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구 여행은 조금 막막하다. 경북 칠곡군 일부의 대구 편입과 여기저기 시행된 신도시 개발 등으로 행정구역이 너무나 펑퍼짐해졌기 때문이다. 대구역 부근도 북구, 경북대학교도 북구, 무태도 북구, 칠곡도 북구…… 과연 어디부터 다녀야 하나? (대구박물관이 있는 수성구에 이어 북구 지역으로 대구의 두 번째 ‘지역’답사를 떠나는 것은 경북대박물관 때문이다)
여행 다닐 때에는 그 장소에 머물 시각을 고려해야 한다. 계절까지 맞추지는 못하더라도 ‘아침에 가야 좋은 곳이 있고, 저녁에 보아야 더 아름다운 곳이 있다’ 정도는 따져보아야 한다. 눈으로 즐기는 데 그치지 않고 본 것을 사진으로 남기려는 이들이 많아져서, 햇빛의 방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화재가 동서남북 어느 방향에서 촬영해야 ‘작품’을 만들 수 있는지, 눈앞의 바다가 동해인지 서해인지 등을 고려해야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말이다.
북구에서 일몰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일찍이 서거정은 ‘대구 10경’을 노래하면서 대구에서 노을 풍경을 즐길 명소로 침산을 상찬한 바 있다. 북구 여행의 마지막 여정으로 침산 만조(晩照)를 선택하자는 말이다. 요약하면, 북구 여정은 ‘칠성바위'->경북대 (야외)박물관->연암공원->무태->노곡산성->서유교 비->침산공원’의 순서가 적절하다.
4840평 ‘야외 박물관’ 거느린 경북대박물관 '최고'
북구 답사의 정점은 경북대학교 박물관이다. 이 대학의 박물관은, 여느 대학의 박물관과 달리, 야외에도 4,840평이나 되는 광활한 전시장을 가지고 있다. 이름이 월파원인 경북대 야외 박물관은 넓은 잔디밭 곳곳에 탑과 부도[僧塔], 고인돌 등을 거느리고 있어 특별히 눈이 내린 날이 아니라도 사진 찍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이다.
경북대의 소장품 중 대표적인 것은 신라 초기 저수지 축조 기념비인 무술명오작비(보물 516호), 통일신라 때의 석조여래좌상(보물 335호)과 석반가사유상(보물 997호), 고려시대 석조부도(보물 135호, 258호), 조선시대 분청사기(보물 268호), 은을 갈아서 불경을 베껴 쓴 수능엄경(보물 271호) 등이다.
여정의 흐름을 보면 경북대박물관의 실내, 실외 전시장 답사 이전에, 조선 정조 때 3년간 경상도 감사로 재직한 이태영의 ‘전설’이 깃든 칠성바위부터 보고 오는 것이 좋겠다. 지하철 2호선 대구역 칠성시장 쪽 출구 계단 바로 위에 있다.
이태영은 어느 날 밤, 북두칠성이 광채를 내면서 떨어지는 꿈을 꾼다. 그는 새벽같이 일어나 꿈속의 현장인 ‘북문앞’, 지금의 북성로 경북인쇄소 부지 인근으로 달려갔다. 꿈속의 현장에는 실제로 일곱 개의 바위가 북두칠성처럼 떨어져 있었다. 간밤의 꿈을 엄청난 길몽으로 해석한 이태영은 바위마다 일곱 아들의 이름을 각각 새겨넣었다. 의갑(義甲), 의두(義斗), 의평(義平), 의승(義升), 의준(義準), 의장(義章), 의조(義肇). 일곱 아들 모두가 하나같이 크게 출세하기를 기원하는 부정(父情)의 표시였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험상궂은 바위에 이름이 새겨진 세 아들은 무관(武官)으로 출세했고, 깔끔한 바위에 이름이 새겨진 세 아들은 문관(文官)으로 벼슬을 했다. 그러나 ‘평’범한 바위에 이름이 새겨진 나머지 한 아들은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채 ‘평’민(平民)으로 살았다.
뒷날 차남 의두가 경상감사로 부임했다. 그는 아버지의 전설을 역사에 남기기 위해 칠성바위 옆에 정자를 세우고, 북(北)두칠성에 의(依)지하여 집안이 번창했다는 뜻에서 의북정(依北亭)이라 이름을 붙였다. 물론 세월이 흘러 의북정은 없어졌지만, 일곱 개의 바위들에는 지금도 한자 이름이 각각 뚜렷하다.
그 이후 동네에는 칠성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사람들은 칠성바위를 매만지면서 아들 낳기를 빌었다. 그렇게 하면 아들이 태어나고, 또 출세도 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칠성바위는 토속신앙의 현장이 된 것이다.
경북대에서 나와 경북도교육청 왼쪽의 산격동으로 들어서면 ‘서원길’이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연암산 정상부의 귀암서원으로도 가고, 서쪽 끝에 있는 와 서명보 효자각으로도 가는 길이다. 용담재는 임진왜란 의병장 서사진(徐思進)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서씨 문중에서 세운 건물이다. 1802년에 세워진 서명보효자각은 용담재 바로 뒤에 있고, 귀암서원의 핵심 시설인 숭현사(崇賢祀,)는 서원 경내 가장 높은 곳에 있다.
귀암서원은 서침(徐沈) 선생을 제사 지내는 서원이다. 서침 선생은 세거지(世居地)인 달성(달성공원 일대)을 정부 땅과 바꿔주면 후손들에게 대대로 혜택을 베풀겠다는 조정의 제안이 들어오자, 그 대신 대구사람들이 정부에 빌렸다가 갚아야 하는 환곡(還穀)의 이자를 대폭 줄여달라고 청함으로써 가난한 민중들을 살린 ‘실천하는’ 선비였다.
사람들은 그를 기려 1665년 연귀산(현재의 제일중 언덕)에 귀암서원을 세웠다. 그 후 서원은 1995년 지금의 자리로 이건(移建)된다. 또, 달성공원에 가면 서씨유허비와 ‘순종나무’ 사이에 울창하게 치솟아 있는 회화나무 한 그루를 볼 수 있는데, 나무에는 ‘서침나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다.
흔히 ‘무태’라고 부르는 서변동과 동변동 일대는 산격동 연암공원에서 내려다보이는 금호강 건너편 땅이다. 동화천은 이 무태땅을 서변동과 동변동으로 나누면서 금호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동화천과 금호강의 물이 만나는 일대를 살내(箭灘)라 한다. 왕건과 견훤 양쪽 군사들이 날린 화살[箭]이 시내[灘]처럼 흘러다닌 데 기인한 이름이다. 무태(無怠) 역시 마찬가지이다. 왕건이 군사들에게 게으름[怠]이 없어야[無] 한다고 훈시한 곳이라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서변동은 대구에서 처음으로 신석기 유물이 많이 발굴되어 역사적 명성을 얻은 곳이다. 그 덕분에 ‘선사 유적 전시관’이 세워졌다. 예약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고, 어른들 보기에는 내용도 이름만큼 충실하지 못하지만, 본디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어 꾸몄기 때문에 교육적 답사지로는 제격이다.
그 밖에, 서변동에는 여러 채의 옛 건물이 있다. 임란 의병장 태암(苔岩) 이주 선생을 모시는 환성정, 고려말의 충신 송은(松隱) 구홍 선생과 그의 8세손 계암(溪岩) 구회신 의병장을 기리는 송계당 등이 바로 그것이다. 동변동에도 구씨 좌정승파 재실인 화수정이 높은 곳에 우뚝 서 있어 지나는 이의 눈길을 끈다. 서변동에 이런 고택들이 많은 것은, 신석기 유물 대거 출토에서도 짐작되듯이,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일 듯하다. 금호강과 동화천이 만나는 지역이라 너른 들판이 있고 물 사정이 좋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신석기 유적에서부터 조선시대 옛집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자취’가 많이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변동과 팔달교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산을, 함지박을 뒤엎어 놓은 것과 닮았다고 하여 흔히 ‘함지산’이라 부른다. 속칭으로는 ‘방티산’이라고도 한다. ‘방티’란 큰 대야를 일컫는 대구 사투리이니, 대략 함지박과 비슷한 뜻으로 읽을 수 있겠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노곡산성 때문이다. 노곡동 뒤편에 있기 때문에 보통 노곡산성이라 부르는 팔거산성이 바로 함지산에 있다는 말이다. 1849년(헌종 15)부터 1851년(철종 2)까지 2년 동안 대구판관으로 재직했던 서유교(徐有喬)가 사재를 털어 팔달진(八達津)에 돌다리를 놓기 이전까지 사람들은 노곡동 앞 금호강을 건너 칠곡을 경유하고 상주를 지나 한양으로 다녔으니, 결국은 이 일대가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신라 시대부터 함지산에는 노곡산성이 축조되었던 것이다.
노곡동은 무태에서 금호강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면 나타난다. 노곡동은 좌우가 산에 에워싸여 있는 특이한 마을인데, 마을 입구에 선 채 고개를 들면 오른쪽 산비탈로 올라가는 임도가 바로 보인다. 임도 아래에 있는 집이 사육신 때의 김문기 선생을 기려 지은 태충각(泰忠閣)이다.
태충각 뒤를 지나 계속 걸으면 등산로는 노곡산성까지 이어진다. 길이 중간쯤에서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산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하산부터 하고 다시 등산을 하는 묘한 기분을 맛볼 수 있다. 그 탓에 땀이 마지막에 솟는다.
그렇게 산정에 오르면 예비군 훈련용 잠복 초소들이 곳곳에 파여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초소들은 이곳이 아득한 옛날에도 산성이었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짐작하게 해준다. 이제 숨을 좀 고른 뒤 천천히 좌우를 둘러보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제외한 나머지 삼면은 하나같이 경사가 보통이 아니다. 적군이 감히 올라올 마음조차 먹기 어려웠을 험악한 절벽길이다. 노곡산성은 천혜의 요새였던 것이다.
쇠락한 공장지대의 낙조는 어떤 모습일까
비록 노곡산성이 해발 300m에도 미치지 못하는 높이에 있지만, 아침에 경북대학교 박물관을 둘러보고 오는 여정이었던 관계로 어느덧 날이 저물어가고 있다. 이제는 아침부터 기다렸던 침산(砧山, 미주1 참조) 낙조를 감상할 차례이다.
사실 노을은 두 발을 딛고 선 곳이 바다에 붙었거나, 굽어 도는 강줄기를 바라볼 수 있는 정자이거나, 아니면 첩첩으로 이어지는 산능선을 내려다보는 전망대라야 최고의 황홀경을 만끽할 수 있다. 하지만 침산 아래 팔달교 방면은 이미 도시화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쇠락한 공장 지대이다. 노을의 찬연한 빛을 제대로 반사할 수 있는 평화의 땅이 아니다. 지평선도 수평선도 볼 수 없는 침산 꼭대기에 올라 서쪽의 와룡산 방향을 응시할 때, 과연 눈앞에는 어떤 노을이 떠오를 것인가.
의구심으로 마음은 무겁지만, 그래도 일편단심 침산을 오른다. 이윽고 해가, 노원동 공장 지대의 머리 위에 솟아 있는 와룡산 너머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옛날 문헌에 나오는 만큼 장관은 못 되지만, 대도시 한복판 공장 지대에서 이보다 더 멋진 황혼을 보겠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 법하다. 만약 노원동 일대가 아직도 벼와 보리 같은 곡물로 가득한 평야지대라면 대단한 황혼의 빛깔을 볼 수 있겠다 싶은 아쉬움이 펄펄 샘솟는다. 지난날의 선조들이 침산 만조(晩照)의 아름다움을 왜 그리도 상찬했는지 저절로 헤아려진다는 말이다.
바람은 점점 세차게 불어온다. 주위에 아무런 바람막이가 없으니 별로 높지는 않아도 침산 정상의 겨울 삭풍은 이렇게 매서울 수밖에 없다. 부랴부랴 아래로 내려와 바위 표면에 새겨져 있는 서거정의 시를 급히 읽기 시작한다. 하지만 문득 몰려온 어둠에 묻혀 글자는 홀연 바위 속으로 아득히 사라진다.
水自西流山盡頭 물줄기 서로 흘러 산머리에 닿고
砧巒蒼翠屬淸秋 침산의 푸른 숲은 가을 정취 더하네
晩風何處春聲急 저녁 바람 타고 오는 방아 소리는
一任斜陽搗客愁 노을에 젖은 나그네 시름 애끓게 하네
미주1 :옛날 금호강과 신천이 만나는 지점에는 희고 고운 모래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고 해서 백사벌(白沙伐)이라 불렀는데, 뒷날 발음하기 쉽게 ‘백사부리’로 바뀌었다. 침산과 연암산에서 각각 유물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백사부리 옆의 산비탈에는 선사시대 이래 사람이 살았고, 그들은 이곳에 와서 빨래를 했다. 산 아래에는 빨랫돌[砧]이 많았다. 그래서 산 이름이 침산(砧山)이 되었다.
침산을 더러 오봉산(五峰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이름은 대구읍성을 파괴한 친일파 박중양이 침산을 사들여 개인 땅으로 삼고는 ‘봉(峰)우리가 다섯[五] 개 있는 산’이라며 붙인 것이니 당연히 버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