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은 누가복음 저자가 연속해서 쓴 책이다. 단지 당시 성경을 기록한 파피루스 두루마리 길이제한 때문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따로따로 쓸 수밖에 없어서 분리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약성경 목차에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사이에 요한복음이 있는 것을 보는 원저자는 당혹스러울 것이다. 자기의 저술의도를 분리해 버렸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을 읽을 때는 누가복음의 연속선에서 읽어야 저자의 본뜻에 가까이 갈 수 있다. 사람이 자기 환경을 벗어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아예 불가능하다. 혈연적 조건, 물리적 환경, 정신세계에 영향을 끼친 사회문화적 환경은 그대로 나를 만드는 결정적 조건들이다. 이 원칙을 개인을 넘어 한국사회에 적용한다면 어떤 조건이 우리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가? 무엇보다 분단체제가 결정적이다. 분단세월이 오래돼서 사람들이 잊고 사는지는 몰라도 분단이 우리 삶을 결정적으로 좌우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한국사회 이념논쟁이나 경제양극화, 세대 갈등 양상들을 원인 추적해 보면 모두 분단에 맞닿아 있다.
그런데 분단체제에 대해 다수가 공유하는 정서가 있다. '미국은 선하고 북한은 악하다'이다. 그 말이 옳든 그르든, 그것이 지배세력의 세뇌공작이든 자발적 의식이든 관계없이 그렇게 돼 버렸다. 그래서 다수와 반대되는 소수목소리는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한다. 정권을 잘못 만나면 당장 국가보안법 혐의로 올가미를 쓴다. 민주공화국에서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에 기반을 둔 행위조차도 하나하나가 감시와 판단의 대상이 되고 만다.
이런 비정상적인 사회현상을 돌파, 해결하는 길은 무엇인가? 천상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로 가는 수밖에 없다. 아니면 우리 민족은 영영 분단체제 사슬 하에, 분단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다.
왜 분단체제 이야기로 서론을 까는지 아시는가? 오늘 성경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상황이 분단체제에 매여 있는 우리 상황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은 대단하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자각은 나라를 잃고, 수 천 년 디아스포라가 돼도 민족이 공중분해 되지 않고 살아남은 저력이다. 그 선민의식의 결정적 증표는 할례이다. 할례는 '우리는 너희와 다른 거룩한 족속이다'는 집단의식의 신체화이다. 이 할례가 안식일준수, 정결례 등 여러 율법으로 세칙화됐다. 이 전통과 관습은 너무도 뿌리 깊어서 예수 제자들이 유대인에서 유대그리스도인이 되어서까지 그들을 지배하는 강한 구속력이 됐다.
그 강한 구속력이 복음선교가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으로 확장되는 시기에 매우 중요한 장애가 됐다. 오늘 성경이야기가 사도행전 11장인데, 10장의 연속이다. 그래서 10장 이야기를 압축 요약하겠다.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라는, 매우 경건한 로마군대 백부장이 기도하다, 환상 가운데 천사를 만난다. 천사는 욥바에 있는 무두장이(가죽다루는일) 시몬의 집에 묵고 있는 베드로를 데려오라고 한다. 지시를 받은 고넬료는 수하를 보내서, 욥바에 거의 당도할 즈음에, 베드로도 역시 낮기도 중 환상을 본다. 보자기같이 생긴 그릇에 온갖 짐승이 담겨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데, "잡아먹어라"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베드로는 단호하게 그 말씀을 거부한다.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속되고 부정한 것은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괜찮다. 먹어라" 베드로는 "안됩니다. 먹을 수 없습니다"하는 실랑이를 세 번 하고 환상에서 깬다.
 |
| ▲베드로와 함께 왔든 할례 받은 신자들은 다른 민족 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다른 민족 사람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면서 하느님을 찬송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베드로가 말하였다. "우리처럼 성령을 받은 이 사람들에게 물로 세레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끼?' | | |
이 장면을 보라. 하나님이 말씀하는데도 베드로가 완강히 거부하는 것을 보면, 유대인들에게 율법관습이 얼마나 뼈속깊이 내장돼 있는지, 또한 유대그리스도인의 대표인 베드로 역시 유대인 관습에서 한 치도 벗어나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다.
베드로가 환상 내용에 대해 궁리하는 중, 고넬료의 수하가 도착하고, 동시에 성령이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지시한다. 그래서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갔더니 고넬료는 온 집안 식구와 친구들을 모아놓고 대기중이다. 그리고 한 말씀 청하니 베드로가 설교하는데,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린다.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내리는 것을 본 베드로와 일행은 매우 놀라서 "이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았으니, 이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그들도 세례를 받게 한다. 이상이 사도행전 10장 요약이다.
그리고 오늘 말씀, 11장으로 이어진다. 모두가 기뻐하는 매우 경사스런 일 일줄 알았는데 뜻밖의 복병이 출현했다. 예루살렘교회의 할례받은 사람들이 베드로를 나무라는 것이다. "당신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은 사람이오"라고. 이를 볼 때, 유대그리스도인들 의식에도 여전히 복음보다는 율법이 더 큰 작용을 하고 있음을 본다.
또한, 어디에나 새로운 변화를 알아차리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고 옛것만 고집하는 수구가 있음도 본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약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점에서는 진보 세력 내에도 약점이 많은 것과 도찐개찐이다. 그러니 무관심을 넘어서 관용적 태도가 절실하다. 무엇보다 교회의 막대한 물적역량이 수구 쪽으로만 배분되고, 진보세력은 골골하는 것을 개선하기 위해서라도.
할례받은 사람들이 자신을 나무라지만, 베드로는 발끈하거나 무시하거나 초간단 무성의로 대하지 않고, 성실하게 설명한다. 그 대답이 사도행전 10장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반복한다. 베드로는 세 가지 근거로 변호했다. 첫째는 자신이 천사의 환상을 보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성령이 그들을 만나라고 지시하셨다는 것이고, 셋째는 이방인 접촉을 혼자 한 게 아니라, 동행한 형제들과 함께했다고. 즉 임의대로, 마음대로 행동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고, 형제들도 충분히 상황을 공유했다는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을 본다. 비록 하나님이 이루신 위대한 역사일지라도, 공동체 식구들이 공감하도록 정당한 수단과 절차를 거쳐야 그 역사가 제대로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민주적으로 동의해야 하나님의 역사도 사람이 받아서 꽃피게 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수구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을 살펴보자. 그들은 베드로와 그 일행이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 집에 들어가서, 음식 먹은 일을 문제시했다. 하지만 본문사건에서 확인하듯이, 이방인에게는 더 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들도 성령을 받은 일이다. 그들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됐다는 말이다. 그런데 수구그리스도인들은 그 점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단지 유대인이 이방인과 접촉한 것만을 문제 삼는다. 이들의 시각이 매우 근시안적이고, 또 자기들의 기준에 싸여서 사물을 판단하는 모습이 꼭 오늘날 수구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어쩌랴. 그들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인 것을.
여기서 지혜로운 베드로는 할례자들의 문제제기를 충분히 해명하면서, 동시에 교회가 중요한 결단을 내리도록 안내한다. "내가 말을 하기 시작하니, 성령이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시던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11:15)
유대그리스도인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그들이 할례자여서, 자격이 되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조건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은총(선물)으로 성령을 받았다. 베드로는 바로 이 점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 주셨는데,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11:17)
베드로는 자신의 대표성,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조용히 뒤따라갔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듣고 할례자들은 잠잠하였고,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들에게도 회개하여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셨다"고 말했다.
복음이 유대그리스도인들을 넘어서 이방인에게 향하는 결정이 일방적이거나 강제적이지 않고,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무엇보다도 수구파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입으로 이 결정을 인정하였다. 어떤 일을 할 때, 반대자가 그 일을 인정하도록 결과가 매듭지어지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는가.
오늘 우리 세상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역사는 발전하는가, 정의는 살아있는가 하는 회의가 엄습한다. 대중들은 또 얼마나 변화에 둔한지. 그러나 하나님은 차근차근 일한다. 그 일에 내가 얼마나 협력하느냐가 관건이다. 부활신앙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부활 뜻 자체가 '일어나다' 이다. 하늘을 믿고, 역사발전을 믿고, 깨어 있는 대중들을 믿고, 거룩한 기운에 의지하여 서로 손잡고 함께 가자. 우리가 협력하는 만큼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