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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CC 제10차 총회를 앞두고 교계 진보, 보수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공동선언문을 채택하고, WCC 개최를 위해 힘을 모으겠다고 다짐했다. 사진 왼쪽부터 김영주 교회협 총무, 김삼환 WCC 한국준비위원회 상임위원장, 길자연 WEA 준비위원장, 홍재철 한기총 대표회장. ⓒ뉴스앤조이 이용필 기자 | | |
지난주 기독교교계는 한 문건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났다. 'WCC 총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공동선언문'이라는 제목으로, NCCK(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김영주, WCC 총회 한국준비위원회 상임위원장 김삼환, 한기총 회장 홍재철, 길자연 네 명이 연명한 문서 때문이다.
WCC는 World Council of Churches의 약자이다. 우리말로 세계교회협의회이다. 7~8년마다 총회를 하는데, 기쁘게도 올해 10월 30일부터 11월 8일까지 부산에서 열린다. WCC는 총회를 통하여 현재 세계 문제에 대해 신학적인 응답을 하고 교회일치와 종교 간 대화, 세계평화를 위해 애쓰는 에큐메니칼교회 구성체이다.
이처럼 중대하고 유의미한 WCC 부산총회를 계기로 해서, NCCK 화해통일위원회는 분단현실을 돌파하기 위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대대적인 캠페인과 더불어, 독일 베를린에서 출발해 러시아를 거쳐 북한을 통과하여 부산까지 기차로 이동하는 '평화열차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쓰레기 공동선언문은 이런 경사스런 일에 똥오줌 못 가리고 끼어든 꼴이다. 기가 막힌 것은 WCC를 용공집단이라고 줄기차게 매도하고, 부산총회 개최를 반대해 온 한기총집단과 합의했다는 점이다. 한기총은 여러 번 말했듯이 기독교를 빙자한 사악한 집단이다. 이미 각종 비리와 부패로 해체위기에까지 직면했는데, NCCK가 되레 기를 살려줘 버렸다. 서명자인 길자연은 <예수읽기 8>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교단 총회장을 하기 위해서, 총대들을 돈으로 매수했고, 얼마 전에는 자신이 경영하는 왕성교회를 아들에게 세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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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13일 채택된 공동 선언문. 한기총은 1월 14일 열린 실행위에서 공동 선언문을 채택했다. | | |
선언문의 내용도 입을 벌리게 했다. "종교다원주의를 배격한다. 공산주의, 인본주의, 동성연애 등 복음에 반하는 모든 사상을 반대한다. 개종전도 금지주의에 반대한다. 성경 66권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로 무오하다"는 등 한국보수기독교의 근본주의 신학의 입장만 담긴 일방적인 선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17일 열린 NCCK 실행위원회는 이 공동선언문을 집중적으로 성토하는 자리가 됐다. 인터넷신문 <뉴스앤조이>는 실행위에서 이 공동선언문을 쓰레기로 규정했다고 보도했다. 에큐메니칼 단체는 공동선언의 네 가지 조항이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진영이 간직해 온 신학적 양심과 신앙고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라는 성명을 냈다. 김영주 총무도 책임을 통감한다며 깊이 사과했다. 이 문건처리는 NCCK 회장에게 위임했는데 쓰레기통에 처박는 절차를 진행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 합의문에서 드러난 것처럼, 근본주의교회들을 기반으로 하는 한기총과 수구기독교세력들은 시대가 바뀐 것을 모르고, 자기들 안에서만 통하는 구식 담론을 사수하는 것을 신앙의 척도로 삼는다. 이런 것을 '죽은 자식 불알 만진다'고 한다.
내가 쓰레기 공동선언문을 길게 말한 이유는 오늘 복음말씀이 이와 매우 유사한 성격이기 때문이다. 우선 오늘 복음말씀인 요한복음을 큰 틀에서 개괄하겠다.
대형교회가 한국교회 주류를 차지하여 말아먹고 있는 현실에서, 예수정신을 지향하는 소수 기독교그룹이 고군분투하는 것처럼, 요한복음을 쓴 요한공동체도 그 당시 주류인 바리새집단의 극심한 박해 속에서 생존을 위해 사력을 다했다.
알다시피 요한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보다 훨씬 후대에 쓰였다. 이 말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선재 하시는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시점이라는 뜻이다. 요한복음은 이 고백을 일곱 가지 표징으로 증언했다. 표징은 요한복음에만 쓰이는, 예수의 신성을 보여주는 그리스도론 용어이다. 즉 요한복음에는 일곱 가지 표징(이적기사)이 나오는데, 이는 예수가 어떤 분이며, 그가 이 세상에 무엇을 가지고 오시는지에 대해 각각의 특징을 담아서 말한다.
오늘 복음말씀은 그 중, 첫 번째 표징이다. 바로 가나라는 동네 혼인 잔치에서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바꾼 사건이다. 흔히 회자하는 대로, 예수의 첫 이적이 물을 술로 바꾸어 술 마시기를 장려했다는 우스갯소리를 넘어서 이 사건에는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다. 어떤 진실이 담겨 있는지 두 가지로 말하겠다.
첫째 이 표징은 의도하지 않은 사건이었다. 제목을 달자면, '예기치 않은 상황발생에 대한 반응'이다. 예수는 표징을 행할 의사가 없었다. 모친 마리아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자, 예수는 말하기를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다. 어머니한테 여자여 라니! 하고 의아해하지 마라. 셈족언어 표현방식인데, 어떤 거리감을 두는 표현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그러나 예수는 잔칫집에 술이 떨어졌다는 현실상황과 자신이 냉정하게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일꾼들에게 자신을 끌어들여서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라고 지시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잔치에서 술이 떨어지면 어떻겠는가? 흥이 깨지는 것은 물론이고, 혼주는 두고두고 말을 들을 것이다. 게다가 모친은 이미 일꾼들에게 예수가 무언가를 할 것임을 알렸다. 예수는 기본적으로 이런 딱한 상황과 어머니의 위신을 모른 체하지 않았다. 인간애가 뜨거운 사람이다. 나는 예수의 인성이 이토록 빛나고 충만하기에 그것이 신성으로 승화하였다고 믿는다.
둘째는 표징이 일어난 도구이다. 그 혼인집에는 유대 사람의 정결예법을 따라 물 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었다. 유대사람의 정결예법은 이렇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어라"(마가 7:3) 유대사람들은 손을 씻는다든지, 몸에 물을 뿌린다든지, 그릇을 씻는 등, 정결의식을 위해 늘 물이 필요했다. 예수의 표징이 일어난 통은 포도주 통이 아니라 정결예법을 위해 항상 있는 항아리 물통이다. 예수는 일꾼들에게 지시하기를,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했고, 일꾼들은 항아리마다 물을 가득 채웠다.
이어서 예수는 "이제는 떠서, 잔치 맡은 이에게 가져다주라"고 했고, 일꾼들은 그대로 했다. 잔치 맡은 이는, 포도주로 변한 물을 맛보았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으나, 물을 떠 온 일꾼들은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잔치맡은 이는 신랑을 불러서 칭찬했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뒤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데, 그대는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지금까지 남겨 두었구려!"라고. 혼인잔치는 좋은 포도주 덕분에 끝까지 성대하게 유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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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한 기적. | | |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나?
요한복음 1:17에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받았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났다"라고 했다. 즉 정결예법을 수행하는 물이 포도주로 바뀐 것은 완전히 다른 질, 새로운 세계가 유대교의 중심인 율법을 접수했음을 상징한다. 유대교는 정결규정을 수도 없이 만들어서 사람들을 속박했다. 그 일을 위해 물이 필요했지만, 예수는 물을 술로 간단하게 바꾸어 놓았다. 즉 613개나 되는 율법조항을 무력화시키고, 예수 그리스도가 선사한 은혜와 진리로 새 질서를 연 것이다. 그것은 혼인잔치 지속으로 상징화됐다.
묵묵히 예수의 지시를 따른 일꾼들은 뜻하지 않은 횡재를 했다. 그리스도의 현존을 경험한 것이다. 이 일꾼들은 남들이 전혀 모르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 생생한 체험자가 됐다. 단언컨대 이들은 이전과 전혀 다른 현실을 살았을 것이다. 경험한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요한공동체가 바리새에게 극심한 박해를 받았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은 이유는 영혼을 개벽시킨 신앙고백 외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너무나 새롭고 충만해서 바리새가 지배하는 옛 세계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었던 체험적 이유도 있다. 내가 근본주의와 결별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그렇다면 답이 나온다. 21세기 대명천지에도 여전히 자본과 권력에 예속되고, 영혼 없는 노예로 살기를 자처하는 민중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아직 한 번도 사람다운 세상이 있음을 깨치지 못한 탓이다. 그럼 어찌해야 하나? 신심으로 깨친 사람이 먼저 보여주는 수밖에. 그것을 전도라고 쓰고 투쟁이라고 부른다. 민주독자들이여, 사람답게 사는 새 세상이 있음을 투쟁으로 전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