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주] ‘시간을 되돌려 만나는 나’라는 컨셉의 픽션입니다. ‘이제’라는 스물넷 졸업을 앞둔 취업준비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자신인, ‘제이’를 만난다는 상상 속의 그러나 일상적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시내는 교복 차림에 꽃다발을 든 무리로 어느 때보다 활기차 보였다. 인근 고등학교에서 졸업식을 마치고 한껏 ‘자유’를 만끽하려 나온 아이들이었다. 이제 갓 입춘에 들어선 겨울 날씨는 아직 제법 쌀쌀했다. 옷을 너무 얇게 입고 온 게 아닐까 후회하던 중, 멀리서 제이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언니!”
나를 발견한 제이가 숱 많은 앞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달려왔다. 그러면서도 한쪽 손으로는 이마를 가리며 앞머리를 수습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이에게 앞머리는 소중하니까.
배가 고프다는 제이를 위해 없는 지갑을 털어 맛있는 것을 사 먹이고 제이가 좋아하는 디저트 카페에 갔다. 제이는 생크림 딸기 케이크를 주문했다. 별 고민 없이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는 나에게 제이는 실없이 ‘어른 같다’며 말했고 나는 아메리카노를 먹지 못하는 제이를 애 같다며 놀렸다. 쓴맛을 싫어해 술 한 방울도 겨우 삼키는 제이에게 아메리카노는 이해하기 어려운 취향이었다. 제이는 커피숍 종업원에게 ‘휘핑크림 많이요’라고 특별 주문한 카페모카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언니. 이제 진짜 어른이 될 준비를 해야겠어.”
“그럼 이것부터 한 모금 마셔볼래?”
제이는 내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를 맛보더니 이마를 찌푸리며 캑캑거렸다.
“으이그. 완전 쓰지?”
“설탕 좀 뿌리면 마실 수는 있겠는데”
제이가 카운터에서 막대설탕을 한 줌 집어오더니 커피잔에 하나씩 넣으며 맛을 보기 시작했다. 3개쯤 털어 넣자 제이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삐죽이 입꼬리를 올렸다. ‘뭐 이 정도는 마실만 하네’하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난 카페모카가 좋아. 이러니 살이 찌지. 언니, 나 살 많이 찐 것 같지?”
“응. 살찐 건 모르겠고 통통하니 귀여운데”
“통통한 건 싫어. 이 살 좀 봐. 진짜 보기 싫지 않아?”
제이가 한쪽 팔을 들어 올리더니 팔뚝의 쳐진 살을 꼬집어 보인다.
“이게 다 설탕 때문이야. 나 설탕중독이거든”
“설탕중독?”
“고3스트레스가 워낙 다들 심하니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얼마 전에 잡지에서 설탕중독에 대한 기사를 봤거든. 근데 그게 다 내 얘기더라고”
나는 과거의 나를 회상해 보았다. 나는 원체 단맛을 좋아했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초콜릿이나 과자를 찾기 시작한 건 고3 때부터였다. 그전까지는 가끔 야자 중에 출출하면 매점에서 간식을 몇 개 사 먹고 마는 수준이었다. 변화는 극심한 고3 스트레스와 함께 찾아왔다. 스트레스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되짚어보았다.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설탕이 들어간 음식을 찾는 거야? 근데 누구나 우울할 땐 보통 초콜릿 같은 걸 찾잖아”
“응. 처음엔 나도 그런 정도였지. 머릿속이 터질 것처럼 답답하고 괜히 우울할 때마다 초콜릿을 먹으면 금세 진정되고 잊어버릴 수 있으니까. 그랬었지”
“그럼 지금은 어떻길래?”
“말 그대로 중독이야. 어떤 이유도 없이 그냥 설탕을 먹어야겠어. 안 그럼 못 견디겠어”
나는 제이의 입으로 생크림이 묻은 딸기가 들어가는 걸 바라보면서 말했다.
“너, 뭔가에 많이 지쳐있는가 보다”
제이가 딸기를 우물거리며 답변을 준비할 동안, 나는 제이의 표정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자못 숙연해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딱히 뭐 스트레스받고 그런 건 아닌데... 하도 단 걸 먹어대니 살이 점점 쪄서 걱정이야”
나는 제이의 현재, 즉 나의 과거를 떠올려 보았다. 2학년 중반쯤 의욕적으로 매진한 결과 성적이 오르는가 싶었지만 고3에 올라 처음 친 모의고사 결과는 1학년 때와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다. 지금까지 들인 시간과 비용이 허투루 돌아간 것 같았다. 2학년부터 끊기 시작한 비싼 학원비를 대느라 연일 특근과 야근으로 초췌해진 부모님 얼굴이 떠올라 미안했다. 가족 중 그 누구도 떨어진 성적으로 닦달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는 스스로 채근질했다. 지친 내가 찾았던 건 초콜릿이었다. 그러나 제이는 누군가에게 속내를 쉽사리 드러내는 편이 아니다. 내가 이미 제이의 속마음을 다 읽고 있다는 사실을 제이가 안다면 어떤 기분일까?
“언니는”
“응?”
“꿈이 뭐야?”
“갑자기 그건 왜?”
“언니는 정말 멋지게 지내는 것 같아서”
“그래?”
“응. 언니는 주관이 있잖아. 열정적이고 꿈이 있는 사람 같아”
“그렇게 보였다면 고맙네. 근데 꼭 너는 꿈같은 건 키워본 적 없는 사람처럼 말하네?”
“나는 잘 모르겠어. 내가 뭘 원하는지”
“네가 원하는 게 왜 없어. 설탕이 있잖아”
제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떨궜다.
“제이야. 널 괴롭게 하는 게 뭔지 생각해본 적 있어?”
“아니. 괴로울 때마다 그냥 잊으려고 했던 것 같아. 어차피 현실을 벗어날 수는 없으니까.”
“괴로움을 잊기 위해 단 걸 먹는 거로구나”
“근데 그게 꼭 마약 같아. 먹고 나면 더 심하게 우울해져서 계속 먹게 되고, 이런 게 반복되다 보니 살이 찌고, 살 때문에 또 스트레스받고”
나는 제이의 지금 이 모습 그대로가 얼마나 예쁜지 말해주었지만 제이의 귓등에도 닿지 않을 위로라는 걸 알았다.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다른 이야기를 던졌지만, 곧 ‘아차’하고 말았다.
“이제 고등학교도 끝이네. 졸업식은 어땠어?”
“졸업식 하기 이틀 전에 친구가 죽어서, 분위기가 꼭 장례식장 같았어”
나도 모르게 커피잔에 시선이 갔다. 쉬는 시간마다 잠을 쫓겠다며 커피를 마셔댔지만, 어김없이 낮이고 밤이고 꾸벅꾸벅 졸던 그 아이. 친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오며 가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였다.
“그 애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어. 심지어 기숙사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리란 건 꿈에도...”
제이는 야심한 밤 종종 복도를 울리며 흐느끼던 울음소리가 그 아이의 울음소리였던 것 같다고 짐작했다. 그 아이가 죽고 나서는 더 이상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며, 추정의 근거를 말하던 제이의 상념 어린 얼굴에서 문득 한 가지 장면이 떠올랐다. 새벽 1시, 심야자습을 끝내고 기숙사로 돌아온 나의 모습. 어두운 방안 창문으로 어슴푸레 불빛이 들어오는 복도를 타고 전류처럼 흘러오는 울음소리와 그 소리에 감전된 듯 저릿하게 혀를 자극하는 다디 단 코코아를 삼킨 뒤에야 겨우 잠이 들 수 있었던 한 여자아이.
졸업식이 있기 전, 누군가 “네 이름은 왜 플랜카드에 걸리지 않은 거야? 당연히 니 이름이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하며 던진 말에 얼음처럼 굳은 얼굴로 겨우 미소 짓던 그 아이의 씁쓸한 얼굴빛이 기억났다. 잔류하던 전기가 파지직하며 필라멘트를 깨트린 순간은 아니었을까. 나는 조심스레 그 아이의 입장이 되어본다.
머리에 끼워진 전선으로 무수한 기호와 단어와 숫자가 765kV 송전탑처럼 방출되는 낮을 지나, 밤이 되면 콘센트를 빼도 이미 감전된 채 지쳐버리고 마는 생활의 반복. 의미를 찾을 수 없던 나날들. 콘센트에 코드를 꽂고 기계처럼 의자에 앉아 ‘학생의 본분’을 지켜야 했던 시간들. 그 본분을 제대로 거두지 못함으로써 받게 되는 ‘불량품’이라는 가혹한 품질평가.
그러나 이 고통을 달래줄 따뜻한 친구들과의 관계도, 마음을 편히 놓을 수 있는 온전한 휴식도, 무언가에 몰두해볼 만한 취미도, 그 무엇도 우리의 곁에는 없었다. 쌉싸름한 커피를 좋아하던 그 아이도, 달콤한 설탕을 좋아하던 제이라는 나의 과거가 이 고통에서 탈출하기 위해 택한 방법이 달랐을 뿐, 우리는 똑같이 ‘생존’을 힘겨워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가?
“언니는 이제 앞으로 뭐 할 거?”
“나 이번에 운 좋게 S기업에 인턴사원으로 뽑혀서 일단 거기로 들어가게 됐어”
“와, 잘됐다!”
“응... 그렇지, 뭐. 잘됐지”
“인턴이면 어떤 일 하는 거야?”
“온갖 잡일과 실무더미랄까? 3개월 뒤에 정규직을 전체 인턴 중에서 30%만 뽑기 때문에 월급은 낮지만 내 모든 걸 건다고 생각하고 살아야 해. 그래도 뭐 웬만해서는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
“언니 멋지다”
커피숍의 노란빛 조명이 내려앉은 제이의 얼굴이 활짝 웃자, 문득 목구멍 위로 저릿하게 묵은 전류가 올라와서 나는 무언가 아무 말이라도 내뱉고 싶었다.
“제이야. 나도 너처럼 설탕중독이었다? 어딜 가는 중에도 끊임없이 뭔가를 먹어야 기분이 안정될 수 있었어. 정말 병적이다 싶을 정도로”
“언니는 날씬하잖아. 아무리 먹어도 안 찐다 뭐 그런 얘길 하고 싶은 거야?”
“남들한테 얘기하는 건 처음인데, 너한테 다 털어놓을게. 사실 취업면접 때문에 고민하다 결국 지방흡입 주사를 맞았어. 그게 운동보다 확실히 효과가 빠르니까. 먹고 싶은 건 절대 입에도 안 댔어. 그렇게 10키로를 뺐어”
제이는 이 말을 듣고 ‘대단하다’고 말했다. 허나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그런 말이 아니었다.
“제이야. 나는 내가 나름대로 불안을 떨치려고 택한 방법들이 실은 진짜로 불안감을 떨쳐내지는 못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살아지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삶을 사는 거야말로 멋진 거 아닐까?”
제안하듯 건넨 말이었지만 그건 사실 나를 위한 말이었다.
“음, 언니가 보기에 내가 설탕중독을 끊을 수 있다고 봐?”
“당연하지”
하지만 나는 속으로 그러기란 쉽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설탕을 끊겠다는 개인의 의지가 아무리 강해도, 끊임없이 불안을 뱉어내는 사회가 끝내 바뀌지 않는 한.
“생존이 아닌, 삶을 살아간다는 건 누구에게나 어려운 것 같아. 하지만 생존이든 삶이든 일단 그게 뭔지 그것부터 고민해보아야 해. 나 자신이 요구하는 것이 진정으로 내가 원해서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건 여전히도 어려워. 하지만 그렇게 혼란스러워하다가 조금씩 나아지는 거겠지. 조금씩 편해지는 거겠지”
“언니가 갑자기 이런 진지한 이야기를 하니까 더 혼란스러운데 난”
“내가 너무 진지했나? 이런 얘긴 그만하고 우리 맛있는 음료수나 마시러 갈래?”
“무슨 음료수?”
나는 입 모양으로 한 글자의 강렬한 단어를 전한다. ‘술’!
“오늘은 언니를 위해 내가 특별히 마셔줄게”
“정말? 난 그냥 해본 소린데!”
“응. 원래 술은 인생의 쓴맛을 알게 되면 마시려고 일부러 안 마시고 있었거든. 아직까지 내 인생은 달콤했지만, 오늘부터는 왠지 조금은 달콤쌉싸름해진 것 같아서”
에필로그
며칠 뒤 제이는 친구들과 영화관에서 ‘또 하나의 약속’을 보고 돌아왔다. 아마도 제이는 영화관을 나오는 사람 중 가장 눈이 많이 부은 관객이었을 것이다. 며칠이 지났을까. 제이는 여느 때처럼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클릭해서 엄지손가락으로 스크롤을 내렸다. 아름답게 각 잡힌 얼굴에 날씬하기까지 한 S기업 회장의 딸이 얼마나 패션에 대한 감각이 뛰어난지를 보여주는 기사였다. 짧은 경외를 보낸 뒤 돌아간 포털 메인 화면에는 해당 대기업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한 기사가 짤막하게 떠 있었다. 초콜릿을 씹고 있던 입안은 달고도 썼다. 제이는 문득 ‘이제’가 생각나서 전화번호를 눌렀지만 ‘없는 번호’라고 했다. 이제는 자신의 별로 떠나고 없었다.
이제는 자신의 별에서 인턴으로 바쁘게 살고 있을 것이다. 생존을 위해 삶이 작동되는 자본주의라는 별에서 두 사람 중 누구도 덜 완성되고 더 완성된 것은 없다. 과거라는 문을 지나온 현재의 공간은 과거가 결정지은 하나의 공간이 아니라 다른 수많은 무한대의 방 중 선택된 단 하나의 방일 뿐이다. 현실의 공간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움직인다.
이제와 제이 역시 무수하게 펼쳐진 불안과 욕망의 방에서 때로는 헤매거나 상처받기도 하면서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거기 앉아있는 당신의 방은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