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서비스 천안센터 A/S기사 故최종범 씨가 태어난 지 11개월 둔 딸아이와 부인을 두고 먼저 하늘나라로 갔다. 10월의 마지막 날, 충남 천안 자택 인근에 자신의 차를 세우고 홀로 생을 마감했다.
유가족은 고인의 시신이 안치된 천안의료원 장례식장 5호실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다 통곡하다를 반복했다. 고인의 부인은 아이를 돌보다가도 지인들과 얘기하다 목 놓아 울었다. 그 사이, 무럭무럭 자라 다음 달 18일 돌잔치를 앞둔 딸아이가 엉금엉금 기어 나오면 추모객들은 고개를 돌렸다. 환하게 웃음 짓는 아이의 모습은 그 자체로 감당하지 못하는 슬픔이었다.
살려고 발버둥 쳤다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난 최종범 열사는 둘째 형 최종호(36세) 씨와 둘도 없이 친한 사이였다. 최종호 씨는 동생의 죽음을 왜곡하는 각 종 소식을 접하는 게 낯설 뿐만 아니라 화가 났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갑론을박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인터넷에서 ‘어린 핏덩이를 두고 자살하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달린 댓글을 봤다. ‘죽을 만큼 힘들었던 삶에 대해 집중적으로 말해 달라’는 언론이 있었는데, 내 동생이 평소 자살을 생각했던 사람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내 막내동생 최종범은 살려고 발버둥 친 놈이다. 정말 열심히 살았다. 딸 아이 00 때문에라도 내가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던 놈이다. 자기 딸을 얼마나 사랑했는데... 쉽게 자살할 사람이 아니다”
최종호 씨는 딸아이와 부인을 위해 동생이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았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고인은 처가에서 살았고, 신혼여행도 가지 못했다. 부인에게 항상 미안해하던 그는 최근 없는 형편에 금반지를 준비해 부인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그리고 명절을 반납하고 밤 9시, 10시까지 일하면서 차곡차곡 모은 돈과 일부 대출을 받아 마련한 아파트 입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 양육비에 생활비 등 먹고 살아야 하는데, 아파트 대출금도 갚아야 했다. 어머니 병원비도 형제들이 나눠서 내니까 아무리 벌어도 돈 들어갈 곳이 많았다.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했던 첫 3달 동안 1천만 원 가량의 병원비가 나왔다. 하지만 동생은 자기 몫을 감당하지 않으면 형제자매들이 힘들어 할 수 있으니까 어떻게든 주변에 손 벌리지 않고 자기 힘으로 해보려고 발버둥 쳤다. 형들에게 가끔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최대한 자기 노력으로 삶을 꾸려나갔다. 내 동생이 아파트 입주를 손꼽아 기다리며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4년 전 고인이 삼성전자서비스에 입사했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함께 기뻐했다. 특히 뇌경색에 혈관성 치매가 함께 와 작년 3월부터 병원 입원 치료 중인 고인의 모친은 ‘막내아들이 삼성 다닌다’고 자랑하고 다니셨단다.
“동생은 효자에다 성실했다. 어머니 병원도 천안이라 동생이 자주 찾아가 돌봐드렸다. 그래서 나는 동생이 삼성에서 열심히 일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동생은 신입사원 때 월급 150만원 받았다며 좋아했다. 신입사원이면 다들 박봉인데, 첫 달에 150만원 받으면 ‘기록’이라고 했다. 미친 듯이 열심히 일한 것이다. 나는 내 동생이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동생은 A/S기사로 취직하기 위해 울면서 공부했다. 일을 하면서 자격증을 따서 삼성에 취직했다”
이게 뭐냐고!
동생을 추억하던 최종호 씨가 어머니와 동생 이야기를 함께 하면서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미 충혈된 그의 눈이 더 붉어졌다.
“어머니와 나, 동생과 이렇게 셋이 있으면 동생은 어린 아이로 돌아갔다. 그냥 꼬마였다. 맘 놓고 기댈 수 있는 곳이었던 것 같다. 내가 1~2주에 한 번 씩 서울에서 내려와 어머니 병원에 가면 동생과 같이 밥을 먹었다. 좋아하며 달려왔다. 내 동생은 정말 착했다. 겉으로는 활발하고 사람들을 리드하는 성격이었지만, 마음이 약하고 여렸다”
그래서 최종호 씨는 동생이 노조 모임 대화창에 “그 동안 삼성서비스 다니며 너무 힘들었어요. 배고파 못 살았고 다들 너무 힘들어서 옆에서 보는 것도 힘들었어요. 그래서 전 전태일님처럼 그러진 못해도 전 선택했어요. 부디 도움이 되길 바라겠습니다”라는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고 실종됐다는 소식을 듣고 믿지 않았다. 자살할 거라는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았다.
형제 중 최종호 씨와 가장 친하고 효자인 동생이, 전화 한 통화 없이 어머니 얼굴도 보지 않은 채 극단적인 선택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제수씨에게 31일 오후 2시쯤 연락이 왔다. 실종됐다는 것이다. 제수씨는 30일 밤부터 동생을 백방으로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했다. 노조 동료도 같이 찾으러 다녔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 위치추적도 안 된다고 했다. 제수씨 상태가 심각해 보였는데, 그래도 동생을 믿었다. 나는 동생에게 답답하고 힘든 일 있으면 며칠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문자를 남겼다”
그리고 몇 시간 뒤에 최종호 씨가 전화를 받자마자 대성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길을 걷다 주저앉아 “이게 뭐냐고!” 소리 지르며 울었다.
“제수씨가 막 소리 지르면서 동생이 죽었다고 했다. 천안장례식장으로 바로 왔는데, 그곳은 5년 전 우리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해 시신이 안치된 곳이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제수씨는 계속 ‘내가 왜 그 장소가 생각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한다. 동생이 사망한 곳은 동생 부부가 종종 데이트 하던 곳이다. 제수씨와 동료들이 온 동네를 뒤지면 찾아다녔는데, 제수씨는 그곳만 생각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제수씨가 자신을 탓하며 그 말을 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차 떼고 포 떼고
최종호 씨는 처음에 동생에게 노조에 가입하지 말라고 했다. 만일 노조에 가입한다면, 절대 나서지 말라고 했다. 책임감이 강한 동생이라 노조 활동을 열심히 할 것 같았다. 그는 동생이 잘못될까봐 걱정스러웠다.
“사장이 내 동생 노조 활동한다고 미워할 수 있으니까 걱정돼서 그랬다. 그런데 동생이 노조 가입하기 전에 ‘나는 죽어라고 일하는데, 왜 돈이 없냐’며 울면서 전화한 일이 있었다. 그 뒤 동생은 노조에 가입했다. 매형이 그러는데, 동생은 추석명절 내내 노조 얘기만 했다고 했다. 제수씨는 동생이 전태일님의 이야기도 자주 했다고 했다. 동생은 노조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 같다”
최종호 씨는 상중에 동생과 같이 일하는 삼성전자서비스 비정규직 노동자의 적나라한 현실을 알게 됐다. 이제근 삼성전자서비스 천안센터 협력사 사장이 편지 형식의 글을 언론에 공개해 고인이 ‘월평균 410만원 월급을 받았다’고 한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루 8시간 일하고 휴일에 쉰 게 아니라, 명절 반납하고 밤 9~10시까지 일해서 임금 400만원 받았단다. 하지만 ‘차 떼고 포 떼고’ 정작 200만원 남짓 받아 생활했다는 것을 알았다. 차량 유류비와 유지비, 통신비, 자재비 등 모두 동생이 냈단다. 실제 많이 받았다는 월급 200만원도 여름 성수기에만 그렇단다. 그리고 제수씨가 동생이 일하는 사진을 보여줬다. 동생은 제수씨에게 ‘내가 이렇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일한다. 아차 하면 잘못될 수도 있다’며 사진을 보냈다. 동생은 목숨을 걸고 일을 해 온 것이다”
최종호씨는 이제근 협력사 사장이 동생에게 퍼부은 욕설, 폭언이 담긴 녹음 파일도 모두 들었다. 조문 온 그의 친구들이 들려줬단다.
“내가 미안하고 마음이 아파서... 그렇게 힘들게 일하는지 몰랐다. 한 마디만 하면, 그 사람이 그렇게 했어도 동생은 끝까지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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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최종범 씨의 부인은 남편이 위태롭게 일하고 있는 사진을 간직하고 있었다. 고인이 살아 생전에 에어컨 수리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 출처 : 유가족 ] | | |
전태일일 순 없지만 전태일처럼
유가족은 최근 가족회의에서 두 가지를 결정했다. 먼저 병원 입원치료 중인 모친에게 조만간 아들의 사망 소식을 알리기로 했다. 63세의 모친은 아직 막내아들의 죽음을 알지 못한다.
“어머니에게 동생의 사망 소식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 제일 걱정이다. 일단 동생의 소식이 뉴스에 계속 나오기 때문에 어머니가 뉴스를 보지 못하게 해달라고 병원에 요청했다. 어머니가 충격을 어떻게 감당할 지 걱정이다. 의사들과 상의하겠지만, 어머니가 아들의 마지막 얼굴은 봐야 한다고 가족회의에서 결정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에게 천추의 한이 될 것 같다”
유가족은 또한 장례절차와 관련한 모든 것을 전국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에 위임하기로 했다. 유가족이 결정 이유는 딱 하나이다. 동생이 “전태일님처럼 그러진 못해도 전 선택했어요. 부디 도움이 되길 바라겠습니다”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딱 하나, 동생은 자기의 죽음으로 동료들의 삶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말이 아니었다면 가족장으로 치렀을 것이다. 동생을 계속 장례식장에 두는 것도 못할 짓이다. 유언대로 해야 한다. 나도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 사회가 잘못됐다는 것을 안다. 돌이켜보면 동생은 그야말로 노동착취 당한 것이다”
삼성전자서비스로부터 동생의 죽음에 대해 사과를 받고 싶지 않냐는 질문에도 그는 ‘사과보다 변화가 먼저’라고 했다. 유가족은 사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이 더 값진 일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물론 사과를 받고 싶고, 사과 받는 일이 중요하지만, 동료들이 동생처럼 살지 않게 하는 게 더 값진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조 활동에 대한 동생의 열정을 순진하다고 치부할 사람도 있겠지만, 내 동생은 그 순수함을 지키고자 죽은 것이다. 동생의 죽음을 무의미하게 만들 순 없다. 이상적인 말로 들릴지라도, 우리가 동생의 유언을 지키는 길을 가면, 동생은 계속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동생의 말인, 전태일일 순 없지만 전태일처럼 말이다” (기사제휴=미디어충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