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피터 싱어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생으로 세계적인 실천윤리학의 거장이자 동물해방론자로 널리 알려졌다. 현재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생명윤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옮긴이 최정규는 경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이다.
어울리지 않는 듯한 두 단어, 다윈주의와 좌파를 연결한 제목은 철학자인 지은이와 경제학자인 옮긴이의 조합만큼이나 흥미를 유발한다. 더욱 재미있는, 진화 이론에서 자연선택만을 강조하는 것이나, 이를 인간에게 적용하는 사회생물학이나 진화심리학 등에 대해 조심스러운 굴드(Stephen Jay Gould)가 아니라 반대로 적극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을 옹호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가 이 책을 추천하였다는 것이다.
공산주의 몰락에 관한 여러 시각이 존재하지만, 지은이는 마르크스주의를 자처했던 정부들의 몰락이 마르크스가 인간 본성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둔다.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 중 여섯 번째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인간 본성이란 각 개인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다. 현실에서 그것은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이다.”라고 했다. 즉 우리가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를 완전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면, 인간 본성 또한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몰락했고, 사민주의 정당들과 노동조합 운동이 약화한 시점에서 좌파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받고 있다. 저자는 좌파를 부활시킬 수 있는 새로운 사상 체계를 세울 수 있으리라 믿는데, 그러기 위해 좌파들은 이제 우리 인간들이 진화해온 동물이라는 사실, 그리고 우리 육체와 DNA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동까지도 유전적인 기초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신중히 고려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다윈주의에 대해 좌파들이 범한 실수
자 이제 본론의 내용을 살펴보자. 다윈은 자신의 작업에서 윤리적 함의를 도출하려는 시도를 거부했다. 그러나 강자는 약자를 넘어뜨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진화론을 이용하는 사고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미국의 자본가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이는 자유방임 자본주의 옹호자들이 정부의 간섭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지적인 토대를 제공하게 된다.
다윈주의를 이해함에 있어 좌파들이 범했던 불행한 실수는 다윈주의에 대한 우파들의 이해 방식, 즉 다윈주의적 생존투쟁을 데니슨의 유명한 구절인 “이빨과 발톱 속에서 피로 범벅된 자연”이라고 이해하는 관점을 좌파들이 그대로 받아들였다는데서 출발한다. 좌파가 다윈주의적 생존투쟁을 무자비한 경쟁으로 해석하여 이해해왔다고 해서 이들을 탓할 수는 없다. 1960년대까지 진화론 내부에서조차도 상호 협조가 개체의 생존 가능성 및 번식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도,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도 인간에 대한 다윈주의적 함의를 해부학적이고 생리학적인 것에만 국한한다면, 종의 기원에 대한 다윈의 설명에 대체로 동감해 왔다. 당시 신의 창조라는 기독교적인 해석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진화론이었으므로 다윈의 대담한 가정들은 ‘인민의 아편’의 장악력을 부술 수 있는 수단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역시 진화해온 존재이고 그러므로 진화이론이 자연의 역사뿐 아니라 인간사회의 역사에도 적용된다면,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본 적대와 갈등들-‘인간과 자연 간의 적대, 인간과 인간 간의 적대’ 그리고 ‘개체와 전체로서의 종간의’ 갈등-은 완전하게 해결될 수 없게 된다. 갈등 해결이라는 역사적 난제는 이러한 적대가 우리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경제적 토대의 산물일 때만 해결될 수 있다. 다윈주의적 사상을 사회적 영역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좌파들의 단호함은 여기서부터 나온다.
지은이는 우리에게 마르크스가 가졌던 직관을 포기하라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직관을 보다 큰 그림 속에서 작은 부분으로 위치시키길 것을 주문한다. 한 사회 생산양식의 변화는 지배적인 사상과 문화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생산양식의 변화가 가져온 차이점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변하지 않은 다른 것들을 무시하는 것은 사실의 한쪽 면만 보는 것과 같다. 이제 생산양식이 우리의 사고, 정치, 의식을 변화시키는 방식이 우리의 생물학적 전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가 되었다.
어떤 행동들이 인간의 본성에 고정된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행동들이 인간의 본성에 고정된 것인가?’ 라고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된다. 피터 싱어는 여러 문화 사이에서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는 행동 유형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고 한다. 그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 친족에 대한 우리의 관심, 협조적인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의도, 그리고 상호 의무를 인지하는 것 등을 예로 들었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위계 혹은 신분제도의 존재도 거의 보편적인 경향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사회적 지위상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인간 사회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한 차이를 폐지하려는 시도가 진행되더라도 차이는 곧바로 재등장하고 만다. 마지막으로 성 역할도 문화에 따라 거의 차이를 나타내지 않는 예가 된다. 물론 우리 인간 본성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행동 경향성조차도 문화에 의해 영향받는다. 그리고 개별 인간들 사이에서도 차이가 존재한다.
인간 본성에 대해 눈감는 것은 정말 위험하다. 위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인간은 많은 경우 위계를 형성하려는 경향을 갖게 된다고 이야기할 때, 우리 사회가 위계에 기반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이야기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어떤 특정한 형태의 위계를 제거한다고 해서 우리 사회에서 위계 일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님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위계를 형성하려는 경향을 인간 본성에 내재한 어떤 것으로 보게 되면 비로소 우리는 소련의 등장 이후 왜 평등주의가 그렇게도 빨리 사라지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과거의 경험이 위계가 정당하다거나 바람직하다거나 혹은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위계를 철폐하는 것은 과거 혁명가들이 상상했던 것만큼 쉬운 일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바로 이것이 좌파들이 움켜쥐어야 할 부분이다.
경쟁과 호혜적 이타주의에 대한 진화심리학적 관점
근대 다윈적 사고는 경쟁과 호혜적 이타주의를 모두 포괄한다. 시장경제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함으로써 스스로의 경제적 이익을 증진시킬 수 있을 때, 열심히 일할 것이라는 생각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경쟁적인 사회가 가장 잘 작동될 때조차도 이 체제가 우리의 본성과 공동의 이익을 조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익을 더 넓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우리의 본성이 갖는 개인적이고 경쟁적인 측면에 덧붙여 사회적이고 협조적인 측면 위에서 우리의 이익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가진 또 다른 측면의 본성인 호혜적 이타주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어떤 사회도 어느 정도는 경쟁적인 경향을 갖고 또 어느 정도는 협조적인 경향을 갖게 마련이다. 이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두 경향성 사이의 밸런스를 맞추는 것은 가능할 것 같다. 협조적인 사회는 경쟁적인 사회에 비해 좌파적인 가치를 좀 더 많이 보존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협력하려는 성향이 우리의 본성에 내재하고 있음을 진화심리학적으로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지 살펴보자.(이 부분은 D. Buss의 <진화심리학/이충호 옮김,최재천 감수>을 부분적으로 인용하고자 한다.) 상호적 이타성의 문제는 ‘죄수의 딜레마’라는 게임과 비슷하다. 죄수의 딜레마는 함께 저지른 범죄 때문에 붙잡혀 유죄를 받을 것이 확실시되는 두 사람이 등장하는 가상의 상황이다. 두 죄수는 서로 대화를 나누지 못하게 각각 다른 방에 갇혀 있다. 경찰은 두 사람을 심문하면서 서로 상대방을 배신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만약 두 사람 다 상대방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하면, 경찰은 증거 부족으로 두 사람을 다 풀어줄 수밖에 없다. 이것은 협력 전략으로, 죄수의 관점에서 볼 때 두 사람 모두에게 최선의 전략이다.
그렇지만 경찰은 두 사람에게 서로 상대방을 배신하게 하려고, 만약 범죄를 자백하고 상대방도 공범이라고 이야기하면 자백한 사람을 석방하고 보상금도 약간 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만약 둘 다 자백하면, 두 사람 다 처벌을 받고 징역형을 살아야 한다. 만약 한 사람만 자백하고 한 사람은 자백하지 않는다면, 자백하지 않은 사람은 두 사람이 다 자백했을 때보다 더 무거운 처벌을 받는다. 이 상황에서 죄수 각자에게 가장 유리한 결정은 무조건 배신(자백)하는 것이다(상대방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전혀 알지 못한다고 가정할 때). R.엑설로드와 W.D.해밀턴은 컴퓨터를 이용하여 이 상황을 200회 반복했을 때, 어떤 전략이 죄수 각자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을 초래하는지 연구하였다. 그들은 처음에는 협력하고, 만약 상대가 협력하면 계속 협력하고 만약 상대가 배신하면 똑같이 배신하는 전략이 가장 유리한 전략이라는 결과를 얻었다(tit for tat, TFT). 트리버스는 이 전략에 ‘조건부 호혜성’이라는 적절한 이름을 붙였다.
보다 협조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좌파의 고민
보다 협조적인 사회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할 때 좌파들은 바로 이 액설로드의 작업으로부터 뭔가를 얻을 수 있다. 액설로드의 발견은 서로에게 이득을 주는 협조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던 오랜 애착이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을 우리가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생물학과 사회적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 예를 가지고 있는 셈인데, 이는 다윈주의적 사고방식이 단기적인 이기심을 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줄 수 있다.
우리는 이제 협조 행위가 번성할 수 있는 조건들을 찾아보아야 한다. 첫 번째 해결해야 할 문제는 집단 내지는 사회의 규모 문제이다. ‘TFT’ 전략은 한 번 만난 사람을 다시 만날 가능성이라곤 거의 없는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절대 살아남지 못한다. 서로서로 너무도 잘 아는 농촌마을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규범으로 성립된 타인에 대한 배려가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잘 지켜지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 사회는 점점 대규모화하고, 또 인구 이동도 잦아지는 경향이 있고, 전 세계 경제로의 세계화에 휩쓸리고 있는데, 이때 익명성을 극복할 방법은 있는가? 둘째, 당신이 뭘 하든 당신의 행동이 내게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TFT'전략은 유효하지 않다. 부와 권력에서의 불평등이 커지면 그만큼 상호 부조를 할 유인이 없어지게 된다. 과거 수십 년 동안 경제적 불평등이 꾸준히 증가해온 선진국들에서 경제적 불평등의 증가 경향에 대한 뭔가 조치를 해야 할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피터 싱어는 마지막 장인 ‘오늘날 다윈주의 좌파의 숙제’에서 이전의 좌파적 전망으로부터 다윈주의 좌파를 구분 지어줄 수 있는 몇몇 특징들을 간략하게 묶어 정리하였다. 그는 그것을 거품을 뺀 좌파의 모습이고, 좌파가 일찍이 가졌던 유토피아적 사고를 버리고 실제로 어떤 것이 성취 가능한지에 대한 냉철한 현실적 비전으로 대체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할 수 있는 최대한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킨스의 말 “우리는 유전자의 조종을 받는 기계에 불과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창조자들에게 등을 돌릴 힘을 가지고 있다”를 인용하면서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