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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정보
봄. 80.3cm x 100cm,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자연 이야기
예전에는 자주 산책하러 갔다. 드넓은 들길을 온종일 걸을 때도 좋았지만, 그냥 아무 곳에나 쪼그리고 앉거나 누워 시선 가는 대로 한 평 남짓한 풀밭만 하염없이 둘러보아도, 자연의 완벽한 질서가 담긴 우주를 만날 수 있어서 더 좋았다. 그 작은 땅 안에 자라난 온갖 잡풀과 들꽃들의 무질서가 연출해내는 완전한 조화는 그 어떤 미학적 찬사를 끌어다 붙여도 설명이 역부족이다. 자연은 풀잎하나 조차도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며 곡선으로 자라기 때문이다.
어디 눈에 보이는 이미지뿐인가! 가만히 눈 감으면 또 다른 놀라운 소리의 세계가 있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결 가는 대로 나뭇잎들 몸 부비는 소리, 들짐승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포함한 온갖 잡음들 또한, 이 세상 그 어떤 음악보다도 깊은 화음을 만들어낸다. 물론 청각뿐만 아니라 후각과 촉각을 두드려대는 자연의 움직임도 늘 나지막하게 작고, 조용하게 모여들어 거대한 감동으로 증폭되어 내 마음을 두드린다.
이처럼 자연은 있는 그대로 버려두고 던져놓아야 비로소 가장 강렬한 정체성을 드러낸다. 자동차는커녕 아날로그 카메라 한 대조차 없던 시절, 나는 무수히 걷다가 앉거나 혹은 누워서 자연의 거대한 축제를 온몸의 세포에 저장시키느라 안간힘을 다했다. 자칫 잡념에 휩쓸려 눈길을 놓아버리면 마치 전광석화처럼 수면 위로 솟구치는 은어의 비늘 같은 아름다움도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고, 잠시만 귀를 닫아도 자연의 내밀한 감동이 아득하게 사라져버린다.
사물을 대할 때는 내 마음 밑바닥이 보이는 데까지 걸어 내려가려는 집중력은 그 당시 더욱 커졌다. 틈틈이 메모하고, 간단한 그림을 그려 그 순간순간의 아름다움의 세계로 들어가는 키를 만들어두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누군가 머리에 남으면 기억이고, 가슴에 남으면 추억이라 했던 것처럼, 지금도 가슴으로 먼저 다가오는 추억의 창고 빗장을 열기만 하면, 진실을 가득 담은 기억들이 떠올라 생생한 현재의 시간과 행복하게 뒤섞인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차와 디지털카메라를 소유하게 되어 이미지를 쫓는 여행의 반경이 넓어지자 상황도 급변했다. 자연은 더 이상 느림을 거느린 사유의 정원이 아니라 갈수록 가속도가 붙은 이미지 포획의 대상물로 전락해갔다. 느린 시간도 함께 친구가 되어주던 자연과의 동행관계는 이미 지난날의 일이 되어버렸다. 이젠 그들 사이를 오만하게 질주하다 직감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들만 경쾌한 샷으로 낚아채 디지털 메모리에 입력한다.
관조의 침전물이 사라진 자연과의 만남을 그래서 늘 허전하다. 여행의 기억은 허겁지겁 돌아다닌 노동의 피로만이 가득하다. 작업실 컴퓨터에 재생된 이미지 또한 너무나 생경한 표피적 아름다움의 파노라마일 뿐이다. 마음으로 보던 것은 좁지만 깊었는데 반해 기계의 힘을 빌린 것은 분명 감각영역의 확장에 크게 이바지했지만 그 감흥이 얕아진 까닭이다. 자연을 직접 보고도 그 본 모습은 보지 않고 디지털 기기에 내맡긴 대가는 갈수록 혹독하다.
자연은 우리들 이 시야에서도, 또한 마음속에서도 점점 변방으로 밀려가고 있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황폐하고 쓸쓸한 문명의 그림자로 채워진다. 갈수록 거칠고 메마르게 변해가는 사람들의 마음도 거기에서 온다. 자연은 온몸의 감각세포를 거느린 마음을 송두리째 주지 않으면 절대 먼저 다가오지 않으며, 내가 편하게 얻고 싶어 하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그만큼 잃을 것도 각오해야 한다는 교훈을 봄이 오는 길목에서 더욱 실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