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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관리툴 2013년10월31일 00시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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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백목사의 예수읽기(36)
누가복음 18:9-14 "우물안 의, 한가한 기도"

백창욱(대구새민족교회) baek0808@hanmail.net

오늘 복음 말씀은 기독교회 안에서는 꽤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러나 익숙한 이야기일수록 피상적인 선입견에 빠지기가 쉽다. 오늘 복음제목은 일명 '바리새와 세리의 비유'라고 부른다. 바리새와 세리의 기도가 주 내용이다. 특히 바리새의 기도에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따라서 독자들은 바리새를 주목하기 마련이다. "아~ 바리새가 이렇구나, 바리새 신앙을 조심해야지"라는 교훈을 얻기 쉽다. 그러나 바리새는 비유의 소재일 뿐이다. 오늘 비유의 주 대상은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몇몇 사람"(9절)이다.

구체적으로는 누가 공동체 안에 있는, 복음의 도와는 멀리 떨어진 몇몇 사람이 비유의 주 대상이다. 그러나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관계상의 어려움 때문에 반면교사로 내세운 인물이 바리새이다.
 
바리새는 '구별된 자'라는 뜻이다. 마카베오 전쟁 이후 가장 강력한 유대 종교 정파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물려받은 율법 및 선조들의 전통을 존중하고 일상생활의 사소한 데에 이르기까지 이 율법을 정확하게 지키려 했다. 이유는 메시야에 대한 약속들의 성취를 인간 편에서 확보하려는 분투였다. 바리새들은 십일조 및 정결례 규정을 매우 엄격히 지키기로 약속하는 사람을 자기들 공동체에 받아들였다. 이들의 율법적 위험성, 즉 자기들이 옳다는 자부심을 지닌 냉혹한 엄격성 때문에 예수께서는 이런 경건성을 사정없이 공격하였다. 바리새는 백성의 지도권을 놓고 사두개(귀족세력)들과 다투었지만,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한 뒤로는 유대교 사상을 주도하고 결정하는 주류가 되었다. 이런 까닭에 복음 저자는 기독교회에 대한 반면교사로 바리새를 자주 등장시켰다.

오늘 비유 이야기는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하나는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다"라고 시작한다. 오늘 두 사람의 행보가 기도하기 위해서이므로,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자. 한 글을 인용한다.
 
한자 말 '기도(祈禱)'를 풀이하면 이렇다. “祈”는 “示”(시, 제단의 형상)와 “斤”(근, 도끼)의 합자로, 제단 위에 도끼를 올려놓는 것이다. “禱”는 “示”와 “壽”(수:목숨)의 합자로, 제단 위에 목숨을 올려 놓은 것이다. 즉 기도는 자기를 제물로 바치거나, 자기 목숨을 바친다는 뜻이다.
 
기도의 순수한 우리말은 “비나리”이다, 간절히 빈다는 뜻과 비운다는 두 가지 뜻이다. 하나님께는 간절히 비는 수밖에 없고 하나님 앞에서는 나 자신을 비우는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빈 그릇의 자세이다. 그래서 기도자는 "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게 하신다"라고 고백한다.(김홍한 목사, 이야기신학 3호)

윗글을 세 가지로 압축하면, "기도는 목숨 걸고 하는 것이다. 기도는 자신을 비우는 행위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주체이다"가 요지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이 세 가지를 항상 충족하기는 어렵겠지만, 이 셋 중 하나는 반드시 들어가 있어야 참 기도를 할 수 있다. 오늘 두 사람의 기도도 이 기준으로 조명하면 기도자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바리새의 기도를 살펴보자. "바리새파 사람은 혼자 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가톨릭 성경은 "바리사이는 서서 자신을 향하여 이렇게 기도했습니다"라고 했다. '혼자 말' 또는 '자신을 향하여'가 주목할 단어이다. 복음 저자가 아무 의미 없이 이 문구를 삽입할 리 없다. 정말 말 그대로 자기를 향해 기도했다는 말이다. 기도의 주체는 하나님인데, 자기를 중심에 놓는 것은 근본적인 오류이다. 어떻게 이런 기도가 가능하지? 싶지만, 형식적으로 하면 가능하다. 바리새는 자기를 향하여 기도하면서도 "하나님, 감사합니다"로 운을 뗀다. 상호모순이지만, 형식적으로 할 때는 아무 문제 없다. 10월 26일 몇몇 골수분자들이 벌인 박정희추모예배,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한가 싶지만, 형식적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사진 출처: 미디어 몽구

그다음 바리새 기도에서 눈에 띄는 것은 '나'라는 말이다. 기도의 주어가 하나님이 아니고 나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나는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나는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이게 기도인가, 자랑인가. 뭘 구하는 것도 아니고, 회개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자기 형편에 대한 만족, 자기 의로 가득하다. 자기중심 기도는 이런 것이다 하는 것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혹시 하나님도 찾고, 감사도 하고, 바른 생활도 하고, 금식, 십일조 등 신자의 모범을 잘 지키는데 뭐가 문제란 말이냐? 하는 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은 자기 의가 아니라 애통해 하는 마음이다. 시편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바리새 기도에는 애통이 전혀 없다.

그리고 기도내용도 온전하지 않다. 바리새가 자랑하는 행위들은 자기 울타리에서나 통하는 '우물안 의'이다. 식민지지배 하에서 권력자들에게 착취당하고 유리, 방황하는 민중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다면, 이렇게 한가한 기도를 할 수 없다. 바리새가 자기의 안정적인 삶이 민중들의 희생과 헐벗음에 기반을 둔다는 것을 안다면, 이런 자랑질 기도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한가함으로 말하자면, 오늘날 교회도 못지않다. 불의와 폭력으로 가득 찬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교회의 언어와 행위는 어찌나 한가한지 이루 말할 수 없다.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행사들을 보자면, 참 오순도순하고 태평하다. 어떨 때는 부럽기조차 하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한가한 생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전에, 애써서 숨어 있는 진실을 우선 체득해야 한다. 자기들의 한가한 생활 정반대 편에 있는 고통의 현장을 찾아가고, 그 속에서 다시 하나님을 찾는 게 필요하다. 그렇다면 정녕 한가함에 머무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세리는 성전마당 남성들의 구역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친다. 하는 말이라고는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 말이 전부이다. 하지만 예수는 이 사람 세리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고 선언한다. 세리는 유대 사회에서 전혀 환영받지 못하는 인물이다. '세리와 죄인'이라는 고유명사가 있을 정도로, 완전히 반율법의 상징으로 배제당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세리라는 기구한 운명 때문에, 세리는 바리새처럼 자기중심 기도에 빠지지 않았다. 자기운명의 사슬을 벗겨줄 분은 하나님뿐이심을 분명히 알았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정확하게 기도했다.

이 비유가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교훈이 될까? 의로움의 여부를 결정하는 일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이웃을 멸시하는 일도 사람의 본분을 망각하는 일이다. 오직 이웃은 선대의 대상이지 멸시의 대상이 아니다. 특히 오늘날 권력자는 권력을 위임해 준 이웃(주권자 국민)을 선대 해야 하는데 되레 억압 배제한다. 마치 자기 위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어리석음의 극치이다. 권력 위에는 하나님이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사람은 사람의 본분을 망각하고 하늘의 주권을 침탈한 것이다.

예전 교회생활을 돌이켜 볼 때, 내 스스로 자신을 의롭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을 아래로 보는 경우는 어떤 것이었을까 생각해봤다. 뜻밖에도 교회행사들의 수행 여부였다. 여러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사람이 스스로 흡족히 여기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 대해 갖는 상대적 우월감, 기도와 성경 읽기에 시간을 많이 들이는 사람이 마음속에 갖는 의로움과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보내는 근거 없는 선입견, 교회에서 시행하는 여러 사업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이 스스로에 대해 보람을 느끼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경우들이다. 오로지 교회 안의 행위가 기준들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의 판단이다. 그러나 우물을 벗어나 세상 밖으로 나가면 얼마나 광대한 하나님의 세계가 펼쳐져 있는가?

자신을 거룩하게 해야 할 신앙행위가 되레 자신을 불순하게 할 위험이 더 크다. '오십보백보, 도토리 키재기'라는 말은 공연히 생긴 말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의 형편이 매일반이다. 고백하건대, 사람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니 자신의 연약함을 절감하고 하늘의 자비를 구하는 일이 급선무다. 겸손의 영이 독자들을 감싸 주기를 기원한다.
 

백창욱(대구새민족교회) baek08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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