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왜곡이라는 언론·시민단체의 지적을 무릅쓰고 교과서 발행을 강행하는 교학사의 태도에서 배울 것이 하나 있다. 그 내용의 진위는 차치하고, 끊임없이 역사를 재구성하는 기억투쟁에 충실하다는 점이 그것이다. 역사 왜곡을 시도하는 세력은 역사 왜곡을 통해 자신이 쌓은 부와 권력,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한다.
지금 교학사 역사교과서가 논란이지만, 2011년에는 교육과학기술부가 나서서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교과서 서술지침을 수정하기도 했다. 이렇듯 역사가 끊임없는 기억투쟁이라면, 우리는 제대로 기억해야 할 역사에 대해서도 충실할까.
1946년 10월 1일 저녁, 파업에 돌입한 대구의 철도, 우편국, 전기, 섬유, 금속 등의 노동자 500여 명이 당시 대구시청(현재 경상감영공원) 앞에서 시위하던 중, 경찰의 발포로 노동자 2명이 사망했다. 10월 항쟁은 이때부터 불이 붙어 다음날 만여 명의 군중이 당시 대구경찰서 앞에 모여 경찰과 충돌했다. 이 사건으로 13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0월 항쟁 67주기를 맞아 4.9인혁열사계승사업회는 이번 달 2일 10월 항쟁 현장과 보도연맹원 대량 학살이 벌어진 경산시 평산동의 코발트광산을 답사했다.
지도에 없는 경산 코발트광산
오전 10시 30분부터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시작한 답사 일정에 20분가량 늦었다. 코발트광산을 택시 운전기사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행인에 길을 물어도 알지 못해 광산 주변을 20분가량 맴돌았다. 경산 코발트광산은 2004년 처음 발굴되었지만, 여전히 인터넷 지도와 내비게이션에도 나오지 않는 그야말로 유령 광산이다.
주최 측과의 통화로 어렵사리 도착한 코발트광산의 모습은 스산했다. 하지만 곳곳에서 복원의 흔적이 보였다. 현재까지 여러 전문가와 시민단체의 노력 끝에 500여 구의 시신이 발굴됐으나, 여전히 3,000여 구 가량이 광산에 묻혀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경산 코발트광산의 제 1·2 수직갱도, 제 1·2 수평갱도와 유골 임시안치소는 경산시 평산동 파티마재활요양병원에서 남서쪽 25m가량 지점에서 반경 100m 이내에 밀집해 있다. 제 2 수평갱도는 남동쪽으로 수백 m가량 발굴 작업이 진행됐다. 일제강점기에는 자원 수탈의 현장으로, 한국전쟁 때는 학살의 현장으로 사용된 이 갱도들은 하나로 연결된다고 한다. 제 2 수평갱도 내부 130미터 지점에 이르니 발굴 작업 중인 현장이 나왔다. 주변 화강암에는 까맣게 변색한 유기물 사체들이 묻어있었으며, 갱도 좌우로 간간히 뼛조각들도 보였다.
 |
| ▲제 1 수직갱도. 이곳에 시신을 밀어 넣어 가득차 다른 수평갱도로까지 시신이 밀려갔다 | | |
유골 임시안치소 들어가자 현장을 설명하던 주최 측 담당 한 명이, 진열된 넓적다리뼈 하나를 가리키며 그것의 골밀도를 볼 때 20대 남성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그 옆으로 두개골이 보였다. 눈과 입은 흙이 된 지 오래지만, 그의 침묵은 어떤 말보다도 강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았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보도연맹원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감행했다. 경산·청도지역의 보도연맹원과 대구형무소 재소자들이 코발트 광산에 끌려와 학살됐다. 한 유족의 증언에 의하면 7월 초부터 하루에 수백 명의 보도연맹원과 대구형무소 재소자들이 군용트럭에 실려와 총살됐다고 한다.
60년 당시 강창덕 매일신문 기자가 코발트광산을 보도한 이후 진실을 알리기 위해 힘썼던 이복영 선생은 “수직 갱도에 여러 가지 형태의 유해가 있었다. 도끼에 찍힌 시신, 총탄에, 화혼에 사망한 시신과 산채로 매장된 시신도 보였다. 제1 수직갱도에 시신을 집어넣다 보니 다른 수평갱도에까지 시신이 밀려갔다”고 증언했다.
경산 코발트공장은 관련 단체의 노력으로 조금씩 복원되고 있으며, 경산시와 경상북도 등 관청에 의해 역사체험관광지 조성이 추진 중이다. 이성번 10월항쟁유족회 사무처장은 “역사체험관광지로 보수단위에서는 일제에 의한 자원수탈에 초점을 맞추려 하지만 국가폭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구 도심. 10월항쟁의 기억을 더듬다
경산 코발트광산 답사 이후 10월항쟁 현장 답사를 위해 참가자들과 함께 대구로 이동했다. 46년에 일어난 10월항쟁과 50년 보도연맹원 학살장소로 쓰인 경산 코발트광산은 언뜻 연관관계를 짐작하기 힘들었으나, 간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다.
이영일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소장은 “시기적으로 떨어져 있고, 보도연맹 사건은 주로 민간인 학살로 알려졌으나 간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다”며 “10월 항쟁을 주도했던 세력이 이후 보도연맹에 가입해서 자기 활동을 하려 했다가 한국전쟁이 터지는 시점에서 학살된 것”이라고 말했다.
10월항쟁은 앞서 말했듯 민중을 억압하던 미 군정에 반발해 발생했다. 하지만 교학사 역사교과서는 10월항쟁을 ‘대구 폭동’으로 서술해 ‘대구 10·1사건’으로 수정하라는 국사편찬위원회 검정심의위원회의 지시를 받은 적 있다. 교학사는 당시 지적받은 페이지만 수정하고, 나머지 본문에서는 여전히 ‘대구 폭동’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답사 참가자들은 ▲대구의전 학생시위현장(현재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형무소 터(현재 삼덕교회) ▲보안사령대(태백공사, 현재 동아백화점 맞은편 주차장)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원회 대구지부 사무실(현재 중구 북성로 프린팅파트너 상가) 등을 차례로 방문했다.
대구시 중구 삼덕동에 산적한 10월항쟁 현장은 세월이 흐르며 많이 훼손됐다. 일제강점기 ‘도굴왕’으로 불리던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가 태백공사 마루 밑에 숨겨졌던 유물들을 도굴하기도 했다. 훼손되고 도둑맞은 유적지는 세월이 지나며 기억에서도 사라지고 있다.
이날 답사에 함께한 김은희 4·3추가진상조사단 전문위원은 “제주 4·3의 경우 특별법도 제정되고 진상 규명도 상당 부분 이뤄졌지만, 대구 10월항쟁은 60주년부터 겨우 위령제를 지낼 수 있을 정도니 이제 시작이다”며 “제주의 경우 진상규명에 제주도민이 공동체적 동료의식으로 많이 참여했다. 대구는 아직 지역 문화나 분위기가 10월항쟁을 재조명하는 데에 동조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다. 대구에서 10월항쟁의 진상을 알리려는 움직임이 규모는 작지만, 진정성이 있으니 언젠가는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성번 10월항쟁유족회 사무처장은 “06년도 처음 위령제를 시작한 이후로 지역에서도 10월 항쟁에 대한 분위기는 조금씩 환기되고 있다. 대구지역이 보수적이기도 해서 유가족들은 자기 유족이 순수한 민간 피해자로 조명받고자 하지만, 고인들이 진보적 민중운동에 스스로 가담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현재 대구·경북의 정치성향이 보수적이라는 것에 빗대어, 혹자는 10월항쟁 당시는 대구·경북도 진보적이었다고 이야기 하곤 한다. 하지만 지금 '진보'라고 여기는 의미처럼 특정 정당에 대한 호불호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10월항쟁과 대량 학살현장에서 느껴지는 것은 생존권과 인간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민중의 자발적인 저항과 항쟁의 정신이었다. 이름모를 유골의 눈빛은 오늘의 우리에게 지도 위에 사라진 역사를 기억하라는 메세지를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