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씨는 살아남았다
조태규(50) 씨는 잘 나가는 레미콘 업체로 이름 날리던 곰레미콘에서 일했다. 하지만 곰레미콘이 2009년 350억에 달하는 채무를 갚지 못해 부도가 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150명에 달하던 직원 대부분 정리해고됐고, 조 씨를 포함한 50여 명만이 살아남았다.
당시 부도난 곰레미콘은 곧바로 기업회생 절차를 시작해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문제는 회사 부도의 주역이었던 박용득 사장이 다시 법정관리인으로 선임된 것. 곰레미콘 노동자들은 이에 항의했으나 박용득 사장은 버젓이 다시 회사 경영에 복귀했다.
곰레미콘 노동자들은 십수 년 일한 직장을 살리려 갖은 희생을 마다치 않았다.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을 받았고, 고통분담금을 회사에 떼어 주기도 했다. 조태규 씨도 선뜻 임금에서 고통분담금을 냈다. 수십 년 한 직장에서 일한 곰레미콘 노동자들은 직장이 곧 자신의 삶이었기에, 우선 회사부터 살려야 했다.
조 씨는 살아남아서 슬펐다
레미콘 운전은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이었다. 아파트 현장에 물량을 대야 하는 날이면 새벽 4시에 출근해서 다음 날 새벽까지 레미콘을 몰기도 했다. 운전도 힘들었지만, 수면이 부족한 상태에서 레미콘을 모는 일은 고역이었다. 같은 심정으로 일과를 견뎌낸 조 씨와 동료들은 퇴근 후 소주 한 잔으로 스트레스를 삼키곤 했다.
일은 힘들었지만, 오랜 기간 몸 바친 직장은 옷에 묻어 굳은 시멘트처럼 조 씨의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한 부분이 됐다. 조 씨는 “나는 젊은 축이라 나가서 차 한 대 장만하고 도급을 하며 살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새롭게 시작하기 힘든 형님들도 있다”며 “오너가 지랄 같았지만 밀양에서 삶의 터전을 지키는 할머니들처럼 다른 데 옮겨서 일하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조 씨는 곰레미콘에서 12년을 일했고, 20년 넘게 일한 ‘형님’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렇게 어려움을 함께했던 동료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동료들은 09년 부도 이후 점수가 매겨졌다. 가족관계와 근무태도 등이 종합평가 돼 낮은 점수를 받은 동료들 대부분은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라면이나 먹고 살더라도 같이 살고 싶었다.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꿰고 사는데··· 살아 남아도 산 게 아닌 것이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기업회생 절차를 진행 중이던 곰레미콘은 2013년 8월 5일 법원으로부터 파산을 선고받는다. 회사를 빚더미에 앉힌 박용득 사장을 다시 법정관리인으로 선임할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 임금의 일부도 반납하고 끝까지 남아 고군분투했던 곰레미콘 노동자 26명은 법원의 파산으로 9월 30일 모두 해고됐다.
“곰레미콘 정말 튼튼한 회사였어요. 고속도로나 지하철 확장 공사 있으면 곰레미콘에서 물량을 댔죠. 돈도 많이 벌었어요. 그 돈이 우리에게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회사가 1,000억씩 이나 빚을 질 수가 없어요. 잘은 모르지만, 회사에서 사채를 많이 끌어 쓴 것 같아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돈을···회사 채무는 많이 탕감받아서 350억 정도로 됐긴 했지만 그래도 이 빚 때문에 인수하려는 곳도 없어요. 최악은 부분매각이 되는 거죠. 그러면 답답해져요”
09년 부도보다 지금 파산이 더 막막하다는 조 씨. 조 씨는 회사 인수를 어렵게 하는 것으로 빚가 더불어 노조 역시 영향을 끼친다고 했다. 조 씨는 “노조가 있으면 인수하려는 사람들은 당연히 다 싫어한다. 노조가 없어져야 살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조는 포기할 수가 없는 거다. 노조를 시작하며 많은 것을 바꿨다. 또 동시에 탄압도 시작됐다. 직장 자체보다 더 큰 의미가 된 노조를 포기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해고된 이후로 상신브레이크 해고자 등 대구에서 같은 처지가 된 해고자들과 함께 투쟁하기 시작했다는 조 씨. 매일 대구지방법원 앞에서 곰레미콘 파산과 해고의 부당함을 선전하기를 반복하는 곰레미콘의 해고자들. 이들은 까마득한 내일도 곰레미콘 노조 사무실에 출근한다.
조 씨는 살아남기 위해 다시 싸움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