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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관리툴 2013년03월04일 17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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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백목사의 예수읽기 (19)
누가복음 13:1-9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백창욱(대구새민족교회) baek0808@hanmail.net

200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화재참사가 난 날이다. 무려 192명이 죽고 부상자가 148명이나 발생한 비극적인 날이다. 이날을 기억하고자, 2월 17일 동성로 대구백화점 앞에서 대구지하철화재참사 10주기 추모문화제를 열었다.

나는 추모발언을 맡았다. 그런데 앞 순서에서 현종문 감독의 <대구지하철참사와 10년> 영상을 보고, 218대구지하철참사희생자대책위 윤석기 위원장의 발언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추모발언 대신 대구시 성토발언을 하기로. 지하철참사 이전 1995년 4월 28일 상인동 지하철 공사장에서 가스가 폭발해서 101명이 죽고 202명이 부상당한 참사도 있었던지라, 그때 이런 문제제기를 했다.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참변이 어째서 대구에서만 연거푸 일어나는 것인가?

우연한 일치인가? 연속적인 돌발 상황인가? 나는 이날 대구정치권력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추모발언을 성토발언으로 바꾼 이유이다. 참변 이후 수습과정은 엉터리였다. 사고원인을 밝히는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현장을 보전하지 않고, 다음날 곧바로 청소해버렸다.

동영상을 보니 그때 분노한 시민이 엄청나게 모여서 지하철운행을 중단하고 진상규명 제대로 하라는 시위를 하며 대구시청으로 몰려갔는데, 대구시는 경찰을 동원해 이들을 막기에 급급했다.

경찰이 시 청사를 둘러싸는 모습은 너무나 익숙한 장면이다. 대구시 잘못으로 발생한 현안 때문에 시청에 항의집회를 가면, 이놈들은 잘못을 바로잡고 재발방지, 개선하는 게 아니라 물리력으로 막는 게 유일한 반응이다. 권력자가 시민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정책을 펴는 대표적인 지역이 대구이다.

유족들이 참사를 잊지 말자는 뜻에서 추모공원을 요구하였고, 중앙정부도 좋다고 하는 걸, 유독 대구시가 소극적이어서 지금도 기형적인 형태로 있다. 이름도 애매한 시민안전테마파크... 지역상인과의 갈등, 희생자유족 모임도 갈라져서 추모식도 따로 한다.

이런 현실은 대구시가 조장한 면이 더 크다. 더군다나 내년 개통하는 지하철 3호선은 무인역사, 무인전동차를 운행한다는 계획이다. 이쯤 되면 지하철참사를 통해 얻은 교훈이 하나도 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날 거리를 지나는 시민에게 외쳤다. 시민들이여, 깨어나라고. 언제까지 이 무도한 지방권력을 계속 내버려둘 것이냐고, 언제까지 묻지마 투표를 할 것이냐고.

오늘 복음이야기에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두 가지 비극적인 사건이 나온다. 앞에 사건은 총독 빌라도가 예루살렘성전에 예배하러 온 갈릴리 사람들을 집단으로 학살한 사건이다. 빌라도의 포악성, 잔인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뒤에 사건은 실로암 탑이 무너져서 졸지에 18명이 죽은 사건이다. 앞 사건이 정치적인 사건이라면 뒤 사건은 사고사이다.

나는 복음말씀에 나온 두 개의 사건을 보면서 반사적으로 대구에서 일어난 두 사건이 겹쳐서 떠올랐다. 정치적 사건은 1975년에 일어난 인혁당사건이다. 그해 4월 8일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난 바로 다음날 선량한 시민 8명을 사형당했다. 희생자들이 모두 대구경북 사람들이다. 박정희가 국면전환을 위해 이들을 희생제물로 삼은 정치적 학살이었다.
 
또 다른 사건은 서두에 말한 것처럼, 상인동 가스폭발과 지하철화재참사이다.

한번 묻자. 정치적 학살이든 사고이든, 죽음을 당한 사람들은 이런 참사에 대해 어떤 인과관계가 있나? 자신의 결정적인 잘못이나 죄책, 책임이 있나? 다시 말해 죽을만한 잘못이 있나? 인혁당이나 지하철 희생자나 모두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다. 추모문화제 전시패널에서, 전동차에 갇힌 체 죽어가면서 가족에게 보낸 문자를 읽어보노라면,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인간애로 가득 차 있었다.

빌라도에게 학살당한 갈릴리사람이나 탑이 무너져서 죽은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이유가 있다면, 악한 자가 지배하는 세상을 산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지난 5년간 국민이 체감한 정서와 전혀 다른 말을 하는 이명박을 보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과 같은 시대를 산 게 잘못이라고밖에 달리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비극적인 사건을 접해도 본질을 잘 보지 못한다.

예수는 두 사건을 언급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탑에 치여 죽었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더 많이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예수가 던진 문답에는 배경이 있다. 당대 사람들은 불행이 죄의 결과라는 이데올로기에 잠식돼 있었다. 누가 불행을 겪으면 이게 누구 죄 때문인가? 하는 의문을 자동으로 던졌다. 이것을 인과응보사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는 말했다. "그렇지 않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라고.

불행은 죄의 결과라는 당대 이데올로기는 무엇이 문제인가? 불행의 원인을 자기 죄에서 찾는 인과응보사상은 어떻게 유포된 것인가?

서두에 대구지하철참사는 우연도, 돌발도 아닌 정치권력의 문제라고 했다. 대구시의 가장 큰 잘못은 희생자만 위로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덮고 지나가려고 한데 있다.

그러나 그 속을 파헤치면 우발성을 넘어서 구조적으로 개선해야 할 수많은 문제가 잠복해 있었다. 승무원이 부족한 점, 불량자재를 쓴 것, 불나서 불길 차단한답시고 지하상가 셔터를 내려서 사람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갇힌 것 등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권력은 그러한 이면이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불행을 개인의 죄에서만 찾는 인과응보는 이런 구조적이고 근원적인 진단에 눈을 감게 한다. 그리고 자기가 안 당했으면 그만이라는 안이한 생각이 퍼져서 권력자가 무엇을 해도 무사통과인 풍토를 만들었다.

복음말씀으로 돌아가자면,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을 학살한 것이나, 실로암 탑이 무너져서 대형참사가 난 것 모두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죄라면, 권력자를 잘못 만난 죄이다. 실로암 탑 붕괴도 요즘으로 말하면 권력형 건설비리가 얽혀서 일어난, 사고사처럼 보이는 구조적 범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면 그 사람이 무슨 잘못을 했을까 하는 생각부터 한다. 그렇게 되면 가장 득을 보는 사람은 권력자이다. 자기가 저지른 범죄가 가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회개를 말씀하심은 이런 어두운 시대를 뛰어넘고자 하는 촉구이다. 새로운 역사건설에 동참하라는 초대이다. 새로운 세계에 뛰어들기 위해 자신이 고집하는 잘못된 관념, 행위들을 버리는 일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3월 1일 청도 각북면 삼평1리에서 "삼평리에 평화를"이라는 평화콘서트가 열렸다. 한국전력이 시골 사람을 무시하고 아직 완공도 하지 않은 신고리원자력발전소 전기를 공급한답시고, 마구잡이로 송전탑을 건설해 갔는데, 뜻밖에도 삼평1리 할머니들이 자기 마을을 관통하는 송전탑 건설을 온몸으로 저지하는 투쟁을 벌이고 있는바, 할머니 전사들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행사를 한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마을 사람 대부분이 알량한 보상금을 바라고 송전탑 건설을 묵인하는 현실이다. 자기 마을 일임에도 남 일처럼 강 건너 불구경하고 있다. 이장은 한전과 한통속이 돼서 설레발을 치고 있다. 

인간의 탐욕이 이성과 양심을 잡아먹었다. 저만 살겠다고 남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람, 국가와 자본이 벌이는 악행을 뻔히 알면서도 내 일이 아니라고 침묵하는 사람, 권력이 자기 입맛대로 가공하고 조작한 선전을 진실인양,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그것대로만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그러면서 불행을 당하면 개인에게서 죄책을 찾고, 권력이 저지른 구조적인 악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이런 사람들과 비극적 참사를 겪은 사람들과 다를 게 무엇인가?

우리는 모두 함께 사는 세상이 되지 못하는 현실과 그런 세상을 조장하는 정치권력과 자본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나는 어느 편에 서 있는가를 돌아보고, 서 있는 자리가 잘못됐다면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모두가 함께 사는 세상으로. 그것이 참사람으로 사는 모습이며, 기독교가 말하는 회개이다. 진실로.
 

백창욱(대구새민족교회) baek08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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