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이 뱀이 되었는지 2012년 임진년이 2013년 계사년에 자리를 내어 주었습니다.
60년 만에 첫 폭설로 온 천지가 하얗게 순백색으로 뒤덮였지만 이내 그 하얀 눈은 검고 질척한 눈으로 변해 꾸물꾸물 거리마다 넘쳐 납니다. 하늘은 희끄무레한 안개로 뒤덮여 지척도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엉금엉금 기어가는 차들과 넘어질세라 살금살금 걷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니 2013년 계사년으로 시작될 우리의 운명도 이러한 거리의 풍경을 닮게 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지난해 대선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동자들이 또 죽었습니다. 민권연대 한 분까지 포함해 다섯 분이 목숨을 스스로 끊었습니다. 대구에서도 사람 사는 세상을 노래하던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이어지는 죽음의 행렬에 속수무책인 우리는 죽어서야 겨우겨우 고통을 망각할 수 있는 세상에 애도를 표시할 뿐입니다.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다른 사람들의 운명을 훼방 놓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돌아가건만 나는 내 존재의 알리바이에 솔직하지 못했다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알리바이를 세워 보고 궁리해 봐야 범죄 사실이 탄로나듯이, 내가 있어 세상이 돌아가고 다른 사람에 대한 애정을 베풀고 도와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존재의 알리바이를 주장한들, 나의 존재가 타인의 운명에 장해물이 되는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타인에게 범죄자입니다. 감히 얼굴을 들어 타인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는 그런 범죄자입니다. 내가 존재하고 살아가며 하루 세끼 밥을 먹고 배설하는 행위 자체가 내가 타인에게 범죄자라는 사실을 숨기는 알리바이일 뿐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과 연대하고 다른 사람에게 애정을 베푸는 것은 그 존재의 알리바이를 조금이라도 덜려고 하는 몸부림입니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았다는 부모님의 탄식은 자식의 고통 앞에 너무도 무기력한 나머지 자신 존재의 알리바이를 자기 자신에게 되먹이자 터져 나오는 슬픔의 함성입니다.
내가 타인에게 범죄자라는 사실에서 벗어나려면 나의 존재의 알리바이에 대해 지난한 반성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연대는 연대가 아닙니다. 주위에 난무하는 소통, 연대, 사랑은 존재의 알리바이를, 내가 타인에게 범죄자요 훼방꾼이라는 사실을 숨기려는 알리바이일 뿐입니다.
타인의 눈을 응시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타인의 얼굴을 응시할 만큼 나의 존재의 알리바이에 대해 깊은 반성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타인의 얼굴이 아니라 타인의 죽음의 얼굴을 마주하여 애도로 끝나는 것은 내가 아직 반성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2013년 계사년, 영화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대사처럼 “나는 누구인가”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내 존재의 알리바이를 불식시키는 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알리바이이고 이 알리바이는 그 무엇으로도 은폐시킬 수 없다는 자각이 있을 때 비로소 사랑도 연대도 소통도 가능해집니다.
애도를 넘은 핏빛 같은 반성으로 계사년이 시작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모든 번민의 흔적들을 올해에도 <뉴스민>에 차곡차곡 담겠습니다.
비극으로 문을 연 올 한 해에도 강건하다면 그것이 희극 아니겠습니까. 희극 개봉일은 아직 멀었지만 말입니다.
2013.1.1
편집위원장 이득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