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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관리툴 2013년08월17일 03시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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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날] 정만진의 대구여행 (28) 구지 일대
홍의장군 곽재우 묘소와 김굉필의 도동서원이 있는 곳

정만진(소설가) daeguedu@daum.net

달성군 구지면 일원으로 떠나는 답사여행은 동구 일원을 두고 여정을 짤 때와 흡사한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동구 일원을 둘러볼 때 팔공산을 별도의 독립된 답사지로 제외했듯이 구지면 때에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비슬산, 그렇다. 비슬산 답사는 구지면 일원을 둘러보는 여정에서 제외하여 독립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루 만에 둘러보는 일이 불가능하다.

비슬산은 유가사나 소재사에서 대견사지로 올라가는 남쪽과, 용연사 석조계단을 볼 수 있는 서쪽 산기슭 사이가 너무 멀어서 단숨에 둘러볼 수가 없다. 용연사는 비슬산 답사에서 분리하여 현풍과 구지를 살피는 여정에 넣는 게 좋다는 말이다. 용연사→논공 천왕당→구지→홍의장군 묘소→현풍향교와 석빙고, 이렇게 다니면 시간과 내용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멋진 답사 여정이 되기 때문이다.

첫 방문지인 용연사에서 특별히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문화유산은 1673년(현종 14)에 건조된 석조계단이다. ‘석조’라면 돌로 만들었다는 뜻이고, 뒤에 ‘계단’이 붙었으니 그렇다면 석조계단은 돌로 만든 계단인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돌계단이기에 나라의 보물 539호로까지 지정되었단 말인가?

하지만 아니다. 용연사의 계단은 층계를 뜻하는 용어가 아니다. 계단(階段)이 아니라 계단(戒壇)이다. 계단은 불교에서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지킬戒규칙律) 의식을 시행하는 높은 곳[壇]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통도사에 최초로 설치되었다.
 
불상 없는 법당에서 통유리를 보며 합장

▲용연사 석조계단
 

용연사 석조계단은 일주문 왼쪽의 적멸보궁 뒤편에 있다. 석가를 화장했을 때 나온 몸에서 사리(구슬)를 모신 적멸보궁이니 법당 안에 불상은 없다. 그렇다면 합장은 어떻게 하나?

적멸보궁 안을 보면, 보통의 금당이면 불상이 있을 자리 뒤의 벽을 없앤 대신 통유리를 달아 그리로 계단이 잘 보이도록 해놓았다. 신도들은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석조계단 우측의 석가모니 사리탑을 향해 소원을 빈다. 이 희귀한 정경을 보는 것이 용연사를 찾아오는 최고의 덕목이다. 극락전(유형문화재 41호)만 보고 돌아서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극락전 앞 삼층석탑(문화재자료 28호)과 적멸보궁 사이를 오갈 때 유심히 보면, 비슬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를 안내하는 아주 작은 안내판이 하나 보일 듯 말 듯 서 있다. 용연사에서 내려와 반송초등학교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조금 가다가 왼편의 김흥리로 들어가면 거기서도 비슬산으로 갈 수 있다. 그 길은 임도인데, 초곡산성 왼쪽 옆구리를 거쳐 유가만세교까지 이어진다.

▲논공 천왕당
김흥마을을 왼쪽에 두고, 즉 비슬산을 왼쪽에 끼고 논공으로 가는 고개를 넘는다. 논공읍 북리 462번지에 있는 천왕당을 찾아가는 길이다. 천왕당은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고 주민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당(제사祭집堂)이다. 대구 경북에서는 천왕당을 흔히 서낭당이라 불러왔다. 서낭당의 한자식 표현은 성황당(城隍堂)으로, 정비석이 같은 제목의 소설을 발표한 이래 더 많이 알려졌다.

논공천왕당은 논공가톨릭병원 맞은편의 불쑥 솟은 봉우리 꼭대기에 있다. 논공 읍내가 초행길인 답사객은, 천왕당이 길에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찾느라 헤맬 공산이 크다. 언뜻 생각하면 민속문화재인 만큼 논공천왕당이 제법 그럴듯한 옛날 종교시설이 아닐까 싶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아주 작다. 산봉우리 위로 올라가 보면 어른의 어깨 밑으로 오는 아주 작고 앙증맞은 집 하나가 고목 아래에 놓여 있는데, 그것이 바로 논공천왕당이다. 1853년에 처음 지어졌고, 지금 자리에 옮겨져 새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1924년이다.  
  
용연사와 논공천왕당을 둘러보면서 몸을 풀었다면, 이제부터가 오늘 여정의 본격적인 답사지를 찾아가는 길이다.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엄청난 이름을 가진 도동서원으로 향하고, 홍의장군 곽재우 의병장의 묘소를 참배하러 가는 길이니 어찌 대단하지 아니한가.

▲도동서원 담장

도동서원은 전체가 사적 488호이고, 강당, 사당(제사祠집堂), 담장은 보물 350호이다. 김굉필 선생을 모시는 이 도동서원은 낙동강 바로옆 천혜의 굽이 안에 너무나 조용히 앉아 있다. 그 까닭에, 답사객들은 무오사화(1498년)와 갑자사화(1504년)의 참혹을 깜빡 잊기 일쑤이다. 흔히들 서원 앞 커다란 은행나무를 보며 “이 나무 이름이 ‘김굉필 나무’야. 심은 지 400년도 더 되었어! 노랗게 단풍이 물드는 가을에 보면 정말 멋있을 거야!”하고 감탄사를 연발하는 데 그친다는 말이다.

▲김굉필 나무

1498년, 왕위에 오른 지 4년째인 연산군은 김종직에게 부관참시(뜯을剖관棺벨斬시체屍)의 형벌을 내린다. 부관참시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무덤에서 꺼내어 목을 베는 일이다. 그리고 김일손 등을 죽이고 많은 선비를 귀양 보냈다. 이를 무오사화(士禍)라 한다. 김종직이 죽기 이전인 1475년에 수양대군이 임금자리에 오른 일을 에둘러 비판하여 쓴 ‘조의제문’이란 글이 성종실록에 실리자, 계유정난(수양대군이 1453년 김종서 등을 죽이고 권력을 잡은 일) 때 공을 세워 높은 벼슬을 차지한 자들이 이를 문제 삼아 자신들과 반대편인 선비들을 죽이고 유배 보낸 사건이다. 이때 김종직의 제자인 김굉필도 귀양을 갔다.

1504년, 임금 자리에 앉은 지 10년째인 연산군은 다시 사화를 일으킨다. 이를 갑자사화라 한다. 자신의 어머니인 윤씨가 1479년(성종 10)에 왕비 자리에서 쫓겨나 그 이듬해에 죽임을 당한 일을 두고 연산군이 보복하면서 발생한 사화였다. 이번에도 사림파들이 대거 피해를 보았다. 김굉필은 이때 사형을 당한다. (* 사화 : 선비士들이 화禍를 당했다는 뜻에서 사화士禍라 하기도 하고, 역사史인 성종실록과 관계되어 빚어진 화禍라는 의미에서 사화史禍라 부르기도 한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때 화를 입은 선비들을 흔히 사림파라 하고, 수양대군 편을 들어 권력을 휘둘러 온 이들을 훈구파라 한다.)

▲도동서원 전경

김굉필 선생의 묘소가 도동서원 뒤편 산자락에 있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묘소조차도 관광지로만 인식하는 무례한(놈漢)이 있어 함부로 발걸음을 옮겨대면 난감한 일인 까닭이다. 그런 이에게는 재빨리 친절을 베풀어, 서원 왼쪽의 다람재에 오르면 보기 드문 절경을 볼 수 있다고 안내해야 한다. 실제로 다람재에 올라 낙동강과 첩첩산중에 에워싸인 도동서원 전경을 바라보는 일은 ‘눈을 즐겁게 한다’는 말의 유래가 헤아려질 만큼 유쾌한 경험이니, 그렇게 유혹(?)을 해도 전혀 결례가 아니다.  
  
도동서원에서 구지면 소재지로 나오면 길은 좌우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으로 가면 현풍곽씨12정려각을 거쳐 현풍읍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홍의장군 묘소에 닿는다.

그런데 문제는 묘역 안으로 들어온 이후부터이다. 장군의 묘소를 찾는 일이 그리 만만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사전지식이 없으면 정말 그렇다. 여기서 말하는 사전지식이란 임란 당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장군이 홍의장군 곽재우라는 사실이나, 그의 이름이 한자로 ‘郭再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을 알아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왜란 때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장군은 자신의 무덤에 봉분(흙쌓을封무덤墳)을 하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왜군들이 왕릉을 파헤쳤는데 신하된 자의 묘를 어찌 번듯하게 꾸밀 수 있겠느냐는 것이 장군의 마음이었다. 그 때문에 ‘아무려면 홍의장군인데 묘소가 제일 그럴 듯할 거야’ 식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곽씨 문중의 묘역 안에 들어가서도 장군의 무덤을 찾지 못한다. 가장 낮은, 제일 볼품 없는 무덤이 바로 장군의 것이라는 사실을 그가 어찌 짐작할 수 있겠나.

뿐만 아니라, 묘비 중에서 ‘재우’ 또는 ‘再祐'’ 두 글자를 찾는 사람도 낭패를 면할 수 없다. 그런 글자가 새겨져 있는 묘비는 없다. 장군의 시호(내릴諡이름號)가 ‘忠翼’(충익)인 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묘소를 찾아내기 어렵다는 말이다.
  
홍의장군 묘소를 참배한 뒤 현풍 읍내로 들어간다. 보물인 석빙고도 보아야 하고, 읍내 진입 거의 직전에 있는 ‘현풍곽씨12정려각’(문화재자료 29호)도 놓칠 수 없다.

▲현풍곽씨 12정려각

구지면 소재지를 왼편에 두고 현풍으로 오다 보면, 고속도로 진입로로 들어가는 표식이 보이는 즈음의 왼쪽에 제법 그럴듯한 건축물 하나가 나타난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와가인데 가로로만 길쭉할 뿐 그 외의 장식은 전혀 없다. 정말 특이하다. 12개나 되는 정려를 한곳에 모아서 넣으려니 건물이 그렇게 길게 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이 건물이 바로 현풍곽씨 문중이 자랑하는 12정려각이다. 한 성씨의 집성촌에서 이토록 많은 정려(깃발旌문閭= 紅門홍문, 왕이 충신, 효자 등을 기려 세운 붉은 문)가 탄생한 것은 전국적으로도 드문 예라고 한다. 12정려각 뜰안으로 들어서니 오른쪽에서 네 번째 칸에 ‘四孝子閭’라 쓰여 있어 사효굴의 주인공인 네 아들을 섬기는 줄 알겠다.

현풍 읍내에 있는 볼거리로는 현풍향교 대성전(문화재자료 27호)과 석빙고(보물 673호)가 대표급이다. “석빙고” 하면 경주의 것만 떠올리는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소식이겠지만, 대구 인근에는 창녕과 청도, 그리고 현풍에도 석빙고가 있다. 현풍석빙고는 달성문화원 건물 뒤편의 언덕 아래 개울가에 있다고 생각하고 찾는 것이 좋다. 또, 석빙고 앞에는 차량 진입이 가능하지 않으니, 현풍초등학교 인근의 적당한 곳에 주차한 후 걷는 것이 좋다. 그래봐야 100m 안팎이다.

▲현풍 석빙고

현풍 석빙고는 국가 지정 보물 제673호로 경주의 것보다 이른 1730년에 만들어진 것이다(경주는 1733년). 작은 시골이었던 현풍에까지 석빙고가 만들어진 까닭은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주목받을 만한 일이다. 물론 대구에도 석빙고가 있었다. 하지만 읍성 파괴 때 같이 헐려버리는 바람에 가까스로 비석만 남아 경북대 야외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그러나 현풍에는 석빙고 자체가 고이 남아 있으니 나라의 보물로 인정받은 것이야 당연지사이다. ‘말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도 있지만, 모름지기 문화재도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훌륭한 가치가 되는 것이다. 조금 전 도동서원에서 만난 문화재해설사의 희끗희끗한 백발이 저 석빙고와도 같은 ‘보물’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다.
 

정만진(소설가) daeguedu@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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