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에 빼곡하게 적힌 기념일을 볼 때면 빨간 날을 찾기 마련이다. 일요일이 아닌 다음에야 3월 8일은 흔히 지나치는 수많은 기념일 가운데 하나다.
여성의 날의 기원
115년 전 3월 8일, 미국의 방직공장 여성노동자 1만 5천여명은 미국 루저스 광장에 모여 10시간 노동제 쟁취, 안전한 작업환경 요구와 성, 인종, 재산, 교육수준 등과 관계없이 모든 이들에게 투표권을 주어야 한다고 요구하며 싸움을 벌였다.
이후 1910년 제2인터내셔널의 노동여성회의에서 독일의 노동운동가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과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로부터 매년 같은 날, 모든 나라에서 동시에 여성의 권리 신장을 주장하는 '여성의 날' 행사가 제안되었다. 이 주장이 받아들여져 1911년 3월 19일에 첫 번째 '세계 여성의 날'이 치러지기로 결정된다. 이날은 1948년 3월 19일 프러시아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프랑스 2월 혁명의 영향을 받은 노동자 계급의 봉기에 위협을 느껴 여성 참정권을 약속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1913년 3월 8일로 세계 여성의 날이 변경된 후, 1975년 UN이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기 시작했다.
첫 여성대통령 시대를 맞이한 8일, 여성의 날의 기원을 슬며시 들여다보면 의문이 생겨난다. 2,000여일 가깝게 싸움을 벌이고 있는 재능교육 여성노동자, 정부의 무기계약전환 방침에도 해고당한 칠곡경북대병원의 여성노동자,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을 받으며 곳곳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 양성평등이 이루어졌다고 말해지는 오늘, 현실을 보면 우리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또한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지속된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성적 비하와 비난이 민주적, 개혁적이라고 이야기 하는 이들의 입에서 나온 것임을 보면 ‘민주’와 ‘개혁’에 여성은 애초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페미니스트가 아닌 내가 허접하게 여성의 날을 들먹이는 것은, 우리 주변에 산재한 성차별과 배제를 제대로 알기라도 해보자는 데 있다. 남성을 향한, 남성을 위한 작은 파문을 하나 던지고 싶을 따름이다.
<여성의 날>은 있는데 왜 <남성의 날>은 없나요?
왜 여성의 날은 있는데 남성의 날은 없을까. 이 질문을 하는 사람을 아직까지 직접 대면한 적은 없다. 이는 3월 8일이 여성의 날임을 알고 있는 남자도 흔치 않기 때문이지 않을까 단정해 본다.
이와 유사한 의문은 많다. 왜 남자만 군대 가야하나, 군대를 가니 남자에게 가산점을 줘야 한다, 왜 여성고용할당제를 두느냐 등...
대학시절 경험한 ‘여학생 휴게실’과 관한 이야기를 해보면, 대충 짐작할테지만 대학에 ‘남학생 휴게실’은 없지만 ‘여학생 휴게실’은 있다. 학생회 선거에 출마해 선거 운동을 하던 도중 가장 많이 듣던 질문 중 하나가 바로 ‘왜 여학생 휴게실만 개선하겠다는 것이냐’였다. 더불어 ‘남학생 휴게실도 만들어 달라’는 요구를 들었다. 나는 생물학적 남성이었기에 이러한 질문과 요구는 바로 ‘넌 왜 여성을 배려하는 척 하냐’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당장 내게는 남학생 휴게실이 필요 없었다. 학교 지척에서 밤새도록 술을 먹다가도 학교 안에는 잠을 잘 곳이 넘쳐났고, 나른한 오후에 과방에 드러누워 자기도 했다. 어느 공간이던 나는 불편함이 별로 없었다. 그렇지만 여학생이 과방에 드러누워 자는 모습을 본적은 없었다. 아니, 잘 수 없었다.
스무살 시험 기간, 여자 선배와 밤을 지새우며 과방에서 술을 마시다가 지금은 아저씨가 된 남자 선배 무리와 마주쳤다. 그들의 시선은 내가 아닌 여자 선배로 향해 있었다. “왜 이 시간까지 술 먹고 있느냐”는 말에 여자 선배는 여학생 휴게실로 향했고, 나는 과방에서 잠이 들었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졌지만, '여학생 휴게실'의 존재 이유는 월경하는 여성의 쉼터, 여학생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의 의미로 80년대 요구되어 만들어졌다. 아무도 남학생 휴게실을 요구하지 않았다. 남학생에게는 불편한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이즈음 여성학자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을 접했다. 이 책에서 본 인상적인 구절이 답을 해준다. "페미니즘 이론가 뤼스 이리가레는 누군가로부터 ‘남성성이라는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질문에 ‘당연하죠, 세상에 그것밖에 없으니까요’라고 말했다".
모든 성차별과 성폭력이 없어진 다음엔 ‘휴게실’만 있으면 된다. 여학생 휴게실의 설치 이유와 그 필요성은 무시한 채 반사적으로 남학생 휴게실은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무지다. 왜냐하면 그 요구는 반드시 ‘여학생 휴게실’ 이야기가 나올 때에만 등장하기 때문이다. 대학 내 학생을 위한 휴게공간이 필요하다면 휴게공간 확보를 위한 요구가 필요하다. 이 질문을 확장하면 ‘왜 남자만 군대 가느냐’가 아닌 ‘군대를 왜 가야하느냐’, ‘젊음을 소진하고 억압하는 군대가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여성史’는 있는데 왜 ‘남성史’는 없을까
여성의 역사를 다룬 서적과 연구논문은 나오지만, ‘남성사’라고 다룬 서적은 보기 어렵다. 간단하다. 앞선 이리가레의 말처럼 ‘인간의 역사’가 곧 남성의 역사였던 셈이다.
인간을 의미하는 human은 남성을 칭하기도 한다. 여성은 woman이다. 영어의 기원인 프랑스어를 한 번 살펴보자. 남성을 의미하는 homme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반면, 여성을 의미하는 femme는 homme의 부정어다. 곧 ‘남성이 아닌 사람’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사람이 아닌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이는 현대 여성노동자의 역사를 다룬 <여공 1970-그녀들의 反역사>의 제목처럼 기존 역사에 대한 반역사를 선언한다. 저자 김원은 우리 기억 안에 내재한 ‘공순이’로 불린 여성노동자에 대한 희생양 담론을 비판하고 여성노동자의 날 것 그대로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IMF 직후 굴지의 대기업, 현대자동차에서 첫 번째로 단행된 정리해고는 여성노동자를 향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자동차는 민주노총에서 가장 많은 조합원을 가진 사업장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노동운동에 내부 비판을 하는 이들이 가장 많이 지적하는 부분이 ‘대공장 정규직 남성노동자 중심성’이다. 더불어 한국의 노동운동담론의 시작으로 거론되는 1970년대 ‘전태일의 분신’에서 여성노동자는 시해의 대상, 동정의 대상으로 그치고 만다.
앞서 소개한 <여공 1970>, 여성노동자 스스로 써내려간 <나 여성노동자1,2>는 의미 있는 시도이자 기록이다.
고백, ‘프리섹스’와 콜론타이의 ‘날개달린 에로스’
어줍잖게 페미니즘 이론서들을 탐독하던 내게 사회주의 여성노동운동가 콜론타이의 글은 충격과 함께 환호의 대상이 됐다.
러시아혁명 이전 레닌의 볼세비키가 아닌 멘세비키에서 활동하던 콜론타이는 혁명 후 볼세비키에 합류한다. 하지만 콜론타이는 레닌을 향한 비판도 서슴치 않는다.
엥겔스는 일처일부제의 기원이 사유재산의 상속에 있다는 분석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족은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로부터 엥겔스는 타락한 부르주아지 가족과 대비해 프롤레타리아트 가족 부부의 평등함을 강조하면서 경제적 관계가 아닌 성애를 바탕으로 한 평등한 가족이 등장할 것으로 보았다. 엥겔스는 성애가 본질적으로 배타적이라고 봤다. 따라서 자본주의 이후에 일처일부제가 그대로 유지되지만 그 사이에 평등한 관계가 올 것이라는 입장이다.
레닌은 훗날에 “엥겔스는 <가족의 기원> 에서 공동적인 성관계가 개인적인 이성간의 사랑으로 발전하고 그래서 더욱 순수해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 지적한 바 있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엥겔스가 1:1의 관계 자체를 인류사에 있어서 진보라고 바라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콜론타이는 「날개달린 에로스의 길을 열자」라는 글을 통해 친족 남성간의 유대를 강조함으로써 국가 방어자들 사이의 결속을 강화하려한 고대, 중세 기사들의 ‘플라토닉 러브’와 그 이면에 존재한 강간․‘은밀한 관계’를 통해 봉건제를 강화한 중세. 육체적 사랑과 결혼을 합치하게 함으로써 연애를 탄생시킨 근대를 분석한다. 나아가 공산주의 사회에서 등장할 ‘새로운 관계’를 노동자들 간 동지애에 기초한 관계는 집단의 유대를 강화할 프롤레타리아트의 도덕이라고 말한다.
회고해보건대 당시 나는 현재의 성상품화가 일반화 된 자본주의 사회를 고려하지 않고 콜론타이의 ‘자유결합’을 굳게 믿었다. 일종의 왜곡인 셈이다.
같은 글에서 콜론타이가 언급한 “우리는 여기서 사랑의 양면성 즉 "날개달린 에로스"의 복잡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이는 한 남자가 많은 여자와 혹은 한 여자가 많은 남자와 갖는 "에로스 없는" 성적 관계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개인적 감정이 관여되지 않은 관계는 불운하고 해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를 간과한 채.
한동안 ‘자유결합’이 곧 이상적인 연애관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성별관계의 ‘진보적’ 대안인 것처럼. 돌아보면, ‘글쎄다’는 말로 요약된다. 시간이 지나 조주은의 <페미니스트라는 낙인>에서 다시 한 번 돌을 맞는다.
“프리섹스주의자임을 자처하는 남성들은 진정한 프리섹스를 즐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프리섹스주의자라고 말하는 여성들의 욕망은 여전히 남성들의 욕망으로 치환되기 쉽다. 프리섹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여성활동가들은 남성들에게 창녀로 이해되고 프리섹스주의자인 남성활동가들은 섹스 파트너를 선택할 권리를 향유한다” -조주은, <페미니스트라는 낙인>
세상의 반, 그러나...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105년 전 여성노동자들이 외쳤던 구호가 “빵을 달라, 그리고 장미를 달라”였다. 빵은 생존권, 장미는 여성으로서의 권리였다.
여성의 날, 남성 그리고 여성에게 켄로치의 <빵과 장미>를 추천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