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포스터 앞에서 한참 망설였다. 일본 드라마를 통해 친숙해진 배우‘마츠 다카코’의 화장기 없는 얼굴이 포스터 전면을 장식했다. 단아한 그녀의 얼굴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다소 위압감을 느꼈다. 그즈음 만개한 벚꽃을 핑계로 다음 기회를 벼렸다.
중학교 1학년 교실에서 막 학교를 관두는 담임교사가 자신에게 벌어졌던 불행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린 딸의 죽음에 얽힌 범인으로 자신의 학생 두 명을 지목한다. 영화는 시작부터 거침없다. 소설에서 화자를 바꾸는 서술 방식처럼 영화는 주요 인물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뮤지컬 영화처럼 떼 창과 떼 춤도 등장한다. 중학생 아이들의 내면을 노래와 춤으로 보여주는 형식은 신선했다. 전체적으로 조명이 어두웠다. 암울한 분위기는 다음에 또 어떤 사건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질풍노도의 걷잡을 수 없는 아이들은 겉으론 순수해 보이지만, 같은 반 아이를 대놓고 따돌리고, 옥상으로 불러 야구공으로 때리고, 야유한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호환 마마’나 ‘야동’이 아니라 ‘교복 입은 아이들’ 같다.
영화는 그런 아이들 뒤에 ‘어머니’의 부재나 지나친 애정이 ‘원인’이라고 얘기하는 듯하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똑같이 소중한 것을 빼앗는 복수로 벌주는 또 한 명의 어머니(담임교사)까지. 영화 속 어머니와 아이들은 일반적인 이미지가 아니다. 영화를 보면서 어쩌면 극단적인 이미지가 극명한 진실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못지않게 유치원부터 시작하는 입시경쟁이 치열한 나라 일본에서 어머니는 육아와 가사, 교육에 다재다능한 슈퍼맘으로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
임신과 육아로 꿈이 좌절되어 절망하는 어머니, 아들을 자신의 이미지 안에 가두고 자라는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 어머니는 다른 듯 같은 ‘어머니’이다. 거기다 육아와 일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하는 워킹 맘도 같은 ‘어머니(담임교사)’이다.
‘어머니’는 관계에서 주어진 역할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어머니’는 자녀와의 관계 이외에는 단절을 요구한다. 사회적 요구와 개인의 욕망 사이에서 어머니는 사회적 요구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아닐까 하는 ‘죄의식’과 이상적인 어머니로서 ‘의무감’에 버거워한다. 여기서 균형이 무너지면, 영화의 두 어머니처럼‘어머니’만 있거나 ‘개인’만 존재한다.
영화 속에‘어머니’들과 ‘아이’들이 모두 공감되었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이들만의 문제일까. <고백>에도 아버지가 등장한다. 살해당한 어린 딸의 아버지는 에이즈 환자로 자신의 부성애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떳떳하게 표현할 수 없었다. 사망선고까지 받은 아버지는 아이의 영정사진 앞에서 눈물만 흘리는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어머니의 부재로 처절하게 혼자 외로웠던 아이를 외면했던 아버지, 장기 해외 체류로 아예 집안에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 유전형질을 물려준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어머니와 아이들을 불행으로 몰아넣은 것은 사회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었을까. 상징적 아버지 ‘천황’이 살아있는 일본, 신자유주의 광풍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곳에서도 사회적 병리 현상은 뉴스 토픽으로 자주 등장한다. 그 연장선에서 이 영화를 보면, 어머니와 자녀 관계만의 문제로 인식되진 않는다. 더구나 영화의 이야기들은 우리나라에서도 벌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만 14세 미만의 아동이 형사사건을 일으킬 경우 형사처분을 받지 않는다. 보호 처분만 받는다. 피해자 어머니 담임교사는 이를 문제 삼으며, 참혹한 보복을 응징으로 정당화한다. 대구에서 중학생 자살사건이 발생한 후 아이들에게 대한 처벌론이 대두하였고, 피해자 측의 요구도 강력했다. 법의 기능 중 하나는 ‘예방’이라고 한다. 전례가 생기면 재발의 우려가 줄어들고, 아이들의 미래 인생을 두려워하는 부모들도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란 속셈일 것이다.
그러나 타인의 아픔에 무감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보다 동급생을 밟고 선두에 서는 경쟁논리를 먼저 배우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영어 단어와 수학 문제 하나를 더 풀어야 한다고 독촉하는 부모, 나아가 이렇게 부모를 조급하게 몰고 가는 사회구조를 탓하는 것은, 미성년이란 이유로 개인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무책임일까. ‘개인’의 가치가 존중받아 마땅한 곳에선 외면당하고, 사회가 책임져야 할 곳에선 ‘개인’의 가치를 내세우는 모습이 지금, 여기 우리 사회이다.
‘어머니’를 어머니의 정체성만으로 가두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공부하는‘학생’의 정체성으로 가두고, ‘노동자’를 고용주와 계약관계에서 일만 하는 ‘노동자’의 정체성으로 가두는 사회도 바람직하지 않다.
영화 <고백>은 ‘교실’이란 공간을 통해 이 시대와 여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백’했다. 그들의 음울한 독백을 통해서 관객으로서 인간을 여러 관계의 유형 속에서 자유로운 존재로 인정하는 사회, 사회적 요구와 개인 욕망의 편차가 좁은 사회, 유일한 정체성의 감옥에서 인간을 해방하는 사회를 꿈꿔 봤다. 설사 백일몽일지라도 꿈꿀 수 있는 자유마저 빼앗는다면, 경계를 넘어 상상할 수 있는 자유, 그마저 금지한다면, 여기는 지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