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날] 어느 날의 일기 - 뉴스민
뉴스민 로고
무제 문서
뉴스 오피니언 기획/특집 지역광장 사진/영상 주말판 노는날  
 
뉴스홈 > 기획·특집 > 노는날 > 이영철 칼럼
뉴스관리툴 2013년05월11일 02시29분    
글자크기 글자크기 크게 글자크기 작게 기사내용 이메일보내기 뉴스프린트하기 뉴스스크랩하기

[노는날] 어느 날의 일기
하나와 혼자

이영철(화가) grim-si@daum.net

▲돋보기 버튼을 누르시면 큰 화면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작품정보
어느 날의 일기, 72.7cm x 60.6cm,캔버스에 아크릴릭

하나와 혼자

소백산맥 아래 추풍령 골짜기에서 자란 나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기차 편으로 시내까지 통학했다. 선친이 철도공무원이셨던 까닭에 가족들에게는 철도 패스라는 증명서가 있어서 한 달에 약 보름 정도는 특급열차까지 무료 승차가 가능했는데, 70년대에 청소년기를 맞이한 시골소년의 본격적인 기차여행은 그런 혜택과 타고난 호기심이 겹쳐져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방과 후 일주일에 한두 번씩 나는 무작정 역으로 달려가 시간표부터 체크했다. 그리고 개찰이 진행 중인 상 하행선 열차를 탔다가 어느 역에서 되돌아오면 집으로 가는 마지막 완행열차와 갈아타기가 적당한지 가늠해 본 후 주저 없이 아무 열차에나 올랐다.

수업이 일찍 마치는 날에는 당연히 여행의 거리도 길어졌고, 탔던 기차가 연착해 집으로 가는 막차를 놓치는 날이면 출발역으로 돌아온 후 시외버스를 타고 30여리를 가다 중도에서 하차해 외진 산길을 20 리 정도 더 걷고 달려서 귀가했다. 그래도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차창 밖으로 스치던 풍경들의 숨 가쁜 속도감과 객차 맨 끝 칸 너머 현기증 나게 밀려가던 생생한 원근감, 그리고 레일과 구르는 바퀴가 일정하게 주고받는 덜컹거림의 유혹은 부모님의 꾸지람이나 어두운 산길을 혼자 걷게 되는 불안함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당시 나는 사람은 결국 ‘혼자’라는 묘한 외로움을 서서히 눈치채던 시기였다.

여행의 습관은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자전거 통학으로 잠시 주춤했지만, 방학을 이용해 경북선과 경전선, 전라선으로 반경을 넓혀나가다 대학시절에는 중앙선, 동해남부선, 태백선, 장항선으로, 그리고 사회에 진출한 후에는 멀리 유레일로 확장되었다. 기차와 함께한 일몰과 일출, 눈보라와 비바람, 태양과 구름, 안개 등에 섞인 풍경이 잘 익은 옥수수 알갱이처럼 추억으로 박혀 있고 그 속에서 만난 잊지 못할 인연들도 수없이 많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외로움의 면적도 여행의 거리만큼 넓고 커졌다. 어디를 가나 사람이 살고, 어디에서나 인생은 고달프고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여행을 다니노라면 혼자인 것이 만만해 보인 탓에 괜히 시비를 걸어와 괴롭히는 형들도 있었다. 간암 말기의 판정을 받고도 돌아갈 집도 없어 눈물 흘리던 아저씨도 보았다. 시든 나물 한 보따리 껴안고 새벽 장터로 가시던 할머니, 가출해 다방을 전전하느라 시든 꽃처럼 파리해진 누나뻘 되는 여인의 모습도 추억 속에 섞여 있다. 파리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밤기차 안에서 나와 영어실력이 비슷한 이집트 청년을 만나 밤새 짧은 단어에 손짓, 발짓을 비비고 섞어가며 많은 대화를 나눈 기억의 끝에도 고단한 인생의 긴 그림자를 보았다. 존재는 왜 결국 혼자일까? 그 질문에 무거워진 나의 청년 화가 시절은 그림도 그렇게 심각한 질문들로 가득했다.

사실 나뿐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혼자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불행은 불행 자체보다는, 불행하다는 생각 때문에 진짜 불행하다고 한다. 혼자라는 것도 또한, 혼자라는 생각 때문에 더 힘들고 소외되어 궁극적으로는 버려졌다는 마음을 들게 한다. 이 상황이 확장되면 스스로 자신까지 버리는 일도 자주 발생하는 것이다. 얼마 전 봄의 문턱에서 세상을 등진 지인이 남긴 마지막 메모 역시 ‘나는 혼자다..’였다. 이처럼 스스로 혼자라는 마음의 감기에 감염이 되면 작은 자신의 방조차 점점 커져 보이고, 외로움과 고독감, 소외되고 불행하다는 부정적인 감정의 싹들이 자라 금방 마음의 들판을 가득 채운다. 나의 여행 일기 전반기도 이처럼 혼자 세상을 본다는 은밀한 즐거움을 지나 결국 모든 것이 혼자라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예각 화 되었었다.

그러나 그 후로도 기차여행은 계속되었고 세상을 보는 눈과 생각이 서서히 긍정과 희망으로 바뀌면서 지나간 기억 속의 여행 이야기도 새롭게 다가왔다. 나를 괴롭히던 그 형들도 내가 그림을 그린다고 하자 한결 너그러워졌었다. 간암 말기 아저씨에게 안타까운 마음에 ‘안녕히 가세요!’ 라고 해드린 말이, 그날 집으로 잘 들어가시라는 것이었는데, 어차피 돌아가실 거라면 편히 눈을 감으라는 뜻으로 들으셨을 거라고 스스로 자책하던 묘한 죄책감도 나아졌다. 그 다방 누나도 늦은 밤기차 안에서 낯선 동생 하나를 만나 잠시 하소연하며 위로가 되었을 테고, 이집트 청년은 고단한 노동자 생활 중에 뜻밖의 이국인을 만나 참 유쾌해하던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같은 일을 겪고 나서 전혀 상반된 세상을 보게 된 것은 내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기차여행을 계속하다 보니 늘 생전 처음 가본 곳, 처음 먹어보는 음식과 사람들, 즉 미지의 세상에 대한 동경의 능선을 지나게 되었고, 결국 인간은 한자리에 있어도 평생 똑같은 것을 두 번 보고, 두 번 먹거나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 집과 가족, 나는 늘 여기에 있으니 돌아올 곳이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내 외로움의 정체도 그런 착각 속에서 발아한 오해였다. 그러나 같은 땅에서도 내 집이 여러 번 바뀌었고, 늘 함께 있을 줄 알았던 가족도 흩어지고 떠나갔다. 돌아갈 곳은 추억 속일 뿐 미지의 것도, 확실한 것도 없는 것이 인생이다. 나는 그 지점에서 혼자라는 마음을 극복하고 존재는 ‘하나’라는 자각을 했던 것 같다.

하나뿐인 존재, 하나뿐인 인생, 하나뿐인 사랑, 우정, 인연... 이처럼 하나뿐인 것은 모두가 귀하고 소중하다. ‘우리는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몸 담글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존재는 태어나고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그 모든 것이 시간의 열차를 타고 단 한 번 지나가는 여행이다. 돌아올 곳이 없는 여행이라고 혼자인 줄 알고 외로워만 할 것이 아니라 차창 안과 밖을 스쳐가는 단 한 번뿐인 풍경과 사람들을 온몸으로 만나고 사랑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뿐인 고귀한 삶을, 혼자일 뿐이라고 함부로 내팽개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나부터 사랑하고 이 세상 모든 존재가 똑같이 동등한 하나로 만나 서로 배려하고 교감하는 세상을 꿈꾸며, 아련한 아날로그 추억 속으로부터 디지털 세상 한가운데로 따사로운 햇살처럼 화가의 기차도 부지런히 달리고 있다.

이영철(화가) grim-si@daum.net

ⓒ 뉴스민 (http://www.newsmin.co.kr).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보도자료 newsmin@newsmin.co.kr

 
[노는날] 사랑꽃
[노는날] 어머니의 일기장
[노는날] 꽃 밥
[노는날] 어떤 오후
[노는날] 화가의 음악듣기
[노는날] 사랑한다고 말 하고 싶었다
[노는날] 호기심
[노는날] 꿈꾸는 가로수
[노는날] 첫사랑
[노는날] 사랑의 향기
[노는날] 사랑예감
[노는날] 봄 소녀
[노는날] 꽃문
[노는날] 어느 하루
[노는날] 봄을 기다리는 남자
[노는날] 자연 이야기
[노는날] 동화-길고양이의 꿈
[노는날] 노랑머리 소녀
[노는날] 봄소풍-연인
[노는날] 사랑가
[노는날] 꽃편지
[노는날] 초록 일기
[노는날] 분홍이
[노는날] 친구-삐짐!
[노는날] 마음 소풍
[노는날] 또 다른 동행
뉴스스크랩하기
이기자의 다른뉴스보기
이영철 칼럼섹션 목록으로

이름 비밀번호
 86831524  입력
다음기사 : [노는날] 꽃편지 (2013-06-08 01:00:14)
이전기사 : [노는날] 사랑꽃 (2013-04-27 00:28:04)
많이 본 기사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최근 기사
열악한 대구 시민 복지…”복지기준선 필요...
낙동강, 맹꽁이 사라지고 큰빗이끼벌레만
청도 송전탑 공사 강행 1년, 피해 주민 “...
중구청, 대구 지자체 중 비정규직 비율 1위
국가는 유령이다: ‘유일자(唯一者)’ 막스...
“학교 급식인원 감소 예상된다”며 조리원...
민주노총 대구본부, ’10월 항쟁’ 답사 진...
삼평리 주민과 연대자, 송전탑 넘는 넝쿨이...
노조탄압 논란 ㈜오토..."시급 5,270원 알...
그리스에 대해 프랑스인들이 보여주는 열정...
뉴스민 하단메뉴
하단구분바

사단법인 뉴스민 | 등록번호 : 대구 아00095(2012.8.24) | 발행인 : 노태맹 | 편집인 : 천용길
창간일 : 2012.5.1 |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당동 72-18 노동복지회관 2층뉴스민
TEL : 070-8830-8187 | FAX : 053)211-4719 | newsmin@newsmin.co.kr

뉴스민RSS정보공유라이선스정보공유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