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6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린 기독교 목회자들의 촛불시국기도회 [출처=백창욱] | | |
9월 26일(목) 저녁, 서울시청 광장에서 기독교 목회자들이 촛불시국기도회를 하고, 노숙했다. 바로 맞은 편에는 프라자호텔이 있어서, 밤이슬을 맞으며 비닐과 침낭을 덮고 자는 우리 목회자들 모습과 큰 대비가 됐다. 우리끼리 세상에서 가장 큰 방에서 숙박한다고 농담했다. 우리 옆자리에는 "박근혜 대통령은 쌍용자동차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하라"고 촉구하며 노동자들이 단식농성을 하고 있었다.
쌍용자동차의 비극적인 사태에 아무 책임도 없는 노동자들이 오히려 20일째 밥을 굶고, 목사들은 편한 집 놔두고 거리에서 추위에 떨며 노숙을 하는 현실. 그러나 정작 그 문제 해결의 진원지에 있는 권력자들은 천하태평으로 호의호식하며 고통의 현장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현실이 오늘 복음말씀인 부자와 거지의 극단적인 대비와 비슷하다.
오늘 복음말씀은 이야기 방식이 무엇인가? 비유인가? 허구인가? 사실보도인가? 복음저자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면 좋은데, 그런 설명 없이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예를 들면, 누가 15:3은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며 그 유명한 잃은 양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오늘 복음 첫 말씀은 그냥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로 바로 시작한다. 특히 오늘 복음은 '죽은 뒤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어서, 더더욱 이야기방식이 궁금하다. 이 부분을 사실로 읽어야 하는지, 비유말씀인지, 허구로 봐야 하는지가 더욱 모호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 실상이 부자와 빈자 간에 극한 차별과 대조가 마구잡이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기에, 굳이 이야기방식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복음저자도 설명을 하지 않는 이유는, 따지지 말고 그냥 이야기 내용에 귀를 기울이라는 뜻이다.
오늘 이야기는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지극히 공평하다. 이생에서는 부자가 이루 말할 수 없는 호화사치를 누리지만, 거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처지이다. 그런데 죽은 뒤 저승에서는 두 사람의 처지가 통쾌하게 역전된다. 복음저자는 부자와 거지를 의도적으로 대비시킨다.
 |
| ▲표도르 브로니코프(Fyodor Bronnikov)가 1886년에 그린 부자 집 앞의 나사로 | | |
먼저 옷을 보자.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다" 부자는 촉감 좋은 값비싼, 요즘 말로 명품 옷을 입고 살았다. 반면에 부자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는 거지가 피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다. 피부가 덧나서 진물이 흐르는 알몸 그대로 있다는 말이다.
먹거리 삶을 보자. "부자는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반면에 거지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조차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개들까지도 와서 거지를 핥으면서 빵부스러기도 채 갔기 때문이다.
부자가 누리는 사치의 1/1000만이라도 거지에게 베풀었다면, 거지는 이렇게 비참한 생활을 하지는 않을 거다. 부자의 연락(宴樂)을 좋다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즐거움이 약자들의 고통과 희생을 짓밟고 누리는 악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부자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게 살다가 죽었다.
죽은 장면도 극단으로 대조된다. 부자는 죽어서 묻히었다. 많은 사람의 조문을 받으면서 정상적으로 장사를 치렀다는 말이다. 반면에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다. 죽어서 좋은 곳으로 갔다는 말이지만, 이면에는 거지가 죽어서도 장사지내지 못한 채 그냥 버려졌다는 말이 숨어 있다. 장사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장면이 바뀐다. 다음 장면은 죽은 후 두 사람 모습을 보여준다.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 복음이야기는 부자가 왜 지옥에 떨어졌는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두 사람의 운명이 이렇게만 끝나지는 않을 거라는 기대가 있기에 부자의 처지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악인은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리고 선인은 아무 보상 없이 이렇게만 끝나면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하는 정서 때문이다.
부자가 지옥에서 보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나사로가 있는 게 보였다. 부자는 이승에서 자기 집 대문 앞에서 구르는 나사로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기에 이름도 모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나사로의 이름을 부르며 애원한다.
"아브라함 조상님,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부자의 애가 닳은 모습이 느껴진다. 부자는 살아서는 애원을 받아도 외면만 했지, 자신이 애원한 적은 결코 없다. 아쉬운 게 없는데 애원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무수히 애원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수히 거절당했을 것이다. 그것조차도 저승에서 완벽하게 역전된다. 부자는 절절히 애원하고 있고, 나사로는 편안히 듣고 있다. 이 장면에서 부자와 나사로는 동시에 이승에서의 일이 떠올랐을 게 틀림없다. 이승을 떠올리며 부자는 후회막급이었을 것이고, 나사로는 인생을 역전시키는 하나님의 신비에 대해 감탄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저승에서 인생역전한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한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올 수도 없다."(누가 16:25-26)
아브라함이 말한 큰 구렁텅이는 누가 만들었을까? 이승에서 부자가 갈라놓은 구렁텅이다. 가난한 자 억울한 자 약한 자들이 자기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책으로 매춘부언론으로 국가폭력으로 만들어 놓은 구렁텅이다. 그런데 저승에서 그 구렁텅이 때문에 되레 자신이 물 한 방울조차도 도움받지를 못한다. 그래서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씀은 진리이다.
그러자 부자는 또 다른 조건을 내건다. 끊임없이 거래를 시도하는 모습에서 부자가 어떻게 부자가 됐는지, 그리고 그 심성이 지옥에서도 바뀌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형제가 다섯 있는데, 그들에게 나사로가 가서 경고하게 해달라고 매달린다. 죽은 자가 살아서 가서 이야기해야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라고 답한다.
모세와 예언자들은 어떤 말을 했나? 율법과 예언서는 온통 약자보호법으로 가득 차 있다. 가난한 자, 궁핍한 형제를 벗겨 먹지 말아라. 그들을 억울하게 하지 마라. 매 칠년 끝에는 빚을 면제해라. 50년째 되는 해(희년)에는 모든 종과 땅을 해방해라. 불의한 이익을 취하는 자,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 성안 거민에게 강포를 행하는 자를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말씀들이 약자와 가난한 자를 지키라고 말씀한다.
이를 볼 때 부자는 모세와 예언자가 말씀한 부자의 의무를 하나도 이행하지 않은 거다. 이를 뒤늦게 깨닫고 자기와 똑같이 사는 형제가 염려된 거다.
그런데 회개이유가 매우 실용적이다. "아브라함 조상님과 나사로와 함께 그곳에서 영원히 살게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그들만은 고통받는 이곳에 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빈다. 약한 자를 돕지 않는 죄, 함께 사는 세상을 도모하지 않은 죄를 뉘우치는 회개가 아니라 고통을 면하기 위해서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전해 달라고 한다. 실용적인 회개. 어쩌면 오늘날 풍토와 이리도 닮았는지.
그러나 모세와 예언자 음성에 무감각해진 사람들은 부활한 사람이 말하는 회개요구도 쉽게 거절한다. 실용적으로 무장했기에, 회개로 실익이 없으면 하지 않을 거다. 우리는 부자가 아니라고 안심할 게 아니다. 주위의 고통에 무심하고 자기 이익만 추구한다면 부자 심보와 다를 게 없다. "얘야 되돌아보아라"라는 아브라함의 말처럼,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매일매일 생활은 어떤지 상고해야 한다.
다행히 우리 곁에는 율법과 예언자의 말씀이 있다. 이 말씀들을 간직하자. 이 말씀들이 욕심에 물들려는 나의 마음을 정화해 주신다. 꼭 붙들기를 바란다.
 |
| ▲쌍용차 문제해결을 위한 단식농성단. [출처=참세상]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