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날] 꽃랑이 - 뉴스민
뉴스민 로고
무제 문서
뉴스 오피니언 기획/특집 지역광장 사진/영상 주말판 노는날  
 
뉴스홈 > 기획·특집 > 노는날 > 이영철 칼럼
뉴스관리툴 2013년06월22일 10시50분    
글자크기 글자크기 크게 글자크기 작게 기사내용 이메일보내기 뉴스프린트하기 뉴스스크랩하기

[노는날] 꽃랑이
수박화채

이영철(화가) grim-si@daum.net

▲돋보기 버튼을 누르시면 더 큰 화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작품정보
꽃랑이. 41cm x 53cm, 캔버스에 아크릴릭. 2013년 작

수박화채
유월인데도 날씨는 벌써 한여름이다. 무더운 기온에 가뭄까지 드니 과일의 당도는 올라가겠지만, 전반적으로 농사짓는 분들은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장에 여름과일, 특히 수박이 넉넉하게 출하되어 손님을 기다리는 것을 볼 때면 잊을 수 없는 추억이 하나 떠오른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미술대학으로 최종 진로를 결정하기까지는 긴 공백 기간이 있었다. 그림을 먼저 시작하기는 했지만, 글 쓰는 일도 함께 해오던 터라 고민을 하다 보니 더 그랬다.

화가 초년병도 아니고, 얼치기 문청도 아닌 그야말로 애매하고 모호한 상황에 빠져 붓과 펜을 쥔 손가락 사이로 허무하게 빠져나가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반대하던 일을 고집하던 터라 집에 손 벌릴 처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막일 아르바이트도 늘 있는 게 아니어서 용돈을 넉넉하게 호주머니에 넣어보기가 쉽지 않았다. 밖으로만 빙빙 돌며 자주 끼니를 거르다 보니 막걸리 한 주전자 혹은 라면이라도 배불리 먹게 되는 경우는 일진이 아주 좋은 편이었다.

그해 여름도 유난히 무더웠다. 반 백수 생활인데다 바로 이런 궁핍이야말로 진정한 화가나 소설가의 삶에 가깝다는 겉치레 멋에 빠져 지냈다. 그러나 그 생짜배기 예술가의 자존감도 무더위와 배고픔의 참담한 고문 앞에서는 강풍에 흔들리는 깃발처럼 늘 위태로웠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신념(?)을 지니고 버티고 있는 친구 집을 뻔질나게 들락거리며 혼자가 아니라는 동료의식으로 위안을 받곤 했다. 그 여름 어느 날 또한 그 친구와 함께하기로 마음먹고 작업실을 나섰다.
 
그날은 정말 한여름답게 뜨거운 날이었다. 골목골목이 타오르고, 온 도시가 타오르고 있었다. 주머니를 탈탈 털어보니 버스비라도 아껴야 친구를 만나면 허기를 때울 정도의 동전이 손에 만져 졌다. 그래서 꽤나 먼 길을, 그 뜨거운 뙤약볕 아래 걷고 또 걸었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그 길 끝에 친구가 사는 동네가 보이고 낯익은 골목도 눈에 들어왔다. 이제 무슨 조처를 하지 않으면 그냥 죽을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 골목 중간쯤 나무그늘 아래 수박을 파는 리어카가 눈에 확 들어왔다. 홀린 듯 다가가. 졸린 듯 보이는 아저씨에게 그중 가장 작은 수박을 고르고 골라 가격을 물으니 돈이 턱없이 모자라지는 않았다. 겨우 사정사정해 동전을 몽땅 털어 넘겨받은, 배구공보다도 작은 수박을 들고 친구 방으로 스며들어 갔다. 당연히 녀석도 나보다는 내 손에 눈이 먼저 가더니만 근래 좀처럼 보기 드문 반색을 했다. 그러나 막상 수박을 내려놓고 보니 둘이 나누면 입가심하기에도 어려움이 있을 만큼 너무 작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수박화채였다. 얼음은 앞집 단골가게에서 좀 얻어오고 큰 플라스틱 바가지에 수박이 거의 껍질이 보일 때까지 긁어 넣으니 양이 제법 불어났다. 그런데 이때 친구가 더 큰 포부를 밝혔다. 물을 좀 더 붓고 대신 그만큼 설탕을 첨가하면 당도는 유지되고 수박화채의 양은 둘이 충분히 먹을 만큼 늘어나지 않겠느냐는, 평소 알던 친구의 머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천재에 가까운 아이디어를 제시한 것이다! 이 더운 날 시원하고도 배불리 먹자는데 내가 반대할 이유도 전혀 없었다.

그다음부터 모든 일이 계획한 대로 숨 가쁘게 착착 진행되어 나갔다. 얼음에다 수박조각, 그리고 물이 첨가되고 드디어 찬장을 뒤져 커피 프림 병에 넣어둔 설탕을 찾아내 바가지에 부은 다음 휘휘 저었다. 그리고는 인내심을 유지하기 어려워 맛을 보니 아직 단맛이 올라오지 않았다. 다시 설탕을 더 넣어 젓고 맛보기를 두어 번 더 되풀이하자 그 초조한 노동과 기대감의 끝을 따라 올라온 것은 확연한 짠맛이었다. 우리는 커피 프림 병에 담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사랑스럽던 곱고 흰 분말이 설탕이 아니라 맛소금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후회와 아쉬움의 비명을 질러댔을 즈음 수박은 이미 그 마지막 형태까지 녹아 사라지고, 대신 극심한 짠맛이 온 바가지에 샅샅이 퍼져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중복이 가까운 한여름 뙤약볕 아래 아스팔트 길을 고행자처럼 걸어서 주린 배를 채워보겠다고 전 재산을 몽땅 투자한 수박화채는 그렇게 허무하게 더위와 한숨 속으로 사라졌다. 낙심한 나는 다시 기나긴 거리를 되 걷고 걸어서 열대야로 끓어오르던 골방 작업실로 기어들어가, 그 와중에도 장차 화가가 될지 아니면 소설가가 될지 고민하며 끙끙 앓았다...
 

이영철(화가) grim-si@daum.net

ⓒ 뉴스민 (http://www.newsmin.co.kr).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보도자료 newsmin@newsmin.co.kr

 
[노는날] 초록 일기
[노는날] 분홍이
[노는날] 친구-삐짐!
[노는날] 마음 소풍
[노는날] 또 다른 동행
뉴스스크랩하기
이기자의 다른뉴스보기
이영철 칼럼섹션 목록으로

이름 비밀번호
 69855512  입력
다음기사 : [노는날] 초록 일기 (2013-07-06 04:56:41)
이전기사 : [노는날] 꽃편지 (2013-06-08 01:00:14)
많이 본 기사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최근 기사
열악한 대구 시민 복지…”복지기준선 필요...
낙동강, 맹꽁이 사라지고 큰빗이끼벌레만
청도 송전탑 공사 강행 1년, 피해 주민 “...
중구청, 대구 지자체 중 비정규직 비율 1위
국가는 유령이다: ‘유일자(唯一者)’ 막스...
“학교 급식인원 감소 예상된다”며 조리원...
민주노총 대구본부, ’10월 항쟁’ 답사 진...
삼평리 주민과 연대자, 송전탑 넘는 넝쿨이...
노조탄압 논란 ㈜오토..."시급 5,270원 알...
그리스에 대해 프랑스인들이 보여주는 열정...
뉴스민 하단메뉴
하단구분바

사단법인 뉴스민 | 등록번호 : 대구 아00095(2012.8.24) | 발행인 : 노태맹 | 편집인 : 천용길
창간일 : 2012.5.1 |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당동 72-18 노동복지회관 2층뉴스민
TEL : 070-8830-8187 | FAX : 053)211-4719 | newsmin@newsmin.co.kr

뉴스민RSS정보공유라이선스정보공유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