리 사회나 마찬가지이다. 예수 시대는 로마가 폭력으로 지배하는 세상이다. 인권보호나 형사소송법 절차로 피의자를 보호하지 않았다. 멜 깁슨이 만든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면,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긴 전, 무수히 많은 매를 맞는데, 지금 시각에서 말하자면, 명백한 인권침해이다. 그러나 그때는 때리면 맞아야 한다. 그럴 때, 맞은 사람이 나도 네 뺨을 때리겠다고 덤벼드는 일은, 뺨 때린 자를 자극해서, 더 큰 모욕을 당할 수 있다. 그럴 때, 힘이 모자라는 사람이 어떻게 하는 것이 내 뺨을 때린 사람에게 폭력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나? 다른 뺨을 돌려대는 일이다. 상대는 나에게 모욕을 주려고 뺨을 때렸는데, 내가 다른 뺨마저 돌려대면, 상대방의 의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두 번째 지침은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이다. 왜 고소한 자는 겉옷이 아니고 속옷을 가지려고 하는가? 겉옷은 율법에 따라 오래 저당 잡을 수가 없다. 겉옷은 해지기 전에 돌려줘야 하는 물건이다. 밤에는 덮고 자는 이불이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22:26-27) 그래서 빼앗는다면 속옷뿐이다. 그럴 때 겉옷까지도 내 주면 고소한 사람은 아주 파렴치한 놈이 된다. 율법이 금하는 겉옷까지 취득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겉옷까지 내 주는 일은 고소자를 가장 강력하게 규탄하는 수단이다.

▲2월 24일 열린 한미연합군사훈련 반대 기자회견


세 번째 지침은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이다. 로마군대는 강제징발을 할 수 있었다. 정복전쟁이 일상화되고, 그래서 폭력이 최종적인 뜻이 되는 세상은 사람 목숨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힘 가진 자가 장땡이다. 따라서 병사가 민간인에게 함부로 부역을 지운다. 한국전쟁 때, 우리 민중들도 혹독한 부역 시련을 겪지 않았는가. 그럴 때, "네가 뭔데, 나에게 이런 일을 강요해?" 하면서 대들거나, 싫다고 도망가면 어떻게 되는가? 오히려 더 큰 화를 입을 수 있다. 그때 오 리뿐만 아니라, 십 리까지 가 주면, 처음에는 병사들의 힘에 눌려 할 수 없이 하는 부역인 줄 알았는데, 자기들의 강제와는 무관하게 전적으로 자기 의지로 하는 것임을 깨우쳐 주게 된다.

네 번째 지침은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이다. 가진 재산이라고는 속옷과 겉옷뿐인 민중들에게, 철저히 박해당해서 풍비박산 난 예수 후예들에게, 무엇을 달라고 하거나, 꾸려고 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양심 불량이다. 그럴 때, 못 주겠다고 움켜쥐는 것은 의와 평화 때문에 박해받는 자신들의 신앙, 인품에도 맞지 않는 일이다. 줘 버려라. 그럼으로써 그렇게까지 욕심을 보이는 그들을 스스로 부끄럽게 만들어라.

예수의 실천지침이 무력항쟁 노선에 선 사람들에게는 유화적으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예수는 민중이 희생당하지 않도록, 고뇌와 애정이 담긴 지침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예수의 대응방법은 70년 유대전쟁에서 탁견으로 입증되었다. 무력항쟁에 나선 사람들은 모두 로마에 철저히 학살당했지만, 맞서지 않은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예수는 로마의 폭력적 지배질서하에서도 하나님 나라 윤리를 실천하도록, 비둘기같이 순결하고, 뱀같이 지혜로운 방도로 민중을 구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시대는 어떠해야 하나?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의 투쟁방식이나 현장대응은 달라져야 하는가? 로마 시대는 모든 권력이 황제에게 있던 시대이다. 그러나 지금은 주권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시대라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국가는 여전히 주권자의 동의를 받지 않고, 마구잡이로, 폭력적으로, 공권력을 집행하지만, 그들도 여전히 여론의 눈치를 본다. 권력이 선거에서 오므로, 선거에서 이기려면 좋은 인상을 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도 공권력을 잘못 쓰면, 그것이 빌미가 돼서 족쇄가 되고, 집행을 멈칫하고, 어떨 때는 법의 제재도 받는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선한 싸움을 하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승리를 할 때도 있다. 로마시대 팔레스타인 민중들이 맞서지 않음으로 예수도를 실천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우리 시대 상황에 맞게 정당하게 맞섬으로 예수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 관건은 보복여부나 맞서는 여부가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해야 이 세상을 모두가 평등한 행복세상으로 만드느냐이다. 그렇다면 실천은 각자 부여받은 감동으로 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그 길에 서는 것이다.
 

백창욱(대구새민족교회) baek08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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