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의 인생행로는 무난했나? 험난했나? 다수가 가는 길에 편승해서 편안히 살았는지? 아니면 늘 외로운 늑대처럼 홀로 길을 갔는지? 무엇을 결정할 때도 고민과 번민 없이 남이 해 놓은 일을 따라갔는지? 아니면 잠 못 자고 씨름하며 외로이 결단했는지?
권력이 선전, 조장하는 대로 사는 길은 대체로 편안하다. 자본에 저항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일만 하면 착한 근로자라고 추켜세워 준다. 그러나 권력에 반대하여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외치고 시민의 권리를 주장하면 수난을 각오해야 한다. 체포연행구속이 다반사이다. 자본에 고분고분하지 않고, 근로자가 아니라 노동자라고 선언하고 민주노조를 만들면 자본은 그런 노동자를 가만두지 않는다. 탄압은 불 보듯 빤하다.
그래서 수난이 두려운 많은 사람이 편한 길을 가고자 한다. 넓은 길을 좋아한다. 묻혀 가면 별 탈 없이 살 수 있다고 믿고, 권력과 자본이 조장하는 대로 따라간다. 그런데 그런 길이라고 해서 마냥 무탈한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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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도 삼성전자서비스노동자들의 집회에 참석했다. | | |
삼성전자서비스노동자들이 노동조합 만든 것을 잘 알 것이다. 10월 12일(토) 침산동 삼성전자서비스 대구경북지사 앞에서 집회가 열렸다. 그들이 분노에 차서 증언하는 노동실상은 한숨 나고 기가 막혔다. 9월 27일 삼성서비스의 한 노동자가 과로사를 당한 것을 보더라도 자본이 시키는 대로 일만 하면 좋은 게 아니라, 죽을 수도 있다. 그렇게 죽도록 일한 대가가 노동자한테 돌아가면 불만이 없을 텐데, 그 모든 이익은 오로지 자본에만 돌아간다. 그러니 오죽하면 무노조로 악명을 떨치는 삼성에서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노동조합을 만들었겠는가.
신앙에서 소수자로 사는 길도 분투가 필요하다. 주류가 아녀서 기댈 인맥이나 환경이 없어서 외롭고 쓸쓸하다. 그래서 옳은 길을 가고 싶지만, 아예 엄두를 못 내는 사람도 있고, 가다가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머리로만 관심 있는 척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말이다. 신앙의 소수자로 사는 게 손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데 기댈 데가 없어서 진실로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고, 또 자기가 가는 길이나 믿는 바에 대해 더 명료하게 생각할 수 있는 바탕을 가진다.
대세를 따르면 편할 것 같지만, 그 선택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선택한 엄밀한 결정이 아닌, 그저 이익만 좇는 결정이라면 나중에 반드시 그 대가를 겪는다. 본인의 생각이나 판단이 있지만, 다수에 휩쓸려서 기회를 놓치고 수동적이 된다. 그런 삶을 주체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성경은 말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마태 7:13-14)
오늘 복음이야기는 병의 치유보다는 치유 받은 사람들의 대조적인 처신이 문제가 됐다. 열 사람이 나병으로부터 고침받았다. 그런데 그중 단 한 사람만이 예수께 되돌아와서 감사를 표했다. 한 사람만 되돌아온 것이 예상 밖의 일인지라, 예수 자신도 의아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되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 사람 한 명밖에 없느냐?"라고 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이야기의 초점은 유일하게 감사를 표한 한 사람과 나머지 아홉 사람에 대해서이다. 그전에 예수가 불쌍한 민중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주목하자. 예수가 길에서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났다. 나병환자는 사람들에게 극한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제도권과 어울리지 못하고 완전히 격리돼서 살아야 한다. 제도권 사회가 공식적으로 소외시킨 사람들이다. 그런지라 이 사람들도 예수께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소리만 외친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들의 외침은 세상에서 가장 간절하고 절박하고 진실한 소리이다.
10월 13일, 세계에너지총회가 열린 엑스코 앞마당에서 열린 밀양, 청도대책위 기자회견에서 밀양할매가 외친 소리도 절박한 진실이 담긴 절규였다. 가장 약한 자들의 소리는 곧 하늘의 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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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에너지총회가 열린 엑스코 앞마당에서 밀양, 청도 송전탑 반대 대책위 기자회견에 밀양 한옥순 할머니가 참석해 절규하고 있다. | | |
예수 역시 약자 편인지라, 하늘의 소리를 곧바로 알아들었다. 예수는 그들을 보고 말씀한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이 말씀은 그들 병이 나았음을 보증하는 말이다. 레위기 13, 14장을 보면, 악성피부병에 걸린 사람들의 상태를 보고 격리나 공동체 복귀를 판정, 선언하는 사람이 제사장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이들더러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한 것은 율법의 정결규정에 따라 제도권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한 배려이다. 예수는 이처럼 약자들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즉시로 응답하는 분이다. 우리가 이분을 구세주로 믿는 이유이다.
민중을 위하는 예수의 태도를 부러 말하는 이유가 있다. 권력의 행위가 예수와 모습과 너무도 상반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권력이 국가폭력으로 벼랑으로 밀어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권력은 또 자기들의 잘못, 위기를 벗어나고자 희생양을 만들어 제물로 삼기도 한다.
그들이 어쩌다 민중들 자리에 나타나더라도 그들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인의 장벽을 친다. 사전에 짜놓은 사람만 권력자를 만날 수 있다. 제주강정주민들이, 밀양주민들이, 억울한 일을 겪는 사람들이 권력자를 만나 간절하게 대화를 원하고 진실한 목소리를 전하고 싶지만, 그들은 인의 장벽 속에 짜놓은 각본대로만 움직인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제사장에게 가는 길에 모두 깨끗함을 받았는데, 그 사실을 확인하고 예수께 되돌아와서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표한, 단 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이 사람의 생각과 행동기제는 무엇인가? 이 사람은 자기 병을 낫게 해 준 원인자가 예수라는 자의식이 분명했다. 그래서 가던 길을 되돌아섰다. 어차피 유대인 제사장에게 가는 길은 사마리아 사람인 자신과는 무관한 행보인지라 안가도 그만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마땅히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사리분별하고 즉시, 또 정확하게 행동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예수께 감사하는 일이다.
그럼, 나머지 아홉 사람의 생각과 행동기제는 무엇인가? 예수 말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되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 사람 한 명밖에 없느냐?" 이 말뜻은 한 사람만 사마리아 사람이고, 나머지 아홉은 본토 유대인임을 말한다. 나병이 깨끗해진 치유역사는 열 사람 모두에게 같을 텐데, 어째서 아홉 사람은 되돌아서지 못하고 가던 길을 그냥 갔을까?
새로운 길, 예수께 가는 길보다는 제사장에게 가는 길이 훨씬 수월하고 편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제도권 사회로 돌아가는 일에만 몰입했다. 그러나 그 사회는 그전과 똑같은 율법사회이다. 피부병에 걸리면 언제든 다시 자기를 격리시키고 내쫓아버리는 배제의 사회다.
자기 몸이 깨끗해진 것을 확인했지만, 치유자가 예수임을 자각했지만, 제사장 쪽으로 계속 발걸음을 하는 자신들에 대해 어떤 문제의식이 스쳐 지나갔지만, 관성적인 발걸음으로, 또 독자적으로 행동할 용기가 없었으므로, 그냥 묻혀 가버렸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주체적으로 살 결단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실체 없는 다수의 분위기에 휩싸여서, 또 유대인이라는 동질성에 묶여서.
반면에 사마리아 사람은 민족적 동질성이나 유대율법에 매일 필요가 없었으므로 과감하게 그 틀을 벗어날 수 있었다. 소수자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이다. 그 덕에 사마리아 사람은 병만 치유받는데 그치지 않고 전 인격이 구원받는 은혜를 얻었다. 예수가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해방선언을 한 것이다.
필자가 요즘 거듭 확인하는 일은 하나님의 소리에 응답하고 그 체험을 삶으로 사는 사람들은 소수, 작은 자들이다. 그 믿음이 너무도 굳건해서 상대가 국가권력일지라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운다. 이는 하나님(하늘)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다수, 큰 자들은 그 사회가 보장하는 기득권과 특권에 빠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지 않는다.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커넥션, 카르텔 인맥과 술수에서 온 것인 줄 알기에,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모순과 갈등이 있어도 결코 의와 약자 편에 서지 않는다. 여전히 자신들이 장악한 제도사회의 단맛에 빠져서 살아왔던 대로 살려고 한다.
주류의 불의가 성공으로 칭송받는 시대에 사리분별을 옳게 하고 진리 위에 서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러나 그 길 위에 서는 사람은 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