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의 중심지는 중구이다. 물론 중구라는 명칭을 쓰는 것은 서울을 본뜬 결과이다. 서울을 따라 했으면 종로구는 왜 없나 싶지만, 1963년 구(區) 제도가 도입될 때 중부와 종로 두 출장소가 중구로 통합되었고, 지금도 ‘종로’ 골목은 남아 있으니 종로구가 없다고 단정하여 말할 수도 없다.
동성로, 서문시장, 남문시장, 북성로 등의 이름에 성(城)이 들어 있는 것만 보아도 옛날 대구의 범위는 저절로 짐작된다. 일제 때까지만 해도 대구는 지금의 중구 일원이었다. 따라서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을 기념하는 국채보상공원, 1919년의 3.1운동을 기념하는 3.1운동로, 1960년의 2.28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2.28중앙공원 등이 중구에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대구에서 가장 먼저 생긴 십자로도 중구에 있다(1909년). 근대역사관과 중부경찰서 사이에 있는, 작은 교차로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장사를 돕기 위해 친일파 박중양이 만든 그런 것들을 찾아다닐 수는 없다.
중구 답사여행은 응당 걸어서 다녀야 한다. 출발점을 어디로 잡을 것인가? 달성공원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왜냐하면, 달성공원 자체가 중구의 끝 부분에 있고, 거기서 서쪽과 북쪽으로는 답사할 만한 역사유적이나 문화유산이 없기 때문이다. 달성공원을 둘러본 다음 시내 중심가 쪽으로 천천히, 줄곧 걸으면 저절로 역사유적과 문화유산 답사가 이루어진다.
공원 안의 달성(達城)은 옛날 토성 쌓기의 전범을 보여주는 국가사적이다. 공원 안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비인 상화시비도 있고, 관덕정에서 처형된 최제우 동학 교주(敎主)의 동상도 있다. 달성서씨유허비, 서침나무까지 둘러본 후 순종과 이등박문이 1909년 1월 12일 함께 방문하여 기념식수를 했다는 증언에 따라 ‘순종나무’로 추정되는 향나무도 볼 수 있다.
그렇게 두루 보았으면 이제 공원 정문을 벗어나야 한다. 여기서 ‘정문’을 언급하는 것은 달성공원 답사자들이 흔히 놓치는 곳 한 군데를 짚고 넘어가기 위해서이다. 앞에서도 답사여행은 박물관부터 보고 나서 구체적 현장을 찾아야 한다고 언급했지만, 그 원칙은 달성공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대구의 역사를 간명하게 정리해주는 향토역사관부터 보고 달성공원 안을 관람해야 마땅하다는 말이다. 향토역사관은 달성공원 정문 왼쪽의 관리사무소 건물 안에 있으므로 공원에 들어갈 때 아예 그리로 들어갔다가 나올 때에 정문을 이용하시라. 출입 모두를 정문만 이용하는 여정으로는 결코 가볼 수 없는 곳이 바로 ‘향토역사관’이기 때문이다.
향토역사관은 아득한 옛날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향토사(史)’를 간명하게 정리해서 보여준다. 국립대구박물관처럼 유물을 구비한 ‘박물관’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변동 선사유적전시관’처럼 교육용으로 꾸며진 공간도 아니지만, 향토의 역사를 간추려서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준다는 특별한 장점을 지니고 있다. 잠깐의 시간만 내면 ‘대구의 역사’를 일별(一瞥)할 수 있으니 정말 좋다. 달성공원에 온 이상 향토역사관부터 방문하는 것은 대구의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을 답사하려는 사람의 올바른 자세일 터, 더 이상 무엇을 또 말할 것인가.
이제 서문시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혹시 아침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간식이 그립거나, 어느새 점심을 해결해야 할 시각이 되었다면, 서문시장 안에서 간단한 요기를 하는 게 바람직하다. 서문시장 일대가 1900년대 초만 해도 늪지대였다는 사실, 대구에서 3.1만세 운동을 처음 펼쳤던 장소라는 사실 등을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특히 국수 등을 파는 노점 형태의 식당들이 줄을 지어 늘어선 정경은 백화점과 아웃렛 드나드는 데만 익숙해진 요즘 아이들에게 꼭 보여줄 만한 구경거리이다.
서문시장이 끝나는 지점에 가 있다. 아니, 서문시장과 계성학교는 담장 하나를 두고 붙어 있다. 심지어 어떤 건어물 가게는 계성학교 교정으로 드나드는 쪽문까지 보유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서문시장과 계성학교가 그만큼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대구 지역의 3.1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서울과 연락이 닿아 대구 지역의 3.1운동에서 큰 역할을 했던 계성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사람이 가장 많이 운집하는 때와 장소를 골라 서문시장의 장날, 즉 3월 8일에 만세 운동을 벌였다. 만세운동에 필요한 물품을 나르고, 사람들이 이동하고, 또 저절로 모여든 군중들에게 동참을 호소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가 바로 학교 근처에 있는(지금보다는 더 떨어져 있었지만) 서문시장이었던 까닭이다. 그 결과, 대구에서 3.1운동으로 실형을 받은 76명 중 44명이 계성학교의 전현직 교사나 학생이었다. 계성학교 교정에는 3.1운동 기념탑도 세워져 있다.
1908년에 지어진 계성학교 아담스관은 친일파 박중양이 1906∼1907년에 무지막지하게 부순 대구읍성의 성돌을 주워와 붉은벽돌과 함께 쌓아 지은 고풍스러운 건축물이다.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지어진 서양식 2층 교사(校舍)이기 때문에 당시에는 전라도에서까지 도시락을 싸들고서 ‘집 위에 또 집이 있다’면서 구경을 왔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는 군인들의 숙소로 징집되었고, 2군사령부도 이 학교 운동장에서 창설되었다. 이래저래 계성학교는 가볼 만한 답사지인 셈이다.
‘3.1운동로’는 서문시장, 계성학교에서 선교사 주택단지를 지나, 다시 상화고택 앞을 지나 대구에서 두 번째 만세운동이 벌어졌던 염매시장과 반월당 일대, 대구백화점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이 길은 대구시가 지정한 ‘아름다운 길’의 대표로 뽑혀 있다. 그것은 3.1운동로가 외형상의 아름다움도 충분히 간직하고 있을뿐더러,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대구시민들의 잠재의식 속에 진득하게 깃들어 있는 항쟁의 정신까지 뜨겁게 내포하고 있는 ‘역사’를 고려한 결과이다. 그렇게 생각한 탓인지, 새로 건축된 어마어마한 제일교회의 100주년 기념관 옆 계단길을 걸으면, 땅속에서 울려 나오는 만세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사실 ‘3.1운동로’를 답사하면서 아름다운 선교사 주택들을 보면, 이 길은 꼭 3.1운동로가 아닐지라도 멋진 길에는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붉은 벽돌집들과 품위 있게 어우러지는 세월의 고목들, 잘 가꾸어진 잔디밭, 배경을 이루고 있는 제일교회의 웅자(雄姿)……. 게다가 화창한 날이면, 지대가 이 일대에서 제일 높은 동산(東山)인 덕분에 시야를 방해받는 것 없이 즐길 수 있는 푸른 하늘……. 그 중에서도 블레어 선교사 주택은 ‘대구3.1운동역사관’으로 꾸며져 있어 반드시 들어가 보아야 하는 필수 여정이므로 결코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3.1운동로를 따라 선교사 주택들을 감상하며 걷다보면 문득 저 아래로 시가지가 보인다. 이제 3.1운동의 중요 현장인 계단길을 내려간다. 아까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이던 계산성당(사적 290호)이 어느샌가 눈앞에 있다. 성당 옆 좁은 골목이 우리가 오늘 꼭 들러야 하는 상화고택 길이다. 상화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이 집은 작은 기념관으로 변신하여 방문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가 하면, 상화고택 바로 앞집은 국채보상운동의 주역 서상돈 선생의 집이다.
상화고택에서 왼쪽으로 기와집들 사이를 들어서면 곧장 약령시(藥令市)가 이어진다. 관청(경상감영)의 명령(令)에 따라 경상감영 앞마당에 생겨난 약(藥) 매매 시(市)장이기 때문에 본래 명칭은 ‘약령시’이지만, 약(藥)가게[廛]가 많다고 하여 흔히 ‘약전(藥廛)골목’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 골목은 국내 최대의 한약 거리이자 최고(最古)의 약령시이고, 세계 각국의 한약상들이 몰려드는 국제적 명소이니 꼭 거닐어 보아야 한다.
조금 전에 본 선교사 주택들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한약 향기가 훨훨 공중을 날고 있는 이 약전골목을 거니노라면 공해와 번잡에 찌든 현대인의 일상은 문득 사라지고 무병장수의 세계를 노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게다가 이곳에는 국내 유일의, 그것도 최첨단의 현대식 체험 프로그램으로 방문객을 만족시켜 주는 한의약문화관까지 건립되어 있어서, 길을 걸으면 금상첨화라는 옛날 사자성어가 정말 실감나게 느껴진다.
약전골목 안에는 눈길을 주고 지나가야 할 옛 건물들도 있다. 한의약문화관 입구에 서서 고색창연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제일교회 구관(1933년 건축)과, 그 맞은편의 교남YMCA(대구YMCA의 전신) 옛 본관 건물이 바로 그것이다. 모두 3.1운동을 비롯 일제 시대 내내 대구에 큰 영향을 끼친 소중한 장소들이다.
제일교회 첨탑을 쳐다보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면 약전골목의 오른쪽 하늘은 동아쇼핑과 현대백화점 건물로 꽉 막혀 있다. 그 하늘 아래가 바로 대구에서 2차 3.1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남문외시장의 일부인 염매시장이다. 그러나 지금은 현대화의 파도에 밀려 쇠락을 거듭하고 있고, 시장통 안은 어둡고 반쯤 닫힌 가게들로 을씨년스러울 지경이다.
동아쇼핑 앞의 대도로를 건너면, 적십자병원 건물 뒤의 ‘아미산’ 관덕정 터에 닿는다. 동학 교주 최제우가 처형을 당한 곳이다. 사람들은 흔히 관덕정 터에 세워져 있는, 지붕이 정자처럼 생긴 천주교 순교기념관을 관덕정으로 잘못 알고 있지만, 이곳은 민족종교를 내세워 외세에 치열하게 저항했던 동학의 상처가 고스란히 깃든 장소이므로 꼭 가볼 답사지임에 틀림이 없다. 최제우가 처형당한 장소는 이곳뿐 아닌가.
이제 경북대학교 사대부고로 가야 한다. 등록문화재 5호인 그 학교의 옛 건물과, 건물 뒤편에 있는 ‘대구사범학교 항일학생의거 순절동지추모비’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대구사범학교(경북대학교 사범대학의 전신)는 1929년 6월 1일 개교하였다. 그 이듬해인 1930년 1월 26일, 이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항일정신 고취를 위한 목적으로 ‘연구회’를 결성한다. 그러나 활동을 파악한 일제는 37명을 구속한다.
그 이후에도 학생들은 은밀히 활동을 계속한다. 대표적인 것이 ‘왜관 사건’이다. 1939년 7월 21일부터 시작된 여름방학을 맞아 경북 왜관의 철도 공사에 강제 동원된 학생들은 밤에 일본인 교사를 집단폭행한다. 이 사건으로 7명이 퇴학당하고, 11명이 정학당한다.
그러나 학생들의 항일 의지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 이어져 그 이듬해인 1940년 11월 23일에 ‘문예부’, 1941년 1월 13일에 ‘사회과학 연구반’을 결성한다. 이 두 조직은 1941년 2월 15일 ‘영웅은 다색(茶色=갈색)을 좋아한다’는 뜻을 지닌 다혁당(多革黨)으로 통합된다. 회지의 이름은 ‘반딧불’이었다.
일제 경찰은 1941년 여름 다혁당 활동을 하던 교사, 학생, 학부형 등 300여 명을 검거했고, 그 이후 2년 동안이나 미결 기간을 끈 끝에 1943년에야 징역 2년 6개월에서 7년형을 선고했다. 그동안 일제는 악랄하기 이를 데 없는 고문을 가했다. 결국, 강두안, 장세파, 박제민, 박찬웅, 서진구 등 5명의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옥사(獄死)하였고, 그 외에도 12명이 석방 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제 중구에서 남은 답사지는 국채보상공원, 그리고 경상감영공원의 근대역사관이다. 국채보상공원은 그 자체가 유적은 아니지만, 자녀와 함께 꼭 방문할 곳을 거느리고 있으니, 바로 국채보상운동 기념관이다. 운동과 관련된 전시물도 갖춰져 있고, 탁본 체험 등 직접 참가하는 교육과정도 준비되어 있어 가볼 가치가 충분하다. 2011년 10월 5일에 개관했다.
기념관 답사는 들어가자마자 나타나는 영상실부터 시작해야 한다. 4분 정도로 요약된 영상물을 보고 나면 당시의 시대 상황, 국채보상운동의 전말 등에 대한 개략적 이해를 얻을 수 있어 기념관 답사의 효율성을 최대로 높일 수 있다. 특히 국채보상운동에 앉은뱅이 걸인들이 참여한 사실, 신분의 차별을 뛰어넘은 기생들의 적극적 동참, 도적떼들까지 뜻을 모은 지난날의 기록들을 보노라면 문득 숙연한 마음마저 일어난다.
대구근대역사관도 2011년에 문을 연 새 답사지이다. 경상감영공원 안에 있으니 감영 청사(관청廳집舍)였던 선화당(宣化堂, 유형문화재 1호, 1807년 중건)과 감사의 처소였던 징청각(澄淸閣, 유형문화재 2호)을 둘러보고 역사관으로 입장하면 되겠다. 역사관이 리플릿을 통해 ‘근대 역사의 중심에 대구가 있습니다. 국난의 위기 때마다 자발적인 구국의 정신을 꽃 피우며 국채보상운동, 2.28학생운동을 주도한 대구의 정신이 곧 <근대 대구 역사>입니다.’하고 자기소개를 하고 있다시피, 근대의 태동(전통도시 대구의 해체와 재구성, 경삼감영의 변화 등), 구국의 정신(국채보상운동 발상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6.25전쟁과 대구, 2.28민주운동), 근대의 문화, 교육도시 대구, 근대화의 산실(근대 산업도시 대구, 근대 상업도시 대구, 삼성- 대구에서 성장하다, 박정희와 대구) 등으로 나뉘어 있는 전시실을 한 바퀴 둘러보면 ‘대구의 근대사’를 간략하게 확인할 수 있다. 아무쪼록 대구 전체의 역사는 대구박물관에서 찾을 일이고, 대구의 근대사는 근대역사관에서 구할 일이니, 이곳은 꼭 들러야 한다. 물론 이곳은 오늘이 아니라 이미 예전에 방문했어야 마땅한 곳이지만.
* 더 알아보기 / 풍수지리, 개신교, 천주교 유적
자라바위 : 봉산문화거리와 대구향교 사이에 높은 언덕이 있다. 제일중학교가 있는 중구 봉산동의 이 고지대는 자라바위가 있다고 해서 예로부터 연귀산(連龜山)이라 불려 왔다. 일제 때에는 정오를 알리는 오포(午砲)를 부는 산이라 하여 오포산(午砲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연귀산은 대구의 범위가 좁았던 옛날에는 대구 전체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연귀산은 대구부(경상감영) 남쪽 3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돌거북[龜]을 만들어 머리를 남쪽, 꼬리를 북쪽으로 묻어 지맥이 이어지게[連] 했다는 뜻에서 연귀(連龜)산이라 불렀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자라바위에는 귀수(龜首)와 귀갑(龜甲)이 새겨져 있다. 본래 자라처럼 생긴 천연의 돌에 사람들이 좀 더 모양을 낸 것으로, 이와 관련해서도 전설이 전한다. 이 일대에 화재가 자주 났는데, 고심하던 고을 수령이 물을 상징하는 자라바위를 가져다 놓았더니 그 뒤로는 불이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 북구 산격동의 연암공원에 있는 귀암서원도 그 이전에는 이곳에 있었다. 이는 이름 속에 들어 있는 귀암(龜岩) 두 글자만 보아도 바로 짐작이 된다.
1665년(현종 6)에 연귀산 위에 귀암서원이 세워졌고, 1675년(숙종 1)부터는 숭현사(崇賢祠/문화재자료 2호)에 서침(徐沈) 선생을 모시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그 후 동산동으로 옮겼다가 1995년 연암공원에 웅장하게 중건(重建)되었다.
제일교회 : 제일교회는 1897년에 창립되었는데, 이듬해인 1898년 기와집 4동을 사들여 교회당으로 썼다. 그 후 1908년 전통적 양식과 서구의 건축양식을 혼합한 140여 평 규모의 새 예배당을 지었다. 하지만 나날이 늘어나는 교인 수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1933년 다시 새 건물을 지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평 448평의 현대식 건물이었다. 그리고 1937년에 이주열(李主悅)의 봉헌으로 종탑을 증축하였다. 2층으로 지어진 서양식 교회 건물로는 한강 이남 최초의 건물이었다.
한식 기와집이던 계산성당이 1900년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된 바 있는 것처럼, 제일교회도 원인 모를 화재로 내부가 전소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1995년 4월의 일이다. 그리하여 대구 3.1운동의 중심이었던 제일교회는 브루엔 선교사의 부인 머르타 브루엔이 세운 신명여자소학교(지금의 신명고, 성명여중)와 선교사 주택들 사이로 옮겨가 거대한 새 예배당을 지었다. 약전골목 가운데에 있는 본 예배당(유형문화재 30호)은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성모당 : 대구시 중구 남산동 225-1번지에 가면 성모당(聖母堂)이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는 아주 유명한 곳이다. 이 성모당은 프랑스 루르드 시의 마사비엘에 있는 ‘성모 동굴’을 본떠 지어져, 크기는 물론 바위의 세부적인 형상까지도 그와 똑같다. 건물 상단의 ‘1911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 1918’은 대략 ‘1911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바친 서원에서 1918’의 의미로, 성모당이 세워진 내력과 관련되는 내용이다.
1911년 천주교 대구대교구 초대 교구장이던 드망즈 대주교는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주교관과 신학교 건축 및 주교좌 성당의 증축 등을 다 이루게 된다면, 교구의 가장 아름다운 곳을 성모께 바치고 그곳에 루르드의 성모동굴을 본뜬 성모당을 지어 모든 사람이 순례하도록 하겠다”고 서원(誓願)한다. 이 소원은 다 이루어졌고, 마침내 성모당이 1918년 10월에 세워졌다.
그런데 대구교구청, 성모당, 유스티노 신학교, 사르뜨르 성바오로 수녀원이 지어진 데에는 국채보상운동의 주역 서상돈 선생이 큰 역할을 했다. 대구교구 초대 신도회장이었던 그는 수만 평의 땅을 교구 사업을 위해 기부함으로써 천주교 건물들이 건축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이들 건물 중 그 어느 것 하나의 완성도 보지 못한 채 1913년 타계하고 말았다. 계산성당(사적 290호), 성모당(유형문화재 29호), 사르뜨르 성바오로 수녀원(문화재자료 24호), 성유스티노 신학교(문화재자료 3호), 그리고 신학교 바로 앞에 본인이 직접 심은 히말라야시다…… 에 깃든 서상돈 선생의 마음을, 국민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