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예수읽기 성경 본문은 복음서가 아니라 바울계 서신인 골로새서이다. 바울서신이라 하지 않고 바울계 서신이라고 했다. 신약성서를 보면 바울이 쓴 것으로 나오는 책이 로마서부터 빌레몬서까지 무려 13권이다. 하지만 13권 중 진짜 바울이 쓴 서신은 7권이다.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이다. 나머지 책 6권(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은 바울계 서신이라고 분류한다. 그러나 바울계 서신을 열어보면 알겠지만, 서두에 버젓이 바울이 썼다고 나온다. 그래서 근본주의신학은 여전히 바울의 친서가 13권이라고 우기고 있고, 그 영향을 받은 근본주의교회도 그런 줄 굳게 믿고 있다.
왜 바울이 쓰지도 않았는데, 바울이 썼다고 하는 걸까. 요즘 같으면 저작권 침해니, 명의도용이니 하며 난리가 났겠지만, 고대사회에서는 명망가의 이름을 붙이는 일이 관행이었다. 그래야 사람들이 더 많이 볼 것이며 책의 권위가 살아나므로.
예를 들면 구약의 예언서 이사야서도 실제로 세 명의 저자가 쓴 글을 한데 묶은 책이다. '제2 이사야'와 '제3 이사야'라고 불리는 무명예언자는 자신의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이사야에게 돌렸다. 이사야 예언자의 후광을 빌린 것이다.
또, 구약의 시편을 보면 '다윗의 시'라는 표제가 많이 나온다. 그 모든 시를 다윗이 쓴 것은 아니다. 무명시인들이 자신의 시를 더 많이 읽히게 하려고 시인의 아이콘인 다윗의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이다.
바울계서신은 바울이 쓴 것은 아니지만, 바울의 사상, 가르침을 그대로 이어받은 바울계 공동체가 쓴 서신을 말한다. 그러니 이들이 자신들의 저작에 바울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예수읽기'에서 복음서가 아닌 바울계 서신을 성경 본문으로 한 이유는 이방 땅에 사는 초기교회가 예수를 어떻게 보고, 믿고 고백했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주님, 구세주, 메시아와 같은 말이다.
신앙용어의 변천을 보면, 처음에는 역사 예수가 관심사였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공동체가 제도화하면서 역사 예수에 그리스도 개념이 고백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된다. 그러다가 교회공동체가 더욱 정착하면서 예수보다는 그리스도가 더욱 우세하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로 바뀐다. 오늘 골로새서 본문을 보면, 예수라는 독자적인 표현 대신에 그리스도 예수가 딱 한 번 나온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그리스도로 표현한다. 즉, 골로새서 시대가 역사예수 시대에서 세월이 한참 흐른 뒤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때가 어느 때인가? 로마제국 시대이다. 황제 가이사가 로마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에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고백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는 점을 보겠다.
골로새교회에 거짓가르침이 스며들었다. 거짓가르침의 상황은 이렇다. "누가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로, 여러분을 노획물로 삼을까 조심하십시오. 그런 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라 하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2:8)
어떤 철학인가? 정확한 실체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철학이 왜 문제이겠는가? 더욱 더 직접적인 표현으로는 쉬이 흔들리는 그들의 사고방식을 부정적으로, 경멸적인 시각에서 말하는 것이다.
2013년 7월 27일은 정전협정 60주년 되는 날이다. 동양식으로 말하면 십간 십이지 한 갑자가 한 바퀴 돌았다. 정전협정을 들여다보면 알겠지만, 그 협정은 처음부터 임시협정이었다. 4조 60항, 5조 62항에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항구적인 협정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단서가 담겨 있다. 그러나 속절없이 그냥 60년이 흘러버렸다. 이 세월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폐단은 무엇일까? 대미예속의식이다. 나라의 운명을 미국에 맡기고 산 세월이 오래다 보니 한국인의 의식까지 철저히 미국에 저당 잡혔다. 이런 생활방식은 결국 생각, 사상, 관념의 문제이고 뭉뚱그려서 철학의 문제이다. 그래서 골로새서 저자도 철학을 조심하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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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대사관 앞, "정전 60년을 끝내고, 평화협정 체결하자" 한마당 행사 | | |
헛된 속임수는 명백하다. 거짓으로 속여서 삼켜 버리는 짓, 그래서 노획물로 삼아버리는 것이다. 교회에 침투한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는 한마디로 거짓가르침이다. 진리가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사람이 있는 곳에는 거짓선전이 침투하기 마련이다. 요는 이런 침입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이다.
골로새 교회는 내부에 스며든 거짓가르침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을까?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랐다. 무슨 말인가? 사람들의 전통은 기독교의 전신인 유대교의 규례를 수용했다는 말이고, 세상의 유치한 원리는 골로새교회가 몸담은 이방 땅의 풍속을 받아들였다는 말이다. 즉, 이것저것 좋다는 방식을 무비판적으로 채용했다는 말이다.
거짓교사들은 이렇게 말했다. "만물의 기원을 이루고 있는 자연원소들 배후에는 악한 영들의 권능이 작동한다. 이것을 피하려면, 유대적, 이방적 전통에서 생긴 종교적 규정들을 준수해야 한다"라고. 그래서 이들은 "먹고 마시는 일, 명절이나 초등절 축제, 안식일 문제 등" 유대교의 폐단인 겉치레에 충실한 행위와 이방적 요소인 미신을 혼합한 각종 의식에 충실했다.
필자가 정리한 용어로 말하자면, '옳지 않은 일에 힘쓰기'이다. 골로새서 저자가 볼 때, 이들의 반응은 그리스도와는 전혀 무관한 소아병적 행위이다.
기독교신앙은 무엇은 지키고, 무엇은 멀리하고 등, 율법이나 미신의 전매수단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로마제국하에서 지배질서에 굴복하지 말고, 새로운 질서인 그리스도에게 충실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에도 로마황제에게 해당하는 고유언어를 모조리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체제전복적 행위를 감행했다. 전에도 언급했듯이, 바벨론포로로 끌려간 야웨 민중신학자들이나 수난당하는 약자였던 초기신자들은 당시 지배이데올로기를 모조리 자신들 신앙의 주님께 돌리는 패러디의 명수였다.
본문에도 그런 패러디가 무수하다. 확 드러나는 것만 말하자면,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2:6) 주님은 황제였다. 그러나 이제는 황제 대신에 예수를 주님으로 모신다는 선언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통치와 권세의 머리이십니다."(2:10) 로마제국은 황제숭배를 위해 가이사를 '만물의 기원과 동등한 존재'로 공포했다. '질서를 회복시킨' 자도 황제고, '생명과 생기의 기원'도 황제이다. 더욱이 가이사는 '모든 전쟁을 끝내고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구세주'로서 가시화된 신으로 추앙받았다. 골로새 저자는 이처럼 황제숭배로 가득한 언어를 그리스도께로 대체시켰다.
골로새 저자는 2장 15절에서 결정적으로 제국조차도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도발적인 담대함을 연출한다. 바로 황제의 개선식 장면에 대한 묘사이다.
"모든 통치자와 권력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포로로 내세우셔서, 뭇 사람의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2:15) 로마의 개선식은 유명하다. 승리의 결정적 상징이다. 로마시민들은 개선식 구경거리가 큰 낙이었다. 적장포로와 전리품은 제국에게 자기들이 천하무적이라는 만족감을 줬다. 황제는 개선식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그런데 골로새서 저자는 로마제국의 전매특허인 개선식을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으로 바꿔치기했다. 적장포로가 겪는 수모를 황제가 고스란히 겪는다. 황제가 무장해제당해서 되레 뭇사람의 구경(조롱)거리로 전락한다. 완전한 반전이다.
제국관리가 보면 이것은 명백히 반체제문서이다. 기독교는 이런 것이다. 천하를 지배하는 제국황제와 맞짱 뜨는 대담한 신앙체계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유와 주체의 충만함으로 가득 찬 신앙을 고작 사람들 전통이나 세상의 유치한 원리로 제약하려 드니, 모신(신을 모욕함)도 이런 모신이 없다.
역사 예수는 약자와 하나님나라를 위해 자신을 바치셨다. 그 형제애가 지극해서 하나님과 일치를 이룬 그리스도까지 되셨다. 그분의 인생궤적을 진리로 삼을 때, 우리도 그만큼 자유로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