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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정보
사랑가. 33.4cm x 21cm, 캔버스에 아크릴릭. 2013년 작
좋은 그림 나쁜 그림
아끼는 제자로부터 예술에 관한 많은 의문과 고민이 담긴 메일이 왔다. 요약하면 좋은 그림과 나쁜 그림의 기준을 어디서 찾아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내가 좋아서 그리는 그림이 주변 사람들에겐 미의 기준에 어긋나는 나쁜 그림으로 보인다면,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그리는 게 옳은지, 그렇다면 예술가의 사회적 책임은 어느 지점에 세워야 하는지 혼란스럽다고 했다.
나는 우선 무엇보다도 일단 내면의 진실의 소리를 쫓아가는 게 좋은 그림을 그릴 가능성이 클 것이라고 했다. 누구나 알아볼 수 있다는 이유로 눈에 비치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느껴지는 대로 그리는 것이 창조와 소통하는 상상력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감성이 있다 해도 고민 없는 묘사는 상상력과 비젼의 문제에서 한계에 부딪히고, 사유는 있다 해도 감동이 없는 추상도 공허하기는 마찬가지다. 창조란 눈에 보이는 현상들을 넘어 새로운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실 예술은 익숙하게 보이는 것들에 적응된 사람들에겐 처음에는 이상하게 보이거나 아예 가려져 외면되기 일쑤다. 천재들에겐 몰이해와 냉대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문화지수와 경제지수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으므로 예술가는 경제적 궁핍을 한탄하거나, 그 보상심리가 계산되어 예술가는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지적 엘리트의식도 버려야 할 것이라고 답했다.
예술가의 사회적 책임을 예술이 특별하다는 오해를 전제로 하지 말고, 한 사회의 집단생활 속 역할분담에서 찾아보자고 권했다. 이발관, 경찰서, 학교, 세탁소 등이 필요하듯 화실도 필요한 것이며, 그들 모두가 자신들이 소속된 역할에 전문성을 키워나갈수록 사회 구성원 전체 삶의 질을 높이고 행복해지듯, 화가의 전문성도 그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좋은 그림과 나쁜 그림은 대중의 기호와 취향이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므로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원하는 쪽으로 타협할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스스로의 예술정신의 울림에 얼마나 솔직하고 진지하게 반응했느냐의 결과물 자체가 결정하는 것이고 그다음 문제가 그것을 대중들에게 이해시키는 일에 또한 얼마나 부지런했으며, 그래서 궁극적으로 소속사회의 문화의식을 아주 조금씩이라도 진전시켰느냐에 따라 좋은 예술가의 사회적 책임도 수행하는 것이지 않으냐고 되물었다.
그렇다면 예술가는 여전히 가난하거나 힘들게 살아야 하는가? 역사상 거의 대다수 예술가들은 그 길을 기꺼이 걸어갔다. 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그들은 예술을 고민했지만, 경제적 여건이 월등히 나아진 요즈음은 웬일인지 먹고 사는 일을 더 걱정한다. 게다가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이길 갈망하면서도 실제로는 남들처럼 성공하고, 남이 하는 것처럼 행하고 남이 이룬 것처럼 성취하는 일, 즉 지극히 평범한 무리 속에 편입되겠다고 일생을 허비하는 때도 허다하다. 그래서 지금 예술의 언저리를 맴돌며 고민하고 방황하는 이들 모두가 정신세계를 진전시키는 고난을 감내하고 말고는 결국 순전히 자기 자신의 몫이며, 설혹 자신의 내면의식과 사유가 가능한 지점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해답은 그것을 일생을 걸고 행할 수 있는 신념과 용기에 달린 것이라고 적었다.
다만 그런 기본적인 것조차 외면하면서 예술가 인체 패거리문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서둘러 좀 더 솔직하게 자신의 주변부터 둘러보아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마지막 줄까지 쓰고 나니 나부터 등줄기가 서늘해짐은 피할 수 없는 양심의 소리인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