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800만 명 이상이 본 영화의 감상에 하나 더 보태는 행위는 디지털 쓰레기만 추가하는 게 아닐까, 몇 며칠 고민했다. 이미지로 구성된 영화의 특성이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거라면, 수많은 차이의 스펙트럼을 이루는 요소로 자리매김하길 바라며 어설픈 글일망정 던져 본다.
기대가 컸고 기다림에 지쳤던 것일까. <설국열차> 탑승을 마치고 나오는 길은 소나기의 젖은 흔적과 무겁게 짓누르는 습한 공기가 피부에 들러붙어 불쾌했다. 긴 열차 여행의 목적지에 도착했으나 피로가 누적되어 여행의 끝이 유쾌하지 않은 그런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설국열차>의 액션장면과 문장의 마침표를 찍은 듯한 결말은 복잡한 여운을 남겼던 감독의 특징이 ‘균열’을 느낄 수 없는 할리우드식 마무리로 변질(?)한 것 같아서 못내 아쉬웠다. 그럼에도 비교적 보이는 코드가 선명한 <설국열차>는 관객에게 다양한 독해가 가능한 열린 텍스트로서 기능한다.
2014년에 인간이 자초한 빙하기에 생존한 사람들을 태운 열차는 영원불멸의 엔진을 장착하고 쉼 없이 18년째 지구를 회전한다. 인간 생존의 조건으로 부적합한 열차의 끄트머리, 열차가 완성된 후 ‘필요’에 의해 덧붙여진 꼬리칸에서 혁명이 발생하고, 그들은 열차 동력의 중심부 엔진이 있는 맨 앞칸을 목표로 질주한다.
영화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지만, 내게 열차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혔다. ‘기차와 시계’가 대표하는 근대적 세계관과 자본주의의 역사가 당도한 현재의 신자유주의 사회 같았다. 꼬리칸 사람들이 앞칸에서 파견된 군인들에 의해 ‘가진 것’을 전부 빼앗겼다던 커티스의 회고는 자본의 본원적 축적을 떠오르게 했다. ‘엔클로저 운동’은 땅에서 쫓겨난 농민이 임금 노동으로 생존할 수밖에 없는 자본과 노동의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는 기원이었다. 굶주림에 서로 살육하고 약한 어린이와 여성을 희생해서 배고픔을 해결했던 과거는 자본주의 초기 어린이와 여성의 노동으로 절대적 잉여가치를 축적하던 모습과 겹쳐졌고,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의 대립과 갈등, 그 결과로 남성과 여성의 성별 분업이 이뤄지는 과정을 보는 듯했다.
앞칸의 두 번째 권력자 메이슨 총리가 태어날 때부터 차별은 정해졌으니 ‘각자의 자리를 지켜라’던 연설은 숱하게 들어온 사회 지도자의 그것과 닮았다. 학생은 학생답게 공부해라, 노동자는 노동자답게 일해라, 주부는 주부답게 가사 일에 충실하라,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온 ‘위계와 질서'의 이데올로기였다. 다소 우스꽝스러운 메이슨은 부유층의 절세를 위해 ‘인두세를 부과하자’고 주장했던 신자유주의의 선봉장 대처 총리를 생각나게 했다.
윌포드는 꼬리칸의 살육을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으로 묘사하는 홉스의 세계관을 주창한다. 강자는 약자를 지배하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로 지배를 정당화한다. 약육강식과 생존투쟁을 위한 경쟁 역시 우리 사회의 지배적 논리이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경쟁 논리는 더욱 강화되었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게다가 ‘영원한 체제’의 안정을 자랑하던 윌포드의 기차는 마모된 부속품을 작은 키의 어린이가 대신한다. 마치 제3세계 어린이와 여성의 노동을 착취해서 얻은 잉여가치로 굴러가는 신자유주의 열차를 방불케 한다. ‘윌 포드’란 이름에서 ‘W'가 금융자본의 도시 뉴욕 월스트리트와 대량생산체제를 낳은 포드가 연상되는 것은 진부한 상징이다.
예카테리나 다리를 지날 때 죽고 죽이는 장면은 끔찍했다. 무산자에 의한 계급 없는 사회를 꿈꾸며 행했던 러시아 혁명은 그 과정에서 홀로코스트처럼 많은 목숨을 잃었다. 물론 모든 폭력이 부당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방식은 그들이 반대했던 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변혁의 대상으로 세계를 ‘대상화’했던 혁명의 근대성을 돌아보게 했던 장면이었다.
메이슨과 윌포드가 반복해서 강조했던 열차의 구조는 ‘폐쇄된 생태계’였다. 그것을 유지하려고 나중에 덧붙여진 꼬리칸은 실패한 혁명으로 인구 조절과 체제 안정에 이바지했으니, 메이슨이나 윌포드의 말처럼 무위도식하지만 않았다. 꼬리칸의 ‘필요성’은 단순히 앞칸에 필요한 노동력 제공만은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체제 유지는 학교 교육이 만든다는 잘 알려진 사실을 학교 칸에서 ‘7인의 탈주자’를 수단으로 체제 밖의 공포를 선전하는 장면도 ‘폐쇄된 생태계’를 존속하려는 지배의 욕망을 볼 수 있었다.
꼬리칸의 성자 길리엄과 윌포드의 내통은 극과 극은 통한다는 단순논리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진보 정당이 제도권 정치에 참가할 때 갖는 한계로 보였다. 자본주의 체제가 자본의 외부까지 자본화하는 특징처럼 말이다. 커티스가 맨 앞칸에서 느낀 혼란은 사람만 바뀌고 ‘폐쇄된 생태계’가 유지되는 구조라면 크게 달라질 것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그는 자신의 손을 희생하면서 티미를 꺼내 앞칸까지 달려왔던 혁명의 지도자로서 길리엄과 다른 면모를 보여줬다.
세상의 중심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주변이 중심이 되고 중심이 주변이 되면서 세상은 변한다. 지금까지 백인과 남성이 중심이었다면, 그로부터 배제되었던 유색인종과 여성은 새로운 세상의 중심으로 설 가능성이다. 그래서 감독은 흑인 어린이 티미와 요나를 살려두었던지 모른다.
<설국열차>는 열차를 멈추거나 앞칸의 지도자를 바꾸는 방식이 아니라 열차 밖으로 나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임을 이야기한다. ‘돈’으로 경계 지워진 ‘폐쇄된 신자유주의의 생태계’를 벗어나는 방법을,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사고의 전환을 시도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각자의 자리를 지켜라’는 질서의 이데올로기는 질서의 반대말이 ‘무질서와 혼란’이란 지배 권력의 관점이 아니라 질서의 반대는 ‘자유’라는 권력과 대척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