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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정보
마음 소풍. 22cm x 26cm, 캔버스에 아크릴릭. 2013년 작
플라타너스와 포플러
화가가 되겠다고 규격화된 삶으로부터 비켜서서 몸과 마음이 가는대로 떠돌던 청년시절 만난 사람이 L선배였다. 15년 가까이 차이가 나는 연배인데다 전문 엘리트교육을 받고 사회적으로 이미 성공한 그는, 여러모로 전혀 다른 삶을 선택한 내게 많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나 또한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면서도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그 심성에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L선배는 매사 쾌활하고 스케일이 컸으며, 다방면에 해박한 편이어서 사소한 것들에도 크게 고민하던 나와는 많이 달랐다. 물론, 바로 그 반대 성향이야말로 서로의 관계를 지탱해주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다. 갑각류로 분류되던 나의 사고방식이 상당히 유연해진 이유 가운데 그 선배 영향을 배제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당시 어느 해 늦여름 선배의 장거리 출장길에 우연히 동행했을 때 생긴 일이다.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국도변에는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한더위를 거느린 채 장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감동이 전염되었는지 선배가 외쳤다.
'와! 대단해...포플러가 장관이지?'
당연히 농담으로 받아들인 내가 플라타너스가 아니냐며 웃어주자 L선배는 뜻밖에도 단호하게 반응해왔다.
'아니 이사람...포플러도 몰라? 이게 일명 버즘나무라고 하는 그 포플러잖아!'
우리나라에서 너무도 흔히 볼 수 있는 가로수들로 쌍떡잎식물 장미목 버즘나무과 플라타너스속의 플라타너스와 버드나무목 버드나무과 사시나무속의 포플러에 대한 최초 입력에 착오가 생긴 듯했다. 그는 이 오류를 그대로 껴안고 중년을 넘어서고 있었고, 어쩌면 평생 그렇게 믿고 살아갈 것이 분명했지만, 그때 나는 나이와 사회적 지위에서 아니, 그 무엇보다도 그의 강력한 확신에 완전히 제압되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다만, 우리가 보고 느끼는 현상을 잘못 기억한다고 해서 최소한 사람들의 외형적인 삶에는 전혀 불편함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좀 혼란스러웠다.
제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쩌면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 속에는 상당 부분 또 다른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날 실감했다. x축만이 있는 1차원은 수직관계이기 때문에 오직 전진과 후진만 있을 뿐이다. 바로 이 차원에서 하나의 사실을 서로 반대로 알고 있으면 반드시 충돌하게 되어있다. 사랑도 우정도 부딪치기만 하면 서로 자신만이 옳다고 죽도록 싸우는 것은 바로 1차원 속에서 벌어지는 관계들이다. 그러나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확장해 Y축이 있는 2차원으로의 이동 즉, 싸움에 져 주거나 배려의 마음을 가지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나아가 공간이 있는 3차원으로, 나아가 공간도 초월한 차원으로 마음을 확장하면 이 세상에 심어둔 신의 암호도 해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보면 이기심을 내려놓고 하나의 마음 차원을 이동한다는 것은 내가 아는 것을 버리는 것인지라 지극히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가 용케도 명백하게 안다고 믿어지는 것들도 그 진실이라는 것이 우리가 속해있는 차원과 환경 속에서 일어나는 인연과 상황에 따라 너무나 가변적이다. 확실한 신분증까지 있는 나이지만, 그 어디에서나 내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아니다. 나는 미술 관련 장소나 상황에서는 화가이다. 그러다 버스를 타면 갑자기 승객이 된다. 집에 도착하면 남편이자 아버지다. 다시 강의를 가면 선생이고, 은행에 가면 번호표를 뽑은 숫자 그대로 몇 번째 고객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이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숫자도 되었다가, 시시각각 대명사가 되어버리는 나를 일일이 다 따라가다 보면 아는 것과 상관없이 진실한 참모습도 오히려 점점 멀어진다. 따라서 잘 산다는 것은 마치 수많은 잔가지에 매달린 나뭇잎의 숫자를 정확하고 세부적으로 암기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보다, 나무 둥치가 지닌 큰 이치와 뜻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그 후 지금까지도 그때의 기억은 날카로운 송곳처럼 나의 가슴 속에 남아 있다. 그래서 어쩌면 오늘도 내가 확신에 차 이야기하고 있는 수많은 포플러 잎사귀들 뒤에 가려진 나무둥치가, 혹시나 플라타너스가 아닌지 습관처럼 되돌아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