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침체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요술 맷돌’로 불리던 금융파생상품의 폐해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에 드러나며 자본주의체제는 그 신뢰도에 타격을 받았다. 한편 현재 미국은 양적 완화정책을 축소하지도 지속하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진 채 새로운 수익모델을 창출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한편에서는 체제의 수명연장을 위해 중국은 한중일 FTA를, 미국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각기 추진하며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대안을 말한다는 좌파 내부에서는 자본주의가 쇠퇴기에 들었는지, 혹은 쇠퇴기라는 분석에 동의하는 좌파 그룹도 그 해결 방법에서는 의견을 일치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오히려 자본주의 위기의 진단과 대안에 관해 더 치열한 토론이 요구된다. 이일재 선생 추모사업회는 “모든 사회주의자에게는 지난 40여 년간 자본주의의 공공연한 위기와 쇠퇴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며 혁명운동의 전망과 구체적 방향을 모색할 책임이 있다”며 화두를 던졌다.
이들은 14일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서 “한국노동운동과 함께하는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성찰, 그리고 1987년 이후 한국노동운동에 대한 역사적 반성과 전망”을 토론했다.
1부 토론 ‘세계사회주의운동의 역사 이론, 그리고 실천’에서 주발제를 한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는 지금이 자본주의의 쇠퇴기라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오세철 명예교수는 “자본주의가 쇠퇴한다는 진단에 동의하는지는 혁명 전략과 직결돼 중요하다. 10년 주기로 공황이 있었지만 큰 흐름으로 보면 제2인터네셔널 시기까지는 부흥기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는 쇠퇴했다”고 말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자본주의 위기를 설명할 때 좌파는 크게 두 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위기가 이윤율저하의 경향적 법칙에 따른 이윤의 부족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다른 하나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자본축적론’에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필연적 관계를 밝히며 명확히 했듯, 시장(식민지 수탈을 통한)의 부족 때문이다.
오세철 명예교수는 “자본주의 위기 문제를 이윤의 문제로 보는가, 시장의 문제로 보는가. 이윤 부족만 가지고 얘기하는 것은 맑스적이지 않다. 이 둘은 분리될 수가 없다. 이 두 관점의 결합지점을 찾아 나가는 게 2006년 이후의 좌익공산주의진영 내부의 논쟁이다”며 “중심은 생산에 있지만, 소비나 시장문제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완결이 안 된다. 통일적으로 결합되어야만 한다”고 지적했다.
함께 토론에 나선 이득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러시아어 학과)는 “자본주의가 쇠퇴기지만 코뮤니스트가 새로운 미래를 열 준비가 돼 있는지는 의문이다”며 “예를 들어 2008년 이후 미국 노동자들은 지자체를 점거하는 운동도 했다. 우리는 어떤 운동을 구상하나? 또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아래에서부터의 조직 결성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선거에 매몰되지 않고 주체의 역량을 키워나가는 게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가 쇠퇴기에 있다고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려면 자연스럽게 ‘누가, 어떻게 대안을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이 나온다. 토론회에서는 대략 ‘노동자 계급이 정당건설과 국제연대를 통해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시됐으나 참여자들은 이 질문에 이견을 보였다.
혁명의 주체는 여전히 노동자 계급인가?
혁명에 노조가 이바지할 수 있나?
한 토론회 참가자는 노동자가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남한은 87년 이후 세계적 기대를 받았다. 20년이 지난 지금 남한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제 노조운동이 혁명에 이바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 의문도 든다. 계급 분석과 혁명의 주체가 누구인지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
노동운동을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반박도 이어졌다. 김형계 전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 사무처장은 “전망이 안 보인다면 그것은 노동자 대중 책임이 아니라 운동가들 책임이다. 노동운동이 노조운동으로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혁명을 하기 위해 노동운동을 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김형계 전 사무처장은 “노개투(노동법개악저지투쟁) 당시 현대자동차 투쟁이 패배하며 비정규직이 발생했다. 이후 정규직노조의 투쟁을 중소영세 노동자들이 지지할 수 없는 것처럼 됐지만 그렇다고 노동운동이 비전이 없다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며 “요즘 민영화 논란이 일며 병원이나 철도 등 해당하는 노동자들이 유효한 쟁점을 만들고 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 노동운동의 전망을 어떻게 세워서 계급적 운동을 복원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섣불리 혁명의 주체를 규정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계급의식을 위한 실천이 선행돼야 한다는 반박도 이어졌다.
안승천(울산노동자배움터) 씨는 “좌파들은 원론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관점과 원칙을 강조하지만, 그 노동자 계급이 어디에 있는지 의문이 든다. 민주노총을 얘기하는 것인가?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얘기하는 건가? 아니면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노동자를 말하는 것인가”라고 물으며 “노동자 계급을 쉽게 자처해서도 안 된다. 계급적 원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계급적 의식을 위해 무슨 이바지를 하나? 중요한 투쟁이 일어나면 좌파는 투쟁전술가지고 싸운다. 현장을 자기 정파 노조로 만들려하는데 이는 계급적 단결을 이루기보다 해치는 경우가 많다”고 반박했다.
이에 오세철 명예교수는 “68혁명을 정점으로 혁명의 열기가 가라앉았다.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 혁명은 다 실패했다. 그런데 10년 전부터 또 열기가 올라온다. 대중이 올라오는 거지 무슨 주의자들이 올라오는 게 아니다”며 “혁명의 열기가 올라오는 건 객관인데 문제는 주체다. 주체는 노동자계급일 수밖에 없다.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다. 올라오는 힘과 공산주의자들이 결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안을 만드는 방식은?
노동자 계급의 정당 건설과 국제연대
이후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할 주체에 관해 많은 논박이 이어졌다. 한편, 주체가 명료해 진다 하더라도 여전히 어떤 방식을 택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 역시 남아 있다. 과거 진보세력은 경제투쟁은 민주노총이, 정치투쟁은 민주노동당이 한다는 발상으로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를 꾀했으나 돌이켜보면 노동자 정당은 제도권 내·외부를 막론하고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대안은 노동운동을 지도할 수 있는 지도력을 갖춘 노동자 정당을 만드는 것밖에 없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안승천 씨는 “그동안 당 건설은 실패하고 이합집산했다. 문제가 깊으면 아주 근본적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사상을 재정돈하고 문제 해결의 주체를 세우기 위해 혁명정당 건설해야 한다. 전국 규모의 운동이 벌어지더라도 당을 건설하지 않고 분산적으로 투쟁하면 성과가 모이지 않는다”며 “당은 숫자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다. 노동운동을 지도할 수 있는 지도력을 갖추는 것이 과제다. 87년 투쟁 이후에 계급이 등장했다. 파업의 영향이 크다. 민노당도 노개투 이후에 만들어졌다. 계급적 총파업을 하면 민노당을 뛰어넘는 당을 건설할 힘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한편, 토론회에 참여했던 양효식 씨는 “운동 평가가 부족하다. 당 건설이 최우선 과제라고 하면서 그간의 정당 건설 시도를 이합집산했다고 평가하시면 안 된다. 그렇다면 당건설이 최우선 과제라고 하는 걸 어떻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나. 정당한 평가를 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오세철 명예교수는 “사노련도 사노위도 실패했다. 이들의 성과는 (노동자 계급 정당을) 대중에게 대놓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 진영의 강령과 원칙논쟁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세계 혁명당의 전망이 생긴다”며 “네 번째 인터네셔널, 진정한 인터네셔널을 향한 계급투쟁과 공산주의자들의 논쟁과 만남과 연대만이 앞으로의 전망이다. 이번 대구의 토론회로 시작한다. 계속 논쟁하고 싸워야한다. 이런 기풍 안 만들면 앞으로 운동은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