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우리나라를 다녀갔던 프랑스 여행가 샤를 바라는 대구읍성을 보고 ‘북경성을 축소해 놓은 듯 아름답다’고 극찬한다. 그러나 악명 높은 친일파였던 대구군수 박중양은 1906년 11월부터 시작하여 대구읍성을 완전히 파괴한다. 읍성 밖에서만 장사할 수 있었던 일본인들이 ‘성곽을 없애버려야 장사가 잘된다’면서 청탁을 하자, 조정이 읍성 파괴를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박중양은 캄캄한 밤중에 성곽을 무너뜨리는 무도한 반민족 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황제의 명령까지 거스른 채 대구읍성을 파괴했던 박중양은 벌을 받기는커녕 이등박문의 지원을 받아 평안북도 관찰사로 영전한다. 이를 보면, 대구읍성의 파괴는 나라가 실질적으로 멸망 단계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실제로 대구읍성이 파괴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910년 경술국치(國恥)의 비극이 찾아온다.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해온 삼천리 ‘금수강산’이 ‘왜구’라며 줄곧 낮춰보았던 섬나라 열도의 제국주의자들에게 국권을 넘겨주며 합병되고 만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되자 한말(韓末)자주(自主)자강(自强)운동의 대표적 횃불인 ‘국채(國債)보상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나라[國]의 빚[債]은 1300만원으로 정부의 1년 예산과 맞먹는 거금이었다. 이 국채는 ‘한국의 자율적 의지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군사적 압력을 배경으로 한 일본 정부의 강요로 인한 것’(<대구의 향기>)이었다. 애국 백성들은 이 빚을 갚으면 대한의 자주자강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국채보상운동’이라면 대구 사람들이 단연 주목을 받는다. 아주 조직적으로 궐기했기 때문이다. 역사에 유례가 없는 평민들의 국민운동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서 비로소 본격화된 것이다. 김광제(金光濟) 등 13인을 발기인으로 한 ‘국채 1300만원 보상 취지서’가 발표된 것은 1907년 2월 21일. 그날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격문 중 일부를 <대구의 향기>에서 찾아 다시 읽어보자.
<(전략) 일본이 청로전쟁에서 소(小)로서 대(大)를 이긴 것은 바로 병정들 가운데 결사대가 있어 혈우육풍(血雨肉風)이 휘몰아치는 적진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마치 즐거운 낙지(樂地)로 가는 것과 같이했고, 후방에 있는 백성들은 또 그들대로 패물을 팔고 부녀자들은 반지를 팔아 군비에 보태는 등 온갖 노력을 다함으로써 마침내 큰 나라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 사실에서 우리가 배울 점이 없겠는가! (중략)
지금 국채 1,300만원은 우리 한제국의 존립과 직결된 것이다. 이것을 갚으면 나라가 존재하고 이것을 갚지 못하면 나라가 곧 망할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다. 지금 나라의 국고로서는 도저히 이것을 해결할 도리가 없는 형편이다. (중략)
그런데 이 국채를 갚는 방법의 하나로 크게 노고하지 않고 또 자기 재산의 손해봄 없이 크게 모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이 바로 2천만 동포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한 사람이 매달 20전씩 거둔다면 1,300만원을 쉽게 모을 수 있는 것이다. (중략) 우리는 국민된 당연한 의무로 잠깐 동안 이같은 실천을 하려는 것인데, 이것은 일본의 결사대나 부녀들이 패물을 나라에 바치는 것과 비교할 때 얼마나 가벼운 일임을 알 수 있다.>
‘국채 1300만원 보상취지서’는 2월 21일 민의소(民議所, 상공회의소 전신) 창립총회와 국민대회에서 연이어 발표되었다. 창립총회에서만 즉각 500원이 모금되었다(대구의 향기> 61쪽. 500원은 당시 정부예산 1300만원의 약 0.004%로, 2010년도 대한민국 정부 1년 예산 300조를 기준으로 환산하면 120억에 해당하지만 액수 비교는 정확하지 않다.) 대구의 이 소식이 전해지자 국민들의 반응은 너무나 뜨거웠다. 고종도 금연을 선언했다.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들은 앞다투어 관련 기사와 논설을 게재하여 운동의 확산을 도왔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은 성공하지 못했다. 일제 통감부는 운동의 주동적 역할을 맡은 대한매일신보를 탄압하고 간부들을 위협하다가 마침내 1908년 7월 12일 신문사 총무 양기택을 ‘국채보상금을 횡령하였다’는 누명을 씌워 구속했다. 양기택은 네 차례 공판 끝에 9월 29일 무죄로 석방되지만, 그 이후 운동은 열기를 잃고 시들어갔다. 일제의 간교한 저지책이 결국 성공하고 만 것이었다.
<대구의 향기>는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비록 그 끝은 흐지부지되었으나 나라를 빼앗을 정도의 막강한 힘과 간교(奸巧)를 함께 행사한 일제의 탄압 때문이었던 만큼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금연, 금주, 절미(節米)로 되찾으려던 평화적이고 자발적인 자주자강 운동은 영원히 그 빛을 잃지 않을 것이고, 한국과 한민족이 존속하는 한 이 국민운동의 발상지였던 대구는 길이길이 국민 모두의 가슴속에 기억될 것’이라고 자평하고 있다.
하지만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의 역사 유적을 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시내 중심가에 작은 공원을 조성하여 ‘국채보상공원’이라 부르고, 2011년 10월 5일에 국채보상운동기념관도 개관했지만, 구체적 유적은 없다.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했고, 곧이어 나라가 식민지로 전락했으니 어쩔 수 없는 귀결이다. 지나간 과거에 역사적 가정을 덧붙여 보아야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지만, 만약 대구에 국채보상운동을 뚜렷하게 증언하는 유적이 무엇하나 남아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다만 국채보상운동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서상돈 선생의 묘소가 수성구 범물동 공원묘지에 남아 있어 그나마 후손들의 마음을 조금은 달래준다. 특히 그의 무덤은 너무나 초라하여 담배 끊고 비녀 뽑아 나라를 지키려 했던 당시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상징적으로, ‘오늘’의 우리에게 보여준다. <역사 속의 대구, 대구 사람들>에 실려 있는 다음의 사례도 마찬가지이다.
<여성이 앞장서서 남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한 사건도 있었다. 당시 대구의 유명한 기생 앵무가 (국채 보상금을 모으는) 사무소에 와서 100원을 출연하였다. 그리고 “여자로서 감히 남자보다 일푼이라도 더 낸다는 것이 곤란하여 지금 100원만 출연합니다만, 만약 남자 중에 수천 원을 출연하는 자가 있다면 나도 죽기를 각오하고 따라 내겠습니다.”라고 호언하였다. 당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를 권유하는 다른 어떤 말보다도 더 파급 효과가 컸을 듯하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어떤가? 경제규모는 세계 11위권을 자랑하지만, 한글과 전통, 정치․경제적 자주성을 지키려는 노력에는 과연 어떤 수준인가? 낮은 목소리로 스스로 물어보며 내심 얼굴을 붉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