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작년 12월 뇌출혈로 병원에 한 달이 조금 넘게 입원했던 적이 있다. ‘병원’ 하면 의사가 생각나지만, 당시 힘든 병원 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많이 마주쳤던 사람은 의사가 아니었다. 담당 주치의는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단 2번밖에 볼 수 없었다. 오히려 가장 자주 보며 대화상대가 되어 주고, 또 회복하는 데에 요령을 알려주거나, 힘들 때에는 격려도 해주곤 했던 사람은 바로 간병인, 식당노동자, 청소노동자 등 병원의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이처럼 병원의 비정규직노동자들이 하는 역할이 지대함에도 비정규직노동자는 항상 고용불안에 놓여있다. 2010년 11월 개원한 칠곡경대병원은 2012년 12월 계약기간이 만료되는 비정규직 노동자 6명, 올해 2월에 2명 총 8명을 해고했다. 병원은 빈자리에 다시 6개월 계약직 노동자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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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경대병원 해고자 강정희 씨(왼쪽)와 배기숙 씨(오른쪽) | | |
칠곡경대병원의 해고자 강정희 씨는 간호조무사로 내시경을 소독하는 일을 했다. 병원 개원 때부터 해고될 때까지, 강 씨는 “내가 잘못하면 병원이 잘못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다.
해고 후 해고자들이 병원장, 사무국장과 면담을 했을 때, 그들은 “총정원제 때문에 20%는 해고해야 한다. 재수 없었다고 생각해라”고 했다. 강 씨는 “총정원제 때문이라는 것은 거짓말이다. 무기계약직에는 정해진 정원이 없다. 병원 재량껏 쓸 수 있다”며 “실제로 병원은 인원감축을 통한 재정 절약을 위해 자르기 쉬운 비정규직을 자른 것”이라고 말했다.
억울했다. 자기 일처럼 열심히 했던 해고자들은 그래서 지난 1월부터 지금까지 병원과 지난한 싸움을 이어오고 있다. 병원과 싸운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환자의 건강에 신경이 곤두선 보호자들도 있으며, 병원의 직군 사이에서 위계도 뚜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외로 병원의 환자들이나 보호자들은 호응이 많다고 한다. 강 씨는 “그분들도 비정규직 문제가 그분들 자신, 혹은 자식들이 부딪힐 문제라 그런지 호응이 많다”며 “환자들도 자기가 몸이 아파서 온 거지만 병원 인력의 문제는 건강권과도 관련 있어 선전에 큰 어려움이 없다”고 말했다.
또한, 강 씨는 근무할 때는 “유령처럼 일했다”면서도 지금은 정당하게 복직을 요구한다고 했다. 강 씨는 “정당한 요구니까, 의사가 오든 간호사가 오든 상관없다. 병원이 잘못해서 나를 투쟁하게 했는데 내가 왜 위축되어야 하나”고 말했다.
힘든 것은 무엇보다도 스스로와의 싸움
병원은 해고자의 심적 갈등 집요하게 자극해
힘든 것은 타인의 시선이 아니었다. 강 씨는 200일이 넘는 투쟁을 하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바로 자신과의 싸움이었다고 한다.
“나를 이기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지금도 그래요. 선전하러 집에서 병원으로 올 때도, 여기서 일과를 마치고 집에 갈 때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문득 들어요. 그런 자신을 이기고 계속 투쟁하는 게 어려워요. 그만두고 싶은, 편하고 싶은 생각을 하는 나를 만날 때 가장 외로움을 느껴요. 투쟁은 갈등의 연속이에요.”
병원은 이들의 힘든 점을 잘 알고 이용하는 모양새였다. 지난 3월 새 병원장으로 박재용 교수가 선임되고, 병원은 해고자들과 대화를 시도하며 해고자들 복직 말고 신규입사 방식으로 다시 고용하겠다고 제안했다. 해고자들은 다시 일하고 싶은 마음에 병원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막상 결정하고 나니 병원은 입장을 바꿔 제안을 철회했다.
어려운 결정을 했음에도 뒤바뀐 병원의 입장에 해고자들은 힘에 부쳤다. 강 씨는 “여기 아니면 병원 없나. 이 일 아니면 할 일 없나. 월급 몇 푼 받았다고. 다른 일 찾아보는 게 좋지 않겠냐”는 생각도 수도 없이 했다. 하지만 해고자들을 지탱해 온 것은 억울함이었다.
“복직되든 안 되든 끝장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무너진 억장을 치유할 길은 복직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내가 일을 못 해서 해고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겁니다. 사람이 억울하게는 안 만들어야죠. 병원이 진심으로 사과만 했어도 지금까지 투쟁을 안 했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근무성적이 좋지 않아 잘렸다며 적반하장으로 나오니 억장이 무너지죠.”
연대의 힘으로 지속할 수 있었던 투쟁
꾸준한 투쟁은 또 다른 해고 투쟁을 지탱해
해고자들이 투쟁을 지속하는 데에 큰 힘이 됐던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올해 4월 19일에 열렸던 100일 투쟁문화제다. 또 경북대·대구대 등 대구지역의 대학생들이 같은 달 26일 주최했던 ‘OCCUPY 칠곡경대병원'도 힘이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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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6일 진행한 OCCUPY 칠곡경대병원 | | |
“100일 문화제가 제가 처음 겪은 문화제였어요. 그때는 얼마나 큰 규모인지 몰랐는데 얼마 전 울산의 2차 희망버스에 가보니, ‘아 우리 문화제가 대단한 거였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새삼, 우리가 대단한 투쟁을 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놀랐어요. 학생들의 OCCUPY 문화제도 그렇고 문화제를 하면 건설노조에서도 많이 오시고 울산에서도 또 오셔서 1,000명이 넘게 모였는데, 지금도 문화제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에요.”
문화제 외에도 강 씨는 투쟁 하며 보람도 느꼈다. 특히 강 씨는 칠곡경대병원의 투쟁을 보고 힘을 얻어 싸운 사람들이 투쟁에 승리할 때 큰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강 씨는 “실제로 서울대 병원의 경우 임시직 간호사를 해고한 적이 있는데, 칠곡경대병원 사례에 힘을 얻어 투쟁해 다시 복직했다”고 말했다. 강 씨는 “그래도 가장 큰 보람은 우리가 복직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투쟁 후 설을 지내고 다시 추석을 맞은 강 씨는, 투쟁하며 아쉬운 것은 가정에 많이 소홀해진 점이라고 한다.
“가족들도, 친척들도 별말 안 해요. 반대 안 하는 게 지지하는 거죠. 가족들이 기다려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을 받아요. 투쟁하느라 집에도 소홀해져 많이 미안함을 느껴요. 옛날 하던 일 삼 분의 일도 못 하고 있으니···아이들도 챙겨주고 싶은데, 매일 에너지가 다 소진되어 집에 들어가니 못 챙겨줘 매일 마음이 아픕니다.”
지금도 여전히 복직을 위한 싸움을 하는 해고자들은 병원에서 선전하랴, 부족한 자금 마련하기 위해 물품배달 하랴 쉴 새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오늘 흘린 땀방울이 기쁨에 찬 복직의 눈물이 될 때까지, 해고자들은 힘겹지만 차분한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