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주> ‘진냥의 구성물질’을 소개합니다. 지금의 저를 존재할 수 있게 만들어준 책들을 소개하고 싶어서요.
진냥의 멘붕독서에 드디어 한국만화가 등장했다. 두둥! 바로 강경옥 작가의 <별빛속에>(1987). 너무 유명한 작품이라 설명이 더 필요할까 싶지만, 그래도 시간이 많이 흘렀는지라 썰을 좀 풀어야겠다. <별빛속에>는 8~90년대 한국만화의 황금기라 불리던 시기의 작품으로 황미나의 <레드문>(1994), 신일숙 <아르미안의 네딸들>(1986) 등과 함께 SF판타지순정만화스러운 하나의 장르를 형성한 작품이다. 작년에 한국만화 100선에 뽑히기도 했고, 2005년에는 8권으로 구성된 애장판 시리즈가 발매됐다. 처음엔 주황색표지의 21권짜리 시리즈로 나왔다고 하는데, 나는 그 이후 서울문화사에서 나온 10권짜리 시리즈로 <별빛속에>를 읽었다.
별이 많은 밤이면 아빠와 자주 올라가던 언덕이 있었다.
아빠는 별자리 이야기를 자주 해 주셨고
어릴 때부터 나는 그 얘기를 듣다가 잠들기 일쑤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곧 집으로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가끔 눈을 뜨면 아직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보이고
커다란 느낌의 달이 나의 시야에 들어왔다.
언제나 동경하는 저 우주. 뚜렷이 보이는 달은 나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첫번째 우주였다.
그러나 언제나 나를 감싸고 있던 것은.......
저 수많은 별들이었다.
- <별빛속에> 1권. 오프닝 나레이션
주인공 신혜는 아버지, 이모와 함께 사는 그냥 보통인 평범한 여고생이다. 별에 푹 빠져 있다는 것과 아직 초경이 없다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일까. 근데 어느 날 낯선 두 사람과 만난다. 레디온과 사라. 레디온은 어릴 적 정쟁을 피해 지구로 보내진 카피온 행성의 제1왕녀 시이라젠느를 찾아 초능력이 있는 17살 여성들-시이라젠느 후보들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외계인. 진짜 시이라젠느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만 18살이 되는 생일 즈음에 혈액이 푸른색으로 변한다는 것. 시이라젠느의 생일까지는 보름 정도의 시간이 남아 확인할 수는 없지만, 특히 능력이 강해 시이라젠느로 추정되는 ‘사라’를 호위하는 것이 레디온의 주된 임무였다.
하지만 정작 사라가 아니라 신혜의 상처에서 푸른색 피가 흐르는 것이 발견되고 상황은 뒤죽박죽으로 흘러간다. 시이라젠느를 노리는, 카피온과 적대관계에 있는 카라디온에 의해 신혜의 가족과 친구들이 차례로 목숨을 잃는다. 자신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는 절망과 증오로 가득 찬 신혜는 레디온을 따라 카피온에 도착하고, 카피온의 여왕은 초능력을 각성하지조차 못한 시이라젠느를 다음 여왕으로 선언한다.
<별빛속에>를 읽고 난 후 한동안 메일계정 비밀번호를 시이라젠느로 사용했을 만큼, 나는 이 작품에 빠졌었다. 십대 시절 종종 공상하곤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머리카락이 초록색으로 변하고 레디온과 같은 이가 내 앞에 나타나 사실은 내가 어느 먼 행성의 왕녀라고 말하는 순간을.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이름이 무엇이면 어울리겠느냐는 생각에만 며칠을 골몰한 적도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굉장히 쓸데없는 그 공상이 왜 그리도 오래 잡고 있었을까.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려본 적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싶진 않았다. 아니, 특별한 사람이고 싶었다. 역사책에는 특별한 사람만 기록되어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늘 숫자로, 혹은 숫자로도 기록되어있지 않은 채 잊혔다. 난 숫자가 되고 싶진 않았다. 내가 주인공이고 싶었다. 나의 선택이 역사가 되는 서사의 주인공. 하지만 내 일상, 내 미래는 최선을 다하고 운이 따라봤자 평범할 게 고작이었다. 평범하게 잘 사는 것이 목표인 삶. 왜 나는 역사를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없는 걸까...
<별빛속에>를 읽고 10년 가까이 시간이 흘러 진중권의 강연을 들었다. 진중권은 2008년 한미FTA 반대 촛불집회에 쏟아져 나온 시민을 두고 RPG 온라인게임과 관련지어 ‘서사를 만들어 나가는 세대’라 말했다. RPG 게임은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스토리가 달라진다. RPG 게임에 익숙한 1~20대들은 역사를 책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서사를 본인 스스로 만들어 나가고 2008년 촛불집회가 하나의 예라는 것이었다. 그 해석은 내게 굉장히 신선했다. 그리고 <별빛속에>가 떠올랐다.
하지만 용서해줘요
이것이
여왕이 아닌
시이라젠느의 모습이야
하지만
자신에게 솔직해지지 않고는
살 수 없어
시이라젠느는 여왕이 될 운명이었고 결국, 여왕이 된다. 하지만 그 모습은 모두 신혜 본인의 모습이었다.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기. 자신에게 솔직해지기. 그것이 역사 속에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갑자기 자신 앞에 던져진 운명에 따라 여왕으로서 혹은 왕족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구에서 살아왔던 자신의 모습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시이라젠느의 모습이었다.
특별한 삶을 꿈꾸는 그대, 사실 그 특별한 삶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욕망 혹은 자신의 신념에 솔직해지지 못함에 대한 호소이지 않았던가. 여왕이라는 자리에서 얽매여 자신을 옭아매기보다는 다가오는 고난과 역경에 대해 자신에게 충실함으로, 자신에게 솔직함으로 해결해 나가는 시이라젠느를 난 동경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싶은 것 같다. 계속.
<별빛속에>는 운명과 우주 그리고 삶에 대한 고찰을 잘 다루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특히 각각의 컷에서 배경처리를 다르게 함으로써, 등장인물의 감정선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뿐만 아니라 타고난 초능력과 온화한 자연환경, 신에 대한 믿음이 기반인 카피온과 인간의 기술을 기반으로 한 카라디온 사이의 갈등이 스토리를 훌륭히 떠받치고 있다. 원래 카라디온은 카피온 행성에서 죄인들을 유배 보내던 행성이었다. 지금은 몇 배나 발달한 과학기술을 가지고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 존재하고 있지만, 기후가 온화한 카피온과 달리 척박한 자연환경으로 식량생산이 전혀 불가능해 속국의 처지에 있다. 대등한 교역을 주장해보지만 카피온 왕족은 우주공간을 텔레포트할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초능력을 가지고 있어 무력에서도 카라디온이 훨씬 불리하다. 갈등은 고조되고 결국 카라디온은 카피온과의 전쟁을 준비한다.
"사람들은 말하지. 이번에 안 되면 다음 대에, 다음 대에... 그러면 그 성취 못 한 지나간 사람들은 대체 뭐냐!! 나는 그따위 성취 못 한 지나간 사람들이 될 수 없어!! 어째서 그 모든 일이 나의 대에 일어나면 안 된다는 거냐? 나도 내 눈앞에서 카피온에서 살고 싶은 거다!!"
‘가질 수 없는 카피온은 없애는 게 더 낫다’는 생각에까지 이른 카라디온 내 과격파들은 행성의 절반 정도는 날려 보내기에 충분한 무기를 비밀리에 만든다. 쥘베른의 <인도왕비의 유산>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카피온과 카라디온처럼 <인도왕비의 유산>에도 대비되는 두 나라가 나온다. 환경과 복지의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사라쟁과, 강철 도시를 세우고 거대 병기를 만들어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슐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인도왕비의 유산>에 나오는 슐츠보다 카라디온 사람들에게 더 공감이 간다. <별빛속에>에 나오는 카라디온은 세계를 지배하고 싶다는 대의적 욕망보다 인간답게 존중받으며 살고 싶다는 더 실체적인 욕망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타고난 초능력으로 자신들을 지배하는 카피온에 대항하여 대등한 존재로 살아가고 싶은 존재로서의 욕망. 비록 전쟁을 선택하고 거대한 무기를 만들어 공멸을 자처하였지만 그 욕망 자체를 누가 탓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역사 속에서 자신으로, 그 존재만으로 긍정 받고 싶을 테니까.
그림체나 캐릭터의 성향 역시 굉장히 신선하진 않지만, 한국만화 황금기의 풍미를 한껏 느낄 수 있는 <별빛속에>. 유행에 굉장히 민감하지 않다면 한번 읽어보시는 건 어떤가. 10권밖에 안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