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탓인가요? 날씨만큼 뭔가 어정쩡합니다. 정상회담 회의록, NLL논쟁은 정전협정 60주년에 맞춰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수호의지를 다지기 위한 한낱 해프닝이 되어버렸습니다. 박근혜 정부 퇴진과 국정원 해체라는 국민적 요구가 다시 오래된 냉전의 유령들 앞에 휩싸였습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 남성처럼 한강에 뛰어들 ‘진정성’조차 민주당에 기대하기 힘들어 보이니 촛불을 둘러싼 이 끄무레함이 당최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헷갈립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살아보고자 희망했던 이들은 죽봉을 준비한 주도면밀한 좌익용공 폭력집단으로 둔갑했고, 현대차가 불법이라 판결했던 사법부가 재계를 등에 업고 도리어 시위자에게 죄를 묻습니다. 5천이든, 1만이든, 2만이든, 서울이든, 대구든, 제주든, 촛불이든, 라이터든, 핸드폰이든 우리는 TV에 나오지 않습니다. 뉴스가 무슨 맛집 찾기도 아니고 잘 먹히는 것이거나, 먹어줬으면 하는 것만 방송에 내보내니 환장하는 국민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아무리 ‘TV에서 맛집은 맛이 갔다(트루맛쇼(김재환, 2011) ’지만 오죽하면 국민들이 이제 언론에 정론(正論)은 됐으니까, 직필(直筆)이라도 제대로 하라고 성화를 낼까요.
아무튼, 장마 탓인가요? 고체처럼 단단하게만 느껴졌던 사회가 이젠 액체처럼 보입니다. 절망과 희망이 뒤섞이고, 아군과 적군, 이 사람, 저 사람, 이 말과 저 말이 한 통 속에서 허우적거립니다. 당장 더위가 한풀 꺾이는 것은 반길 일입니다만 이 장마 뒤의 여름은 어찌 또 견뎌야 할지 벌써 걱정됩니다. 장마 전과 장마 후의 더위가 같지 않듯, 우리의 민주주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박정희가 살아서 낳고, 죽어서 만든 박근혜 정부에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삼삼오오 거리로 나앉고 다시 노래를 부릅니다. 자연스럽게 나온 퇴진 요구가 비단 국정원과 경찰의 정치개입 때문만이겠습니까. 불필요할 만큼 오랜 시간을 이어져 왔던 한국 근대사의 노골적인 광기(예컨대 ‘언제든 가능한’ 여론조작과 같은)와 단절하고자 하는 의지이자, 부녀지간이 축약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반동에 맞서 다시 ‘나아가고자 하는 힘’에 다름 아닙니다. 즉각적 사건으로만 촛불의 의미를 퇴색시킬 순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불충분한가 봅니다. 언제든 그들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자본으로, 개발로, 경제로, 때론 복지라는 이름으로 대체 가능했었던 ‘과거의 민주주의’, 절차와 형식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사실 우린 불신해 왔음에도, 모종의 ‘그것마저도’라는 배신감 또는 위기감으로 모이려고 했나 봅니다. 이미 대통령도, 국정원장도, 정부여당도 관심이 없고, 야당마저도 전의를 잃은 국정조사와 진상규명은 실효성을 잃었습니다. 시간적 과거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가능한 수준에서의 상호 합의와 공개만이 남았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애쓰지 말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민주주의는 밀리고 밀려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이들에게 별 희망이 되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지상 25m 철탑에 오른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외롭게 죽어간 이들을 추모할 작은 지면조차 허락받지 못한 해고자들에게, 산속 한 생을 걸고 핵마피아와 싸우고 있는 어르신들에게, 땅속 지하철에서 낙인과 차별에 맞서 노숙하고 있는 장애인들에게 말입니다. 그렇게도 강조하는 ‘군기’가 부족해 죽어야 했던 2013년의 청소년들과 어물쩍 저당 잡혀버린 미래에 고뇌하는 청춘들에게 말입니다. ‘실종된’ 민주주의를 찾아도, 정작 삶이 변하진 않더라는 것에 익숙해진 또 다른 우리들에게 말입니다.
‘과거에 존재했던 것’을 인식하고, 더듬거리며 어떤 고정점으로 끌어오려고 노력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향한 운동이라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든)현재를 잉태한 한 과거 10년은 아닐런지요. 그나마 조금 덜 불행할 성싶은 또 다른 절망과 패배감은 아닐런지요. 실종된 것은 민주주의라는 맛집 자체가 아니라 실속 없고, 과장되고, 부풀려지고, 왜곡된, 때로는 적당한 거래로 가려져 왔던 ‘진짜 맛’은 아닐런지요.
장마철, 고생스러울 8월의 촛불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장이자, 낡지 않은 새로운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