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측하건대, 우리나라 국민 10명 중 9명은 말할 것이다. “대구는 민주화운동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대구는 1960년 4월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2.28학생의거를 일으킨 민주화의 성지(聖)이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에게는 뇌리 깊숙이 ‘대구는 민주화 운동과는 관련이 없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각인되었을까. “마산” 하면 ‘김주열’을 떠올리면서, 어째서 “대구” 하면 4월혁명의 위대한 디딤돌이었던 ‘2.28학생의거’는 연상하지 않고 거꾸로 ‘군사 독재의 본거지’ 식으로 거꾸로만 여기는 것일까.
2.28대구민주운동은 ‘이승만 정권이 1960년 실시한 3.15 정․부통령 선거를 앞둔 2월 28일 야당 후보의 선거 유세가 대구 시내에서 계획되자 일요일인데도 학생들을 등교하도록 지시한 것이 발단이 된 사건으로 독재정권의 노골적 선거 개입에 항거해 경북고, 경북사대부고 등 대구 시내 8개 고교 학생 수백 명이 거리로 뛰쳐나왔고, 이는 4.19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조선일보 2005년 3월 2일)
 |
| ▲ 1962년 4월 19일부터 1989년 11월 14일까지 2.28의 최초 현장인 명덕로터리를 지켰던 2,28기념탑의 모습. 사진은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가 2010년 12월 30일에 펴낸 <2.28민주운동기념사업50년>에 실린 자료이다. | | |
1960년 2월 27일, 이승만의 자유당은 대구에서 대통령 선거 유세 대회를 열었다. 자유당은 관권을 동원하여 가구당 1명 이상씩을 강제로 유세장에 동원하였다. 이날은 토요일이었다. 다음날인 일요일, 이번에는 민주당이 유세를 열었다. 자유당은 학생들이 야당의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일요일인데도 대구 시내 공립 고등학교에 강제 등교령을 내렸다. <대구시사>의 기록을 보면 ‘자유당의 불법적인 지시가 내려지자 각급 학교에서는 이 지시를 철저하게 수행하였다.’
학교들은 갑자기 ‘임시 시험을 친다, 단체 영화관람을 한다, 심지어 토끼사냥을 간다’ 등의 어처구니없는 핑계를 대면서 학생들에게 등교를 강요했다. 학생들은 어린 자신들마저 정치도구로 희생하려는 어른들에게 분노하고 절망했다. 경북고 800여 명이 앞장을 서자 경북여고, 대구고, 대구상고 등의 고교생들은 물론 일부 중학생들까지 명덕네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는 이날의 의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자유당 정권의 간계를 파악한 학생들은 불의에 몸을 떨었고, 그 날 학교에 모인 학생들은 당국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자유당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는 집회로 바꾸어 궐기했고 (중략) 학생들은 당시 인구가 밀집했던 중앙통을 거쳐 경북도청과 대구시청, 자유당 경북도당사, 경북도지사 관사 등을 돌며 자유당 정권의 악행을 규탄했다. 숱한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어 고통을 받았고 (중략) 2.28의거는 광야를 불태우는 한 알의 불씨가 되어 들불처럼 번져갔고, 3.15 마산의거, 4.19 대학생 시위, 4.26 이승만 대통령 하야로 이어져 마침내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이 나라 최초의 민권 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했다. 2.28 대구학생 민주의거는 가난과 독재, 부정과 불의에 항거한 대구 시민정신의 표출이었고, 해방과 더불어 수입한 서양식 민주주의의 한국판을 선구한 사건이었다.
광야를 불태운 1960년 2월 28일의 대구 학생들
 |
| ▲ (배경) 당일 학생들의 시위를 보도한 신문 기사 (탑) 좌/경북고 교정, 우/대구고 교정에 각각 세워져 있는 2.28기념탑 | | |
2.28은 점차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갔다. 물론 그렇게 된 데에는 세월이 흘렀고, 시대가 변한 탓일 것이다. 또, 2.28기념탑을 ‘역사의 현장’인 시내 중심부 명덕로터리에서 외곽지인 두류공원으로 옮긴 ‘실수’도 상당히 부정적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대구 사람들’은 4.19의 도화선이 된 2.28을 시민들이 두루 기억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시민들은 대구가 우리나라 민주화의 ‘샘’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