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예수읽기 (14)'에서 요한과 예수 두 어머니의 잉태에 대해 말했다. 오늘은 순서상 예수탄생 이야기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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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방 박사들의 경배(The adoration of the magi) Oil on canvas, 1624, Koninklijk Museum voor Schone Kunsten, Antwerp, Belgium ⓒ Rubens | | |
예수탄생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온다. 그런데 같은 인물의 탄생을 말하는데, 두 책의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마태복음에서는 아기 예수가 태어난 후 헤롯왕이 아기를 찾아서 죽이려고 해서, 요셉가족은 급히 애굽으로 피신한다. 뒤늦게 속은 것을 안 헤롯은 분노하여,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온 지역에 사는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인다.
한마디로 베들레헴과 예루살렘 인근 지경은 자식을 잃은 어미들의 울부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다. 또한, 서슬이 퍼런 공포 분위기다. 그런데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부모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율법에 기록한 장남을 하나님께 바치는 정결예식을 행한다. 게다가 성전예언자들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며 마음껏 축복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마태복음 진술에 따르면 예수부모는 애굽에 있어야 한다. 예루살렘성전에 올라가는 일은 언감생심이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마태복음의 공포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한가하고 태평하게 예수부모가 일상적인 일을 행한다. 어느 게 역사적 사실에 들어맞는가? 알 수 없다. 근본주의자들은 둘의 모순을 일치시키려고 억지춘향식으로 이야기를 꿴다. 그러므로 해서 스스로 웃음거리가 된다.
복음서 저자마다 고유한 저술목적에 따라 예수 이야기를 한다는 것, 우리는 각 복음서의 차이를 분별하며 신학적으로 판단하고 고유한 의미를 발굴하기 위해 애써 노력할 뿐이다. 확실히 이것만 보더라도 성경은 역사책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을 말하기보다는 신앙의 진실을 말하기 위해 역사적 소재를 빌린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조금 다른 얘긴데, 같은 차원에서 성경은 과학책도 아니다. 그런데 창조과학회 사람들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하는 언술에 근거해서 창조론을 주장한다. 나도 신앙으로 하나님이 이 세계만물을 지으셨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고백과 과학은 다르다. 천지창조 이야기는 우주만물의 생성기원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포로기 백성의 처지에서 나온 심오한 신학적 배경을 담은 말이다.
하지만 참으로 딱한 일은 아무리 말해도 고집을 꺾지 않고, 창조과학회 사람들은 자기들 주장을 되풀이한다. 근본주의신학의 문자주의 병폐가 이 사람들을 세뇌시켰다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복음말씀이 역사적 소재를 쓰긴 하지만,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것은 오늘 예수탄생의 배경으로 나오는 누가복음 2장 1-7절의 '호적등록 이야기'에서도 말한다. 자고로 통치자가 호적등록을 하는 이유는 인구조사와 세금징수를 위해서이다. 그런데 본문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좀 다르다.
첫째는 옥타비우스 아우구스투스 치하 때 범세계적인 인구조사가 없었다는 거다. 둘째는 실제로 헤롯대왕의 아들 아켈라오가 지배하던 영토인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에 대한 인구조사가 있었는데, 그것은 로마제국이 아켈라오를 추방하고 아켈라오의 땅을 합병한 기원후 6년에 이르러서이다. 시리아총독 구레뇨가 이때 인구조사의 책임자였다. 즉, 이 인구조사는 예수가 태어났을 때가 아닌, 헤롯 대왕이 죽은 지 십 년이 지나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세금징수를 수월히 하려면 그냥 살던 곳에서 징수하면 된다. 그런데 일부러 살던 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서 호적등록을 하라는 것은 행정적으로 악몽이다. 어떤 통치자가 그런 멍청한 짓을 할까?
그러므로 누가복음 탄생이야기는 예수의 부모로 하여금 예수 출산을 위해 베들레헴에 있게 만드는 방법을 마련하기 위해 누가 자신의 상상으로 창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도미닉 크로산 『예수』55-56쪽)
창작하면서까지 예수탄생에 대해 누가가 말하고자 하는 신앙진실은 무엇인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다윗 계통의 메시아라는 신앙고백을 뒷받침하기 위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옮겨가서 예수를 낳은 연유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그럼, 예수출생만 말할 일이지, 왜 거창하게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등장시켰을까?
아우구스투스는 '팍스로마나'(로마의 평화)를 수립한 사람이다. 기원전 29년부터 기원후 14년까지 수많은 전쟁을 치르고 경쟁자들을 제압한 후, 더는 전쟁이 필요 없는 로마의 질서를 정착시켰다. 그의 존재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말하는 한 비문이 있다.
"신께서는 ... 가장 선하신 분, 아우구스투스로 하여금 우리 삶을 복주시고... 또 자비를 베푸셔서, 전쟁을 그치고 만물에 평화로운 질서를 허락하실 분(구세주)을 우리와 우리 뒤에 올 사람들에게 허락하셨으니... 그 결과 우리 신의 출생일은 이 세상을 위한 기쁜 소식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기에... 아시아의 그리스인들은 모든 도시에서 9월 23일에 새해가 시작하는 것으로 지킬 것이다." 비문이 말하듯이 아우구스투스를 구세주로 고백한다.
누가의 의도는 무엇인가? 폭력으로 세계를 평정한 구세주와 또 다른 구세주의 출현을 비교하고자 함이다. 놀랍게도 또 다른 구세주는 포대기에 싸여서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이다. 구세주의 모습이 가난과 갓난아기의 무력성이다. 아우구스투스와 완벽하게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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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doration of the Magi (1660) by Bartolome Esteban Murillo | | |
누가는 매우 솔직하게 구세주의 탄생을 조금의 과장 없이 있는 그대로 증언한다.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그와 같은 여건에 있는 사람들과 같은 처지임을, 예수의 일생과 운명이 누구 편에 서 있을지를 예고하는 것이다.
또 누가복음의 예수탄생 소식은 목자들에게 최초로 전달된다. 유대사회에서 목자들은 가장 천한 죄인그룹이었다. 이스라엘 토양의 특성상 풀을 먹이기가 쉽지 않았고, 그래서 부득이하게 남의 풀밭에서 풀을 먹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런 까닭에 남의 것을 도둑질한다는 누명을 쓰고 살았다. 바로 이런 목자들에게 예수탄생 소식이 제일 먼저, 또 그들에게만 유일하게 알려졌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이 맨 먼저 누구에게 해당하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표이다.
예수탄생소식을 전하는 천사들은 합창한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기득권세력도 부르댈 만큼, 평화가 무색무취한 언어가 돼버렸지만, 사실상 평화는 대단히 정치적인 말이다. 로마군대와 최후의 결전을 앞둔 스코틀랜드 복동부에 있는 저항군의 장군 칼가쿠스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의 약탈자들, 동방도 서방도 그들을 만족하게 하지 못했다. 부에 대해서뿐 아니라 가난에 대해서까지도 그렇게 열심히 탐하는 자들은 인류 가운데 오직 그들뿐이다. 약탈하고 살육하고 훔치는 것, 이런 것들을 그들은 제국이라고 부르고, 황폐를 가져다 놓고는 그것을 평화라고 부른다." 팍스로마나의 실체를 꿰뚫는 말이다.
천사가 말하는 평화는 '팍스 로마나'에 대응하는 마구간의 평화이다. 성탄 때 숱한 인사로 쓰는 평화라는 말의 원래 뜻은 지배체제가 구축해 놓은 '평화'를 뒤엎겠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성탄의 평화는 제국체제에 눌린 사람들에게 전하는 자유와 해방, 구원소식이다.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할 때는 "이제 제국에 눌린 당신은 새로운 구세주 덕분에 해방됐습니다"라는 뜻이다. 로마황제와 그 체제에는 엄청난 반역선언이다.
힘이 없어서 전적으로 타자의 손에 의지해야 하는 구세주의 무력성, 그 소식이 가장 비천한 자에게 알려져서 주류세상의 주목에서 완전히 빗겨난 탄생이 예수 탄생의 신앙의 진실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용감하게도 이 반체제선언을 공식화하며 예수를 따랐다. 왜냐하면, 그들 계급이 마구간에 태어난 구세주와 유유상종이기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처럼 예수의 평화소식이 체제전복적인 성격인 데 비해 오늘날 실상은 어떤가? 원래 복음에서 한참 떨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을 되찾아가야 한다. 되찾을 수 있을까? 하늘의 자비를 구할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