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황유미(1985-2007)씨, 故박지연(1987-2010)씨, 故김경미(1980-2009)씨, 故황민웅(1975-2005)씨, 故이숙영(1976-2006)씨···'죽음의 공장' 삼성에서 일했던 사람들이다. 괄호 속 숫자가 수많은 말을 품은 듯 애처롭다.
'국민기업', '꿈의 공장', '꿈의 일터', '한국에서 가장 선망받는 기업', '구직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기업'··· 삼성을 수식하는 말들이다. 태안 기름유출, 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 불산 유출, 강정 해군기지 건설 등으로 손가락질을 받아도 여전히 삼성은 '그래도 한국을 이끌어가는 없어선 안 될 기업'이다.
'국민 기업 삼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서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이종란 노무사. 이 노무사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에서 지금껏 삼성과 싸워왔다.
이종란 노무사는 대구경북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가 주최한 제4회 대경인의협포럼 ‘삼성반도체, 백혈병을 말하다’에 강연자로 나서 '죽음의 공장'에서 백혈병으로 죽어간 사람들, 그리고 여전히 삼성과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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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일 열린 대경인의협포럼에 강연자로 나선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 | | |
딸을 잃은 황상길씨 호소로 시작한 싸움
산업재해 인정 여부가 관건, 삼성의 집요한 방해로 인정 어려워···
이 노무사가 산업재해 희생자들의 산업재해 인정을 위해 삼성과 싸우기 시작한 것은 황상길씨의 전화를 받고부터다. 황씨는 삼성반도체에서 백혈병을 얻고 사망한 황유미씨의 아버지다. 황씨는 가정을 지탱하던 택시로 딸의 마지막 배웅했다. 이후 황씨는 故황유미씨의 질병사에 대한 진상규명에 나섰다.
황씨의 호소가 계기가 됐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20여 개의 노동, 시민, 사회단체들은 2007년 11월 20일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 규명과 노동 기본권 쟁취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출범하고 2008년 2월부터 반올림이라는 이름으로 故황유미씨를 포함한 피해자들의 산업재해 인정을 위해 싸워왔다.
이후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질병을 얻은 노동자 2명(김지숙, 故김도은 씨)이 산재 인정을 받는 등의 성과도 있었지만, 여전히 백혈병을 앓는 삼성반도체 노동자는 산재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반올림에 의하면 2013년 5월 말 기준으로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는 제보된 것만 181명이고, 이 중 71명이 사망했다.
백혈병을 포함한 다른 질병들이 직업과 유관한 질병임을 인정받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 노무사는 “백혈병은 질병의 특성상 인과관계를 설명하기 어렵다. 의학적으로 명백하게 인과관계가 성립된 것만 보상하라는 게 아니라 사회적 인과관계가 있으면 보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노무사는 부비동암 판례를 현재 '개인적 질병'이라며 산재로 인정되지 않는 백혈병과 대조했다. 부비동암은 백혈병과 마찬가지로 환경과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어려운 질병이다. 2009년 11월 서울고등법원은 시멘트 공장에서 근무하다 부비동암으로 사망한 강 모씨의 산재판결에서 "업무와 질병 간 인과관계는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입증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며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추단되는 경우에도 입증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라고 판결했다. 국가가 발병원인을 입증하지 못하면 업무상 재해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유독 삼성반도체에서 근무 중 질병을 얻은 피해자들에 산재 적용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 노무사는 “삼성이 산재인정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삼성은 피해자들에 대한 갖은 회유와 협박을 했다. 근로복지공단(피고)을 상대로 한 소송에 삼성은 피고의 보조참가인으로 개입하기도 했다. 심지어 삼성은 “친기업적 연구보고서를 만든다”는 '인바이런'사에 반도체공장의 유해환경 노출평가와 백혈병 업무관련성 평가를 맡겨 "업무관련성이 없고 위험요소는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발표를 하는 등의 개입을 삼성이 했다고 이종란 노무사는 말한다.
삼성의 개입에도 산재로 인정받는 판례가 나오기도 했다. 2011년 6월 23일 서울행정법원 행정14부(재판장 진창수)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노동자 황유미, 이숙영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한 것은 여러 유해화학물질과 전리방사선 노출의 상호작용으로 인한 산업재해”라는 판결을 내렸다. 근로복지공단의 항소로 고등법원에서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어 산재 인정 여부가 아직 불투명하지만, 이 노무사는 “삼성 측의 부실한 작업환경측정 결과를 배척하고 반도체 산업의 특성과 근로자의 건강상태를 고려하여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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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포럼에는 인의협 회원, 시민 40여명이 참석했다. | | |
백혈병은 삼성만의 문제가 아냐···
신자유주의 세계체계에도 문제 제기 필요
한편 이 노무사는 삼성반도체에서의 백혈병 피해 등 산재의 문제는 단지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 노무사는 “원진레이온(비스코스 인조견사 생산업체)”의 사례를 들며 “신자유주의 세계체계에도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원진레이온은 일본에서 3~40년대 사용되던 생산설비를 60~70년대에 수입했어요. 그 기계가 이황화탄소를 뿜어내며 많은 노동자를 병들고 죽게 만들었어요. 한국에서는 90년대에 폐업됐는데 기계는 중국으로, 다시 북한으로 팔려나갔어요. 자본주의 시스템하에서 위험이 폐기되지 않고 자꾸 전가되는 거예요. 반도체 산업도 똑같아요. 70~80년대 미국에서 큰 사회적 문제를 낳았던 반도체 사업이 이제는 중국으로, 한국으로 혹은 대만으로 이전되어 문제가 되고 있어요. 위험이 이전되는 문제를 어떻게 할 거냐, 노동자들의 국제적 연대를 통해서 해결해야 합니다”
이외에도 많은 과제가 산적해 있지만 이 노무사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피해자들과 함께 차근차근 삼성과 싸워나갈 것이라고 한다.
“산재를 인정받기도 어렵지만 인정을 넘어서 직업병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이 중요합니다. 삼성은 화학물질이나 방사선 등 유해요인에 대해서, 노동자들에게 투명하게 공개하지도 않고, 이런 문제에 대해 사회적으로 감시되고 관리되지도 않습니다. 단순히 영업기밀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 있는데, 영업기밀이라는 불문율이 아니라 노동자의 안전과 관련된 것은 영업기밀이 될 수 없다고 얘기하고, 노동자가 위협받지 않는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계속 싸워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