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으로는 12월 대림절부터 새해가 시작한다. 기다릴 대, 임할 림. 즉, 오신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오실 그리스도를 고대하는 절기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림이 그리스도인의 한 해 생활의 처음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 성경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이다. 공식적으로 어떤 일을 할 때, 첫 일성이 매우 중요하다. 첫 일성에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의 성격과 방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요한의 첫 일성을 보자.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이다.(마태 3:2) 놀랍게도 예수의 첫 일성도 요한의 말과 글자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이를 봤을 때, 요한이나 예수나 그들 운동의 핵심요소는 회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읽기는 요한의 첫 일성인 회개에 대해 살펴보겠다. 여기서 잠깐, 예수는 분명 하나님나라 운동을 했는데, 어째서 '하나님나라'라고 하지 않고 '하늘나라'라고 하는가?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공경의 뜻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느라, 하나님을 하늘로 바꿔 말했다. 마태복음에서 특히 그렇다. 뜻은 똑같다.
마태저자는 요한의 출현에 대단한 의미부여를 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이 요한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말할 정도다. "이 사람을 두고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리고는 이사야 40장 3절을 인용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라고. 오래전부터 이사야 예언자가 요한의 등장을 예고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용의 출처인 이사야 40장 3절은 조금 다르다. "한 소리가 외친다. 광야에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길을 곧게 내어라"이다. 마태저자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요한에게 맞게 특화시켰다. 내용도 요한의 임무에 부합하도록 손질을 했다. 이사야의 예언은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라는 말인데, 마태는 예수의 길을 예비하라는 말로 각색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사야의 예언이 오늘날 요한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이라는 한 개인을 특별한 인물로 부각시킨다. 그의 옷차림이나 먹거리가 평범하지 않다.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띠를 띠었다. 그의 식물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구약 예언자를 아는 사람들은 이 인물묘사가 엘리야같다는 것을 직감한다. 엘리야의 옷차림도 요한과 같았다.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였다. "털이 많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왕은 "그는 분명히 디셉 사람 엘리야다"하고 외쳤다.(열왕기하 1:8) 왕도 두려워할 만큼 확실한 하늘의 예언자 엘리야. 그가 오늘 요한으로 다시 나타났다는 말이다. 그래서 마태는 "너희가 그 예언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하면, 요한, 바로 그 사람이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엘리야의 환생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민중들은 몰려왔고, 요한은 그들에게 죄사함의 물세례를 줬다. 오늘 이야기의 초점은 회개라고 했다. 회개하라고 외치는데, 도대체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오늘 성경말씀에서 단서를 찾아보자.
요한은 많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마태 3:7-9)
민중에게는 따뜻한 요한이 바리새와 사두개를 향해서는 분노의 소리로 규탄한다. 이들이 무언가 치명적인 잘못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게 뭔가?
바리새와 사두개는 예수의 적대자들 중 대표적인 세력들이다. 이들은 회당과 성전을 연결하는 두 중심축이다. 바리새는 향촌사회의 소자산가들인데, 이들의 사회적 성격이 종교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리새즘이다. 이들이 권위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리새의 율법학자들이 토라를 해석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토라해석의 원칙으로 정-부정 체계를 만들었고, 구체적인 규범으로 안식일법과 정결법으로 민중들을 지배했다. 그런 까닭에 복음서에서 보듯이, 이들은 예수와 사사건건 부딪혔다.
예수는 민중을 얽매는 안식일법과 정결례법을 일부러 깨뜨렸다. 그것 때문에 바리새는 점점 더 예수를 증오했다. 예수의 활동공간이 처음 촌락회당에서 호숫가로 이동한 이유도 바리새가 지배하는 회당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바리새의 종교사회적 성격에서 알 수 있듯이, 바리새를 깊이 사로잡은 안전의식은 바로 자기네가 만든 종교규정 준수이다. 이들은 이 규범들을 잘 지키면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규범준수 이데올로기는 민중들에게는 턱도 없는 요구이다.
사두개는 예루살렘을 대표하는 권력집단이다. 향촌사회 소자산가들이 바리새즘을 만든 것처럼, 대도시 대자산가들은 사두개즘을 만들었다. 사두개는 예루살렘과 성전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핵심세력이다. 로마총독과 결탁해 있고, 귀족들 중심인 산헤드린(오늘날 국회)을 움직여서 독점카르텔을 구축했다. 부재지주인 그들은 민중착취구조의 최종 수혜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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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 송전탑 공사를 반대하다 사망항 유한숙 씨(74) 분향소 설치를 두고 8일 오후 경찰과 주민들이 심하게 부딪쳤다. [출처=울산저널] | | |
더군다나 이들은 민중수탈의 중심세력이면서도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의식에 안주해서 자기 삶을 갱신해야 한다는 도전에 무지했다. 그러므로 요한이 그들의 혈통의식을 전면 부인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는데 혈통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회개와 선한 행실은 동전의 양면이다. 회개한다면 행실을 바꿔야 한다. 이스라엘의 사회모순과 누가 이 모순을 유지, 확대하는가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요한으로서는 기득권세력의 두 주체가 행실을 고쳐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으면서 세례만 받고자 하는 위선적인 태도를 용납할 수 없었다.
'독사의 자식들아'는 아람어로 매우 심한 욕이다. 살모사같이 '제 어미를 잡아먹은 놈'이라는 말이다. 민중은 한 사회의 현실 토대이다. 민중이 없으면 바리새도 사두개도 다 공허하다. 그들에게는 어미와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어미같은 민중을 잘 받들기는커녕,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위해 압살, 빈사상태로 만들므로 독사의 자식이라는 욕을 듣는 거다.
요한은 말하기를,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고 했다. 성령과 불은 모두 심판을 상징한다. 특히 영에는 바람의 뜻도 있는데, 농부가 타작 때 하는 키질이 이 영의 작용을 절묘하게 나타낸다. 키질로 일어나는 바람(영)이 알곡과 겨를 분리하여 알곡은 모으고(구원) 겨는 불사른다.(심판)
이처럼 오실 그리스도는 요한보다 더 강하신 분으로 훨씬 강력한 능력으로 심판하시는 분이다. 우리는 지금 이 분을 기다리고 있는 거다. 해방세상의 완성을 위해.
심판주의 강림을 앞두고 이를 미리 예비하는 요한의 선포 앞에 선 우리가 회개할 일은 무엇인가? 18대 대통령선거 일 년이 돼가는 시점에서 한국사회 정치현실을 놓고 말하자면, 돼서는 안 될 사람이 지도자를 하고 있다. 그 결과 온 나라가 신음하고 있다.
최고권력이 악한 것은 그렇다치고, 문제는 권력의 하위그룹들이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집단을 만들어서 권력에 편승하고 독점과 특혜를 누린다. 그 탐욕의 먹이사슬을 지키기 위하여 침묵의 카르텔를 유지한다. 출신과 지역, 학교가 그 커넥션의 중요한 토대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독점관계망이 주는 거짓안전에 빠져서 민주공화국의 공공성 실현은 안중에도 없다.
우리가 무수한 투쟁현장에서 만나는 권력과 자본의 하수인들, 큰 현장에서든 작은 현장에서든 예외없이, 그들은 독점의 관계망 속에 있는 것만 든든해 할 뿐이고, 약자의 고통, 원성에는 철면피하다. 양심이 화인맞았다. 그래서 요한은 그들에게도 외친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