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를 읽으면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이적사건을 접한다. 그럴 때마다 이 사건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하는 의문을 가진다. 액면 그대로 실재한 사건으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또 다른 뜻을 찾아야 하는지...
오늘은 독자에 대한 서비스로 복음서에 나오는 이적사건을 이해하는 짧은 해석원리를 말하겠다.
복음서에서 예수의 이적을 크게 분류하면 치유구마(병고침과 귀신쫓음) 사건과 자연이적 사건으로 양분한다. 오늘 본문이야기처럼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소생이적은 시체라는 자연물을 상대로 한 것이므로 자연이적사건에 속한다. 그런데 치유구마 사건은 대체로 역사적 신빙성이 있으나 자연이적사건은 신빙성이 없다는 게 신약학계의 정설이다. 자연이적사건 예를 들자면, 풍랑을 가라앉힘, 물 위를 걸음, 물고기 입에서 은전을 찾게 함, 물로 술을 만듦 등이 있다. 소생사건은 야이로의 딸을 살림(마가 5장),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인성의 청년을 살림, 나사로를 살림(요한 11장) 등이다.
신약학계에서 자연이적 사건의 역사적 신빙성을 부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예수의 어록에 자연이적 사건이 전무하다. 어록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공통으로 나오는 예수 말씀집이다.
둘째는 예수의 신빙성 있는 말씀 가운데 자연이적에 대한 말이 전무하다. 신빙성 있는 말씀이라니? 미국의 신약학자들이 회원으로 있는 예수세미나에서 한 작업을 했다. 복음서들 속에 나오는 특정한 본문이 예수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초대교회의 목소리인지에 대해, 학자들이 빨강, 분홍, 회색, 검정 구슬로 투표한 것이다. 빨강구슬은 '예수가 그 말씀을 하셨다고 거의 확신한다'는 뜻, 분홍은 '아마도 그럴 것이다'와 '아니라고 보기보다는 좀 더 그렇다고 본다'는 입장, 회색은 그렇다고 보기보다는 아닐 것이라고 본다'와 '아마도 아닐 것이다'는 입장, 검정구슬은 '예수가 그런 말씀을 하지 않았다고 거의 확신한다'는 뜻이다. 신빙성 있는 말씀은 빨강구슬에 해당하는 말씀인데, 여기에 자연이적 사건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말이다.
셋째는 복음저자들이 예수의 활약상을 요약한 집약문에 병을 고쳤다는 말씀은 자주 나오지만, 자연이적은 전혀 열거하지 않았다.
이상의 이론이 옳다면, 자연이적사건의 해석원칙은 저절로 드러난다. 자연이적사건을 대할 때는 역사적 사실을 캐지 말고, 이야기의 뜻을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식한 말로 '사건사'를 거론할 것이 아니라 '의미사'를 파악해야 한다.(『200주년 신약성서 주해』197쪽 참조)
그럼, 오늘 본문인 나인성의 청년을 살린 이야기에서는 어떤 의미를 캐야 하나? 죽음은 다 같은 죽음이지만, 죽은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장례식장 분위기는 천차만별이다. 제일 정상적인 장례는 자식이 오래 사신 부모를 장례 치르는 일이다. 물론 가장 가까운 사람이 돌아가셨기에 심히 슬프지만, 그래도 그 죽음이나 장례를 비극적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은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일이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의 장례를 치르는 일이다. 그 아픔이 워낙 큰지라 부모는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
우리나라는 수난의 근현대사를 거쳤기에 수많은 젊은이가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었다. 옛날에는 독재정권이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는데, 지금은 여기에 자본이 가세했다. 쌍용자동차에 기반을 뒀던 노동자 23명이 목숨을 끊었다는 것, 삼성전자에서 일하던 수십 명의 젊은 여성노동자들이 백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 자본의 살인적 잔인성을 증언한다.
로마의 식민지지배를 당한 유대 땅에도 우리 같은 비극적 죽음의 사례는 차고 넘쳤다. 늘상 일어나는, 반체제 저항자들을 형벌하는 십자가 처형이 단적인 예이다.
오늘 성경이야기에 나오는 과부의 외아들도 비극적 죽음이다. 하지만 기존의 율법과 관습이 그 시대를 추인하는 한, 아무리 불의하고 악한 시대가 비극적이고 억울한 죽음을 양산하더라도, 그 죽음을 끝장낼 수는 없다. 남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말로 위로하고 정해진 장례절차를 치르고 지나가는 일뿐이다. 근원적인 변화를 끌어내야 하는데 전혀 그러질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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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국회정문 앞에서 1인시위에 나선 이규석(故이종환 일병 아버님)님. 1988년 8월 14일 외박을 나온 이종환 일병은 여관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됐습니다. 육군 28사단에서 복무하던 고인은 평소 가족들과의 전화통화에서 "선임병들의 학대가 심해서 견디지 못하겠다"고 호소했습니다. 군 수사기관은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에 자살한 것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지만 유가족들은 고인이 부대에서 받던 가혹행위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라는 의혹을 가지고 지난 2006년 12월 군의문사위에 진상을 밝혀달라고 진정했습니다. [출처=군의문사 유가족연대] | | |
페이스북을 통해 군의문사 진상규명활동을 하는 고상만씨의 글을 보노라면 지금도 군대에서는 복무 중 사망한 군인 10명 중, 1명은 사망원인이 규명되지 않아서, 의혹에 둘러싸인 체, 장례도 못하고 방치돼 있다고 한다.
어째서 이런 억울하고 불의한 일들이 시대가 흘러도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것인가? 지배논리와 케케묵은 관습이 수많은 의문과 불의를 덮어주었기에, 죽음은 진실규명이 안 되고, 세상은 달라지지 않고 여전히 강자의 악행이 근절되지 않는 것이다.
예수는 나인성에서 비극적 죽음과 딱한 사연을 안고 묘지로 향하는 장례행렬을 만났다. 성경은 그 죽은 자의 처지를 말하기를 "그 죽은 사람은 그의 어머니의 외아들이고, 그 여자는 과부였다"라고 했다. 죽은 자도 안됐지만, 남은 사람도 딱하기 그지없다. 전에는 유일한 피붙이 외아들이 삶의 근거이며 희망이었는데, 그 외아들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 과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그런데 여기서 예수의 비범성이 나타난다. 예수는 "앞으로 나아가서, 관에 손을 댔다" 그러자 관을 메고 가던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장례행렬이 지나가면, 하던 일을 중단하고 그 행렬에 동참하는 게 관례이다. 그런데 예수는 장례행렬을 막았다. 관에 손을 대서. 예수는 유대 율법과 관습을 아주 노골적으로 어겼다.
율법에 따르면, "어느 누구의 주검이든, 사람의 주검에 몸이 닿은 사람은 이레 동안 부정하다."(민수기 19:11) 이스라엘의 정결례법은 가차 없다. 그 중에서도 시체와 몸이 닿은 부정은 가장 심한 부정이다. 그런데 예수는 스스로 부정을 입었다.
예수는 왜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하는가? 예수께서는 그런 죽음과 장례를 고작 문상이나 하고 장례행렬에 동참하고 위로나 하는 것으로 자위하고 정당화하고 지나갈 수는 없는 일이다. 우선 억울하고 인정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 시대의 지배권력에 눌려서, 슬퍼만 하고 장례나 치러야 하는 고정된 관습을 중단시키고,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게 그분의 일이다. 그래서 예수는 담대하게 말씀했다. 그 여자에게 "울지말아라"라고, 또 죽은 사람에게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라고.
누가 저자는 예수가 사람을 살린 능력을 행사한 전설적인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열왕기상 17장과 열왕기하 4장)를 능가하는 사람임을 의식하며, 예수의 말씀과 행위가 전적으로 신적인 능력과 권위임을 증언한다.
예수가 죽은 사람에게 명하자, 죽은 사람이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즉 살아났다는 뜻이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이적행위의 목적이 나타났다. "예수께서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앞에서는 '그 여자'였던 사람이 이제 다시 '그 어머니'라는 어울리는 호칭을 찾았다. 외아들이 죽으면서 어머니는 사라지고 여자로만 불렸는데, 예수가 그 아들을 다시 살려줌으로써 '그 여자'가 이제는 '그 어머니'로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예수의 이적행위 목적을 알 수 있다. 사람을 온전히 사람으로 제자리에 세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사람을 비인간화시키고 불의한 악습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눈물과 한숨을 지어야 하는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 몸소 제도와 관습, 율법을 타파하고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것, 바로 구세주가 하는 일이다.
우리가 예수처럼 죽은 자를 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그분이 당시 유대 율법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부정한 사람을 자청하면서까지 장례행렬을 중단시키고, 사람을 살리고자 했던 그 용기는 행사할 수 있다.
예수의 이적에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아주셨다"고 기뻐했다. 오랜 세월 '하나님도 우리를 버리셨구나, 돌보지 않는구나'하는 체념에 빠졌었는데, 승리의 소식이 민중들의 오래된 좌절을 단박에 희망으로 돌려세웠다.
오늘날, 여전히 죽은 자를 양산하는 거짓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도 승리의 소식은 절실하다. 관습과 지배이념에 굴복하지 말고 뚫고 나가자. 그럴 때만이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날 수 있다. 이것이 오늘 성경이야기, '예수가 죽은 자를 살린 사건'의 의미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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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이 완성한 차량 [출처=참세상 김용욱 기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