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는 생강나무 꽃이, 길거리에는 산수유가 고개를 내밀었다. 지난 주 다녀 온 경주 남산에는 진달래도 얼굴을 선보였다. 어쩌면 저리도 봄의 전령사들이 때를 맞추어 나타난단 말인가. 모진 겨울을 이기고 나타난 생명의 집요함에 경외감을 넘어 무서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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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민주노총 노동과세계 변백선 기자] | | |
평택 쌍용차 고공농성 노동자들이 지상으로 내려오고 지상의 노동자들은 파업투쟁은 고사하고 복직투쟁 하기에도 세상이 버겁다. 경산에서는 왕따 당한 고등학교 학생이 목숨을 버리고 노동자들은 생명을 버리고 있는 이 시기에, 앞 다투어 피어나는 꽃들의 생명을 쳐다보기가 힘들다. 꽃들은 봄이면 어김없이 돌아오건만 생명을 버린 많은 사람들은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 꿈, 그것 꿀 수 있기나 한 것일까.
세상의 변혁을 꿈꾼다는 것은 오만한 생각이다. 혁명을 꿈꾼다는 것은 더 더욱 오만한 생각이다.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았어야 했다. 노동자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는 것은 애시 당초 불가능했던 것일까. 꿈, 그것은 산수유에게만 허락되었던 비밀이 아니었을까. 겨울에 죽었어도 다시 살아 돌아오리라는 생명의 약속은 자연만이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죽고 병들고 떠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세상이다.
힐링에 기대지 않고는 도저히 미쳐 죽을 것만 같은 세상이다. 턱 밑까지 차오르는 분노가 터지기 전에 분노가 힐링으로 재빠르게 대체되고 있다. 아프면 약을 처방해야 하는데 청춘이니 참으라 하고 국민이 모두 행복해질 것이라는 말이 마약으로 변하고 있다. 고통스러워도 영화, 드라마, 코미디로 위안을 받고 만다. 도처에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문화 기제들이 넘쳐난다.
모리오카 마사히로가 이를 두고 ‘무통문명론’이라 했던가. 오락산업, 종교, 대중문화, 복지담론이 시대의 고통을 외면하게 만들고 쾌락에 빠지게 만든다. 이빨이 아프면 허겁지겁 진통제를 찾듯이 고통보다는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인 것을 어쩌란 말인가.
자기와 놀아달라고 야옹거리는 고양이처럼 위로와 힐링을 갈구하는 시대에 인간 그 자체가 애완동물, 반려동물이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변혁과 혁명의 꿈, 그것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상처받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세상에서 상처를 덮고 갈 수도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라면 꿈,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자본주의는 우리가 꿈꿀 수 있는 객관적인 조건이다. 하지만 지상의 양식을 축내고 있는 우리는, 타자의 호주머니를 갈취하고 있는 우리는 꿈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혁명에 대하여, 변혁에 대하여 일설도 발하지 말라. 그것은 깨어나면 안개처럼 사라질 꿈일지도 모른다. 치졸하고 더럽고 악다구니 같은 자본의 세상에서 우리가 갈구하는 위로와 힐링은 그 때 뿐이다. 위로와 힐링은 다른 사람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찾아가는 것이다.
꿈 속에서 하늘을 자유로이 날다가 기쁨에 넘쳐 잠을 설쳐 깨어난 새벽, 레알한 현실이 아침을 기다린다. 오늘은 또 누가 죽고 오늘은 또 누가 해고당할 것이며 오늘은 또 누가 눈물을 훔칠 것인가. 꿈, 그것 꿀 수나 있는 것일까. 봄이 오면 두렵다. 아침이 오면 무섭다. 입고 나갈 옷이 없기 때문이다. 레알한 현실 안에서 꿈 좀 꾸고 싶다. 잘하면 꿈도 꿀 수 있을지 싶은데 왜 이리 미적미적 대는 것일까.
있는 듯 없는 듯 꽃샘추위가 사라지고 봄 기운이 완연하다. 진달래꽃 띄운 막걸리에 취해 거나하게 꿈이라도 꾸고 싶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내 곁을, 우리 곁을 떠나간 사람도, 노동자도, 지식인도 너무나 많다. 올해에는 세상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라도 바뀌고 있다는 소식을 꿈결에라도 들을 수 있을는지, 알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