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출처=http://www.sdsaram.com/ | | |
오늘 성경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경구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그래서 기도에도 빠지지 않으며, 교회이름에도 잘 쓰인다. 그런데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빛과 소금은 어느덧 기독교의 수사적 언어가 되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한다. 또 하나는 이 경구가 비유적 표현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금 자체에 대단한 뜻이 있는 것처럼 소금에만 집중했다. 소금의 성분이나 특징, 거기서 도출한 의미 등.
그런데 소금보다는 소금으로 비유한 원래 대상에 집중하는 게 더 맞다. 소금이 비유한 대상은 무엇인가? '너희'이다. 즉 우리가 집중해야 할 단어는 '소금'보다는 '너희'이다. 소금은 비유일 뿐이고, 진짜 대상은 '너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금은 전혀 알 필요가 없는 건 아니다. 비유는 원래 대상을 더욱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방법이며, 실제대상을 소금에 비유함은 소금의 특성과 연관짓기 위함이다.
소금의 대표적인 특징은 짠맛이다. 짠맛으로 부패를 방지하고 음식 맛을 낸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나 빛을 이야기할 때는, 대전제가 하나 있다. 바로 세상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관점이다. 세상은 썩었고, 어둠이 지배하므로, 소금으로 썩지 않게 하고, 빛으로 밝혀야 한다는 신앙의지가 담겨 있다.
그런데 여기서 반문할 게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세상에 대해 소금과 빛이라고 했지만, 정말 그러한가이다.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날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철저히 자기들만의 공간으로 게토화됐다. 게토화라는 말이 별로 듣기 안 좋으니까, 노아의 방주라고 말하기도 한다. 타락한 세상에 대한 심판에 대비하여 노아가 구원받을 사람을 따로 태울 방주를 만든 이야기를 교회에 적용해서 교회를 구원의 방주라고 한다.
게토화됐든, 구원의 방주든 여기에 담긴 개념은 교회는 죄 많은 세상과 격리된 안전지대이다. 그래서인가. 세상에서 아무리 불의하고 험악한 일이 벌어져도 교회는 태평하다. 아우성치는 고통의 현장에 가지도 않을뿐더러, 가지 못하는 입장을 미안해하기는커녕, 현장에 잇는 사람을 매도한다. 적반하장이다. 이렇게 세상과 격리된 교회에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 하는 성경말씀을 갖다 대는 것이 맞는가 하는 문제의식이다. 세상에 대해 자신을 투신할 생각도 없고, 준비도 안 돼 있는 신자와 교회에 소금과 빛에 대해 요구를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여전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고 한다. 이 말씀에 대해 우리는 응답해야 한다.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
각별한 결단과 투신을 요구하는 부담지움을 벗어주기 위해서라도, 소금을 세상과 구분할 게 아니라, 세상과 한 몸으로 묶으면 어떤가?
알다시피 소금이 소금 자체로 있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어디에 들어가서 용해돼야 한다. 이처럼 '너희'도 세상 속에서 소금으로서 그냥 있기만 하면 어떤가. 그러다 보면 자연히 소금의 진가를 발휘하지 않겠는가.
1세기, 어느 랍비의 말이다. 짠맛이 없는 소금에 어떻게 다시 짠맛을 넣을 수 있느냐고 누가 물었다. 랍비는 노새의 태반으로 짠맛을 회복하라고 답했다. 그런데 노새는 번식능력이 없으므로 태반이 없다. 우문우답이다. 즉 진짜 소금은 짠맛을 잃지 않으므로 짠맛이 없으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짠 맛을 잃은 소금에 대해 매우 무겁게 말한다. "짠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 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라고. 성경은 소금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사람이야기를 하는 거다.
소금은 짠맛을 잃을 리 없지만, 사람은 얼마든지 맛이 갈 수가 있다. 신념을 포기하거나, 의지를 꺾거나, 본분을 버릴 수가 있다. 소금이 맛을 잃어서 사람에게 밟히는 것이야 아무 상관이 없지만, 하나님나라 운동의 일군이, 평화의 사도가 맛을 잃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후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하다. 운동이 폄하거리가 되는 건 순식간이다. 성경은 맛을 잃은 소금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자기 본분을 상실한 사람에 대해 경고하는 것이다.
그럼, 그리스도인의 짠맛은 무엇인가? 예수정신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을 수 없듯이, 예수꾼들은 예수정신을 굳게 지켜야 한다.
필자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에서 편의상 '너희'를 그리스도인으로 기술했다. 그러나 소금으로 은유한 대상인 '너희'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너희는 누구인가? 예수의 산상수훈이 처음 시작하는 마태 5장 1절을 보면, 예수를 따르는 무리 중, 제자들이 너희에게 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예수가 말씀하는 '너희'는 보다 직접적으로는 문맥상 오늘 성경말씀 바로 앞 절인, 11, 12절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예수 때문에 모욕당하고, 박해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는 사람'이다. 왜 이들은 모욕당하고 비난을 받나? 10절에 따르면, 의를 위하여 살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 박해를 받는 의는 어떤 일인가? 평화를 이루는 일이다. 또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다. 평화를 위해 일하면 상을 받을 것 같지만,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
| ▲지난해 2월 대구 캠프워커 앞에서 열린 키리졸브, 독수리훈련 반대 기자회견 | | |
필자는 2013년 12월 30일 대구검찰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공소를 제기해서, 2014년 2월 5일 첫 재판을 받았다. 검찰공소장을 보면, 반국가단체 찬양, 고무, 선전 및 이적동조를 총 26회 했다고 나왔다. 그 이적동조라는 게 대구평통사가 대구의 여러 단체와 함께, 기자회견을 통해 전쟁훈련 반대 등을 주장한 것들이다. 그런데 공소장은 대구평통사가 혼자 한 것처럼 교묘하게 꾸몄다.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은 외교국방안보분야의 NGO 단체이다. 국방안보분야는 너무 성역화되어서 쓸데없는 비밀과 잘못된 이데올로기, 부서이기주의가 매우 성행하는 영역이다. 평통사는 지난 20년 동안 불투명하고 왜곡된 성역을 하나하나 타파하고, 알려 나갔다. 안보는 대한국민 국민 모두의 것이지, 일부 특정세력만의 독점사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상을 줘야 할 텐데, 이적단체 혐의를 씌워서 벌을 주고 활동을 못하게 막으려 한다. 종북몰이에 혈안이 된 권력은 자기들을 반대하면 무조건 이적동조라는 주홍글씨를 매기려 한다. 이처럼 악한 시대에 평화활동은 도리어 권력에 미움을 사고, 박해받는 일이다.
이 시점에서 평화에 대한 개념을 살펴보자. 평화는 갈등이나 전쟁이 없는 조용한 상태가 아니다. 히브리낱말 샬롬은 하나님이나 이웃과의 관계에서 모든 계약 조건을 다 이행했을 때에 주어지는 평화이다. 계약이 온전히 이루어진 것이 샬롬이므로 계약을 지키기 위한 과정도 평화의 연장이다. 하지만 평화를 추구하다 보면 이해당사자들 간에 반드시 파열이 생긴다. 부정선거로 당선된 유사정권과 이에 저항하는 민주시민 사이에 파열은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필수불가결이다.
또, 이익을 독점하려는 자본가와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는 노동자 사이에도 파열은 피할 수 없다. 갑의 온갖 부당한 계약공세에서 을의 생존권투쟁은 외견상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그럼, 평화가 깨진 것 아니냐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여기서 샬롬의 정의가 새롭게 세워진다. 부딪힘 없는 조용한 상태보다는 시끄럽지만, 균형과 정의를 세우는 일이 평화임을 재정의한다. 모든 이해당사자 사이에 견해가 달라서 생기는 갈등 속에서, 이익을 일방독점하지 않도록, 타협, 조절하는 행위가 평화이다. 무엇보다도 평화는 약자에게 이익이 돌아가도록 한다. 그런 제반활동이 평화를 이루는 일이다. 이런 일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이 한다.
그래서 마태 5장 9절 말씀처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가 겪어봐서 알지만, 평화가 좋은 일이고, 고상하고 거룩한 일이라고 해서 모든 이가 평화를 위해 살려고 하지는 않는다. 알다시피 사람들 잇속이 얼마나 빠른가. 대개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다. 또는 기회주의적으로 안전하게 처신한다. 하지만 하느님의 아들로 불리는 사람은 평화를 위해 일한다. 놀랍게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일신을 던진다. 이런 면에서는 자신의 짠맛을 녹여서 세상에 맛을 내는 소금과 똑같다. 그리고 실제 적은 양의 염분이 바다를 이루듯이, 평화를 위해 일하는 소수의 사람으로 인해 평화가 구현된다. 참으로 복된 인생이다. 이왕이면 소금으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