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잘거리는 새들 소리에 잠이 깬다. 새들은 뭐가 즐거워 저리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일까. 알 길이 없지만 서로 감정을 소통하고 공유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새들 소리에 깨어난 인간들은 서로 눈치를 교환하며 감정 없이 스쳐지나 일터로 간다. 자연재해로 평생 일군 집을 잃은 사람들의 소식에는 혀를 끌끌 차지만 언론이 봉쇄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죽음에는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나 하나 내 가족만 노동자로 전락하지 않기를 기원하는 마음뿐이다. 감정, 감흥, 감동이 없는 시대, 감정을 소유하지 않은 사이코패스가 번성하는 시대는 우리가 만들어낸 시대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에 무감하고 나는 너와 너의 죽음에 무감하며 집단 투쟁은 개인의 상처에 무감하다.
올 초 자살한 기아차 해고노동자 윤주형의 고독한 내면에 무감한 우리가 윤주형의 죽음을 불러왔던 것은 아닐까. 신자유주의 운운하기 이전에 기득권 지키느라 더 낮은 곳에 있는 노동자들에게 감정을 전달하지 못한 우리가 그의 죽음을 불러온 것은 아닐까. 자신을 열사라 부르지 말라던 윤주형은 “잊혀지겠다는 사람의 이름으로 장사하는 일은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요”라고 유서에 썼다. 잊혀지겠다고 작심한 그에게 우리는 망각을 선물하고 죽어서야 노동해방의 세상에 간 그에게 열사라는 호칭을 들이대며 정파라는 알리바이로 기득권을 채워 왔던 것은 아닐까. 아침을 깨우는 새들처럼 배려, 공유, 다독거림의 정서를 느끼고 소통했더라면 열사의 쩍쩍 갈라진 논바닥 같은 메마른 마음을 되돌릴 수 있지 않았을까.
무감의 시대는 무통의 시대다. 집회와 문화제의 현장은 고통으로 뒤범벅 된 곳이기에 사람들은 고통과 통증을 외면한다. 아니, 애초부터 인간은 치통을 견디지 못해 게보린을 먹어야 하고 암환자처럼 몸의 통증을 이기지 못해 마취제를 맞아야 하는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존재일지도 모른다.
고통과 통증을 직시하기에 한없이 부족한 존재인 인간은 무통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사회 곳곳에 널려 있는 무통화 장치에 걸려들어 마침내 무감의 상태로 진입한다. 거기서 사람들은 힐링, 주식 펀드에 열광한다. 연예인들이 마시던 해독주스가 인기를 끌고 채식주의, 요가, 건강염려증 환자들이 증폭한다. 노동자들도 주체성의 배양보다 무통화 장치의 덫에 쉽게 걸려들거나,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맛에 길든다.
고통이나 통증을 정면 돌파하기보다는 우회로를 따라 무통과 힐링의 길에 들어선다. 힐링은 무감의 시대의 산물이자, 어쩌면 무감의 강도가 절정에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지표인데도 우리는 타인이 배제된 나의 삶, 나의 생명, 나의 몸에 온통 신경을 다 갖다 바친다. 힐링은 사적인 육체의 무통화에 열광하는 신자유주의의 종교일 뿐이다.
폭력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국가와 자본의 통치 수법이 폭력에서 손배소로 넘어간 시대다. 가장 비열한 노동 탄압 도구로 등장한 손배소, 가압류, 업무 방해, 명예 훼손을 남발하는 자본 억압의 시대에 우리가 주목할 것은 노동의 배제도 노동자 죽음의 배제도 아닌 듯하다. 그것들도 중요하지만, 힐링으로 정점을 찍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우리가 주목할 것은 사적인 육체를 넘어선 감정의 회복이다.
신자유주의는 노동만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감정, 고통의 정서, 타인을 향한 감정, 고통의 정서를 박탈해 버렸기 때문이다. 집회나 문화제 행사에서 무통 ․ 무감에 길든 대중들, 그저 볼거리로 집회나 문화제 현장을 쳐다보는 방관자들, 무통 ․ 무감이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등장해 너와 나를 분리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서로 간에 감정이 흐르게 해야 한다.
정파와 기득권을 넘어 이성과 <자본론>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하기 이전에 먼저 감성으로 우리 자신을 바꾸어야 한다. 이른 아침 재잘거리며 소통하고 공감하는 새들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고통과 통증의 세상 저 너머에 있는 존재들을 공감시킬 수 없고 한 치의 세상 변혁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