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우(1824∽1864)는 동학을 창시한 교조(敎祖)이다. 그의 동상이 대구에 있다. 개신교, 천주교, 불교 등 외래종교에 밀려 거의 힘을 쓰지 못하는 민족종교 동학을 창시한 인물의 동상이 어째서 이곳 대구에 우뚝 건립되어 있을까. 이순신 장군 동상이 전국 방방골골의 초등학교마다 세워진 것과는 비교할 일이 아니므로, 최제우의 동상이 달성공원에 세워져 있는 것은 새삼 눈이 가는 일이다.
종교에서 교조의 죽음은 큰 의미가 있다. 동학도 최제우 순교 이후 교세(敎勢)가 크게 늘었다. 그런데 그는 대구에서 죽었다. 경주 용담정(龍潭亭)에서 경상감영으로 끌려와 있던 중 41세인 1864년 3월 10일 대구에서 “등불은 물 위에 밝게 어리되 물과 어긋남이 없고, 기둥은 말라 보이나 힘이 남아 있다(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면서 “높이 날고 멀리 뛰라(高飛遠走)”라는 유언을 남기고 처형당했다. 그가 최후의 시간을 보낸 처형장은 당시 대구 읍성의 정문인 영남제일관 맞은편의 언덕 위였다.
약전골목 맞은편 적십자병원 바로 뒤가 그의 처형장이다. 사람들은 그곳을 ‘관덕정’이라 부른다. 조선 때 무과(武科)시험 관리 관청이었던 관덕정(觀德亭)의 터에 1991년 웅장한 건물이 섰는데, 어떤 이들은 지붕이 마치 정(亭)자처럼 보이는 그 건물 때문에 그곳을 관덕정이라 부르는 오해를 범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건물은 최제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천주교도들의 순교를 기려 건립된 기념관일 따름이다.
관덕정 일대는 별로 높은 지대가 아니지만, 교통과 이동수단이 사뭇 달랐던 예전에는 상당한 언덕배기로 여겨졌을 터이다. 실제로 그곳의 옛 지명은 아미‘산’(峨嵋山)이었다. 아미산은 조선 시대에 군사 훈련장이자 죄인들을 처형하는 장소였는데, ‘잘못된[左] 종교[道]로 바른[正] 세상을 어지럽힌다[亂]’는 엄청난 죄목을 가졌던 사상범(思想犯) 수운도 그곳에서 최후를 맞았다. 수운이 그렇게 대구에서 죽었으니 그의 동상이 대구에 세워진 것도 전혀 뜻밖의 일은 아니다.
최제우의 동상은 관풍루 바로 아래 향나무 숲 속에 세워져 있다. 마치 “높이 날고. 멀리 뛰라!”, “사람이 곧 하늘이다” 하고 목청껏 외치는 듯 그는 오른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공원 입장객들 상당수는 수운을 만나지도 못하는 채로 멀리 사라져 간다. 그들이 동물 구경에 여념이 없고, 동상 자체도 말끔하게 자란 향나무들로 좌우가 웅혼하게 가려져 있는 탓이다. 민족종교 동학이 세를 잃어 교조가 처형당한 자리조차 지키지 못하는 실정이니, 탄생지도 순교지도 아닌 달성공원에나마 동상이라도 세워진 것을 두고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일인가…….
수운이 경상감영에서 처형장인 아미산으로 끌려가는 날,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처형장이, 아미산 관덕정 자리가 아니라 지금의 대구병무청 뒤 전동(前洞) 일대였다는 주장도 있다. 수운을 아미산까지 압송하다가는 운집한 추종자들에게 탈취당할 우려가 있었으므로, 경상감영 바로 앞[前] 군영(軍營) 자리[洞]에서 형을 집행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관덕정 자리를 수운의 처형장으로 보는 게 통설이다.
그나저나, 어찌 사람들만 그의 처형을 지켜보았을까! 지금의 병무청 주변에서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으며 살아온 고목들도 그의 마지막 날을 생생히 보았을 터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병무청 뒤편의 종로초 교정에 버티고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에 ‘최제우 나무’라는 이름을 붙였다. 최제우는 물론 그와 같이 웃고 울었던 당대의 남녀노소도 모두 사라졌지만, 이 고목만은 여전히 그의 죽음을 증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수운이 죽자, 제자들은 그의 주검을 거두어 경주 용담정 아래에서 장례를 지낸다. 그날이 3월 17일. ‘사교’(邪敎)를 일으켜 민심을 혼란하게 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던 그는 1907년 순종으로부터 사면을 받는다. 그러나 동학혁명과 3.1운동에 이어진 그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식민지와 황금만능 세상을 거치며 앙상하게 뼈만 남아버렸다. 봄이 오면, ‘사람이 곧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은 과연 올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