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성경말씀은 매우 극적이다. 근데 질문 하나. 오늘 이야기의 발단인 아기 예수의 애굽피난 사건은 역사적 사실인가? 마태저자의 창작인가? 알 수 없다.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실례도 있고, 창작 아닌가 하는 실례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실례는 이집트에 있는 곱틱교회이다. 이집트가 모슬렘 국가이지만, 기독교인 곱틱교도가 10%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있다.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만 100개 넘는 곱트정교회가 있다. '기독교이집트정교회'가 정식명칭이고, 마가복음의 저자인 성 마가가 일대교황이라고 한다. 초대교회 이방선교의 진원지였던 소아시아의 무수한 교회가 지금은 모두 소멸한 것에 비하면, 이집트 곱틱교회가 수많은 전쟁과 이슬람 통치 하에서도 존재해 온 것은 대단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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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토레 가르파치오, 이집트로의 피신, 1515년, 앤드류 멜론 소장 | | |
이집트 곱틱교회 기원이 바로 오늘 성경말씀에 나오는 아기 예수의 애굽 피신여행이다. 애굽으로 피난하면서 아기 예수는 지나가는 길마다 이적을 행하였다는 신앙전승이 뿌리내렸고, 그 자리에는 곱틱교회가 세워졌다. 곱틱교회는 예수의 신성만 믿는 단성론자이다.(기독교 정통교리인 양성론-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믿는-에 깊이 인식된 기독교도들은 단성론을 이단으로 배제하지만, 지구상에는 정통교리가 그러든 말든 개의치 않는, 수많은 기독교도가 있다. 이를 볼 때, 기독교 자체가 교리보다는 우위에 있음을 본다.) 이집트에 단단히 자리 잡은 곱틱교회를 볼 때, 아기 예수의 애굽피난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인다.
그런데 오늘 성경말씀에 나오는 헤롯의 유아학살사건이나 누가복음의 탄생이야기를 보면, 역사적 사실인가에 대해 갸우뚱하게 한다. 물론 헤롯의 권력성향을 볼 때, 충분히 유아학살 같은 잔인한 일을 벌일 수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누가복음에 나오는 탄생이야기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이다. 예수 부모가 아기 예수를 하나님께 바치는 율법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간다. 성전에서는 시므온, 안나같은 노예언자들이 아기 예수를 상봉하고, 감격스러운 소회와 예언을 발한다. 이 모든 행동이 매우 한가한, 여유로운 일상의 모습이다. 헤롯이 학살을 자행하는 공포의 예루살렘이 아니다. 태어나자마자 급히 피난하는 마태복음의 모습과 예루살렘에 올라가 모세의 법을 차근차근 수행하는 누가복음의 모습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래서 유명한 신학자 크로산은 두 이야기 다 전적으로 이야기 구성상의 창조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크로산 『예수』58쪽)
필자가 늘 하는 말은, 성경은 어떤 역사적 사실을 말하기보다는 역사적 소재를 빌어서 신앙의 진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럼, 오늘 성경말씀이 말하는 신앙진실은 무엇인가?
오늘 복음말씀에서 거듭 반복해서 나오는 형태가 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2:15) 또는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2:17, 23)이다. 즉 아기 예수의 애굽피난, 헤롯의 유아학살, 나사렛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모두 예언자의 예언대로 이루어졌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마태의 주장대로 예언자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인지에 대해 검증을 해 보겠다. 첫 번째 사건, 애굽피신은 호세아 11:1의 성취라고 했다.
"이스라엘이 어린아이일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
호세아서 말씀은 하나님이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을 꺼내주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말씀에 나오는 요셉가족의 행로는 팔레스타인땅에서 애굽으로 간 것이다. 이동경로가 호세아의 예언과는 반대이다. 그럼 마태저자가 어거지로 예언을 갖다 맞춘 것인가? 어떻게 봐야 하느냐? 처음에는 약속의 땅이었던 가나안이 억압의 땅인 애굽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애굽에서 불러냈다는 예언이 딱 맞다.
두 번째 사건, 헤롯의 유아학살은 예레미야 31:15의 성취라고 했다.
"나 주가 말한다. 라마에서 슬픈 소리가 들린다.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다. 자식들이 없어졌으니, 위로를 받기조차 거절하는구나."
예레미야 예언자는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해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갈 때, 같이 끌려가는 라마의 자식들과 그 어머니들의 비극을 라헬의 슬픔에 비유했다. 라마는 야곱의 아내 라헬이 낳은 베냐민의 후손들이 사는 땅이다.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8킬로 위에 있다. 즉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베들레헴과는 정반대이다. 따라서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유아학살 비극과는 별로 연관이 없다. 그런데 라헬에게는 또 다른 전승이 있다. 라헬은 베냐민을 출산하면서 목숨을 잃고 땅에 묻히는데, 그 장소가 에브랏 곧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가이다.(창세기 35:19) 이 말씀처럼 베들레헴도 라헬에게는 각별한 장소이다. 라헬이 베들레헴 길에서 죽은 것을 잘 알고 있는 마태는 베들레헴이 비록 라마와 멀리 떨어진 장소이지만, 예레미야가 말한 라헬의 애통예언이 베들레헴에서 성취된 것으로 재활용했다.
세 번째 예언성취는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이다. 그런데 구약성경 어디에도 이런 말씀이 없다. 첫 번째, 두 번째 예언은 출처가 분명한데, 세 번째 예언은 출처불명이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고대인들은 논리전개에 단어유희기법을 잘 썼다고 한다. 비슷한 발음의 단어놀이이다. 가장 비슷한 말이 이사야 11:1이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이 말씀에서 메시아를 뜻하는 가지의 히브리낱말이 '내체르'인데, 이 단어와 발음이 비슷한 나사렛을 연관 지었다고 해석한다.
이상에서 보듯이 세 가지 인용구가 예수의 상황과 꼭 맞아 떨어지지는 않지만, 마태는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예언성취가 이루어졌다고 말씀을 전개한다. 마태에게 어떤 일정한 의도가 있다는 것인가? 아기 예수의 급한 피신, 헤롯의 유아학살, 다시 그 땅으로 돌아온 것 등은 모세의 일생과 판박이이다. 이스라엘의 원조인 히브리들이 밤중에 급히 애굽을 탈출한 것, 애굽왕 바로가 히브리들이 급속하게 불어나는 게 두려워서 산모에게 남자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한 것, 모세가 미디안광야에서 무명의 목자생활을 할 때, "애굽으로 돌아가거라. 너의 목숨을 노리던 사람들이 다 죽었다."(출 4:19)라고 주님께서 말씀해서 가족을 데리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간 것 등 말이다. 특히 돌아가라는 출애굽기 말씀은 오늘 성경말씀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그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마태 2:20)와 거의 유사하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마태저자는 이스라엘의 전설 모세에게 예수를 겹치기 하고 있다.
알다시피 예수가 유명인물이 된 것은 하나님나라 운동을 시작하고,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거치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그전까지는 완전 무명인이었다. 당연히 탄생이야기 같은 것은 남아 있을 리가 없다. 마태의 임무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예수를 유대인들에게, 유대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인의 정통성을 타고난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데 있다. 그래서 사용한 소재가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시작하는 족보(마태 1장)이고, 모세와 비슷한 일을 겪은 인물이며, 구약에 나오는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방식으로 그의 탄생과 공생애 직전까지 시절(마태 2장)을 서술한 것이다.
하지만 마태의 의도적인 서술은 도전으로 바뀐다. 바로 예수가 나사렛사람으로 살았다는 대목이다. 변방 중 변방,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촌동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고 한 것처럼,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지역이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예수는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상징된, 민중을 억누르고 노예로 만드는 권력세계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의 과정을 이끌었다. 이방의 땅 갈릴리를 새로운 애굽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것은 예루살렘 중심에 고정된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다. 중앙, 제일, 주류에 삶의 의미를 두는 사람에게는 나사렛사람이라는 게 도통 매력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를 양단간에 선택, 결단해야 한다. 받아들이든지, 무시하든지.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하나님나라 평등세상이 있고, 무시하는 자에게는 로마권력의 계급체제에서 노예로 살 수밖에.
복음은 오늘 우리에게도 요구한다. 필요에 따라 예수는 좋아하지만 나사렛 사람에는 거부감을 갖지 않는가? 하지만 예수는 내 이름 앞에 붙은 나사렛 사람도 받아들이라고 도전한다. 주변, 변방, 비주류들의 사회적 배경, 하층계급이 내 출신이라고 말한다. 또 주류에게 해로운 믿음을 나의 믿음으로 삼으라고 말한다. 예수는 나사렛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