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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관리툴 2013년02월16일 06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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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날] 봄을 기다리는 남자
입춘

이영철(화가) grim-si@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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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정보
봄을 기다리는 남자
41cm x 53cm. 캔버스에 아크릴 채색

입춘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고 있다. 서서히 변방으로 밀려난 겨울도 봄의 중심으로 자리를 내어줄 채비를 하고 있다. 마음이 먼저 그것을 안다. 생전에 어머니가 다니시던 고향집 근처 작은 절에서 연락이 왔다. 입춘이 되는 날이 다가오니 이제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서 법회에 참석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바쁜 핑계를 앞세워 거절하려 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 긴 세월 동안 당신이 해마다 그곳에 가셔서 무엇을 했을까 하는 궁금증과 함께 겨우내 비어있었던 고향집도 둘러볼 생각에 시간을 맞춰 들리겠노라고 절에 연락했다.

매서운 바람은 지난밤 내린 진눈깨비의 흔적을 여전히 거느리고 동토의 대지를 호령하던 입춘 날. 이른 아침에 절을 찾아갔다. 내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는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 하나로 이 절집을 드나드셨다. 왜 그 많은 큰 절을 마다하고 굳이 이 작은 절에 다니느냐고 철없이 물었을 때, ‘애야...어디든 부처님을 모시는 마음이 중요하지!’ 하시며 웃으시던 어머니셨다. 그 후 삼십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 49재와 지난해 당신의 49재도 이곳에서 모셨으니, 우리 가족에게는 분리할 수 없는 인연이 쌓인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나는 여행길에, 혹은 초파일에 적지 않은 사찰을 드나들며 더러 예불도 참석하곤 했지만, 늘 염불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많았을 뿐이다. 그래서 두 분의 49재 때 외에는 이 절에서도 법회 한번 제대로 참석한 기억이 없다. 가족의 안위와 연관시킨 부처님에 대한 일편단심은 오직 어머니의 몫이 전부였다. 어느 해는 삼재가 들었다고, 또 어느 해는 대운이 오니 몸을 더욱 낮추라고 하시던 잔소리를 들으며 최소한 40여 년 이상을 지내온 듯하다.

절에 도착하니 계절이 바뀌듯 이곳의 시간도 흘러 큰 스님을 대신해 작은 스님이 절집 살림을 맡아보고 계셨다. 그러나 큰 스님은 여전히 내 모습만 봐도 어머니가 생전에 스님과 부처님께 그림 그리는 아들 생각을 얼마나 했는지 줄줄이 외우고 계셨다. 그래서인지 스님만 봬도 어머니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애써 출렁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겨우 법당에 들어섰지만, 그 작은 방 풍경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법당 안에는 남자는 드물었고, 특히 젊은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신 노인이 된 여인들만 가득했는데. 하나같이 어머니 모습과 너무나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예불이 시작되자마자 자꾸 눈물이 흘러내렸다. 늘 어머니가 이 절을 다니시며 기도를 하고 돌아와 ‘다 괜찮다! 내가 다 부처님께 빌었다...’하시며 살아온 어머니의 세월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심지어 그 긴 투병의 시간까지도 이렇게 이곳에 앉아서 세상근심과 자식 걱정을 내려놓을 수 없었던 당신의 마음이 보였다. 이제 당신이 떠난 자리를 못난 자식이 채우고 앉아보니, 늘 웃음으로 대하시던 그 많은 날들 뒤에 가려져 있던 어머니의 고단한 인생이 또렷하게 다가왔다. 그리고...그 끝에는 밀물처럼 출렁거리는 죄송함과 그리움이 넘쳐흘렀다.

다 지나간 후에야, 영영 멀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한 점 초상화로 그려지는 어머니의 사랑이 입춘 날 법당 밖에 하염없이 내리는 겨울비에 섞여 내렸다. 그리움도 미움도 나에게서 나간 것은 이미 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잊어야 하고, 비워야 한다. 그러나 이미 가버린 것은 종종 이렇게 느닷없이 되돌아온다. 사랑이 특히 그렇다. 아무리 후회스럽고 아픈 일이라 해도 되돌아 내게로 온 것은 다시 내 것이니, 언젠가 또 나와 이별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마음으로 받아야 한다.

살다 보니 가끔 희망마저 지쳤다고 짐을 꾸리더라도 용기까지 배낭에 담아 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희망이란 친구는 자주 나를 실망시키고, 심지어 속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럴 때일수록 용기는 그 무거워진 짐을 기꺼이 지고 나르는 힘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기어이 봄은 올 것이다. 얼어붙은 마음, 서운하고 그리운 마음을 따뜻하게 녹이는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사랑의 싹을 틔우고 꽃이 피기까지는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인생도 그림과 같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려다 보면 늘 서둘게 되고, 잘 그리려 하게 된다. 갈등과 불만도 거기서 온다. 그저 눈에 본 것을 마음이 시키는 대로 천천히 자유롭게 그려야 좋은 그림이 되는 법이다. 입춘의 길목에서 어머니를 생각한다. 올봄에는 우주를 다 그려낼 것처럼 큰 꿈을 꾸고, 하루하루가 마지막 날이라 여기고 죽도록 살고자 한다. 그렇게 당신이 평생 걱정스러워했던 여린 싹 튼튼히 키워서 쓴, 초록 편지 한 장을 부쳐드리고 싶다.
 

이영철(화가) grim-si@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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