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결과는 민주시민 모두를 멘붕에 빠뜨렸다. 이 시련을 어떻게 극복할까? 당면한 문제의식 또는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극복하느냐는 사람이냐, 노예냐, 주체적인 인생이냐, 의존적인 인생이냐에 따라 판단과 결정이 극과 극이다.
성경은 각종 기구한 운명에 처한 사람들이 자신을 덮친 운명을 어떻게 뚫고 나갔는가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기도 하다. 특히 신심으로 위기를 극복한 사람들의 사례를 통해 우리 인생을 인도한다.
오늘은 그 중 두 인물, 엘리사벳과 마리아를 조명하겠다. 두 사람은 사회적 관습과 생물적 환경을 뛰어넘어서 아이를 잉태했다. 엘리사벳은 원래 임신을 하지 못하는 여자였다. 더구나 노파가 돼서 아이를 가질 수도 없었다. 그런데 제사장인 남편 사가랴가 주의 성소에서 천사로부터 주님께서 아들을 낳아 줄 것이라는 고지를 받은 후, 말 못하는 사람이 돼 버려서, 경사와 슬픔이 동시에 닥쳤다.
엘리사벳은 생물적인 나이를 훨씬 지나서 아이를 잉태한 것이 부끄러워서 다섯 달 동안 숨어 살았다. 늙어서 아이를 갖는 것이 부끄러운 것은 사실인가 보다. 박정희 모친이 딸의 임신과 같은 시기에 막내 박정희를 임신한 것이 남세스러워서 몇 번이고 아이를 지우려다가 실패했다고 한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태어났는데, 어떤 사람은 세계변혁을 트는 여명이 되고, 어떤 사람은 독재의 화신이 된 것을 보면, 인생은 정말이지 오묘하다.
마리아는 어떤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이다. 그런데 졸지에 아이를 잉태했다. 혼인하기 전이고, 약혼자의 아이도 아니다. 그 경위가 어떤 것일까 상상은 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실체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약혼자 요셉이 마리아의 정체불명 임신에 충격받고 배신감에 빠져서 동네방네 소문내 버리면, 마리아는 율법에 따라 꼼짝없이 돌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다. 다행히 요셉은 조용히 지나갔다. 그리고 사회적 관습상 용납 안 되는 이 사건에 대해 성경은 기가 막히게 풀었다. "성령이 그대에게 임하시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대를 감싸줄 것이다."(누가 1장 35절)
처녀의 잉태가 생물학적으로는 불가능하고, 그래서 사회적으로 어떤 곡절이 있을 것으로 이해하지만, 그것을 훌쩍 뛰어넘어서 하나님의 영이 잉태시켰다는 초월적인 신앙고백 언어로 정리했다. 그렇다. 인생을 살면서 사안과 사물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자신의 삶과 세계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세속의 눈으로 보면, 결코 환영받을 수 없는 잉태를 한 사람들이지만, 놀랍게도 성경은 이 일로 인해 두 여인이 극심하게 불행해졌다는 말이 없다.
오히려 두 여인은 자신의 잉태사건을 추호도 비극적으로 여기지 않고, 최고의 경의와 신앙으로 고백한다. 온통 기쁨과 은혜가 충만하다.
엘리사벳을 보자. "주님께서 나를 돌아보셔서 사람들에게 당하는 내 부끄러움을 없이해 주시던 날에 나에게 이런 일을 베풀어 주셨다."(누가 1장 25절) 남들이 뭐라고 그러든 아이 낳지 못하는 여인이라는 불명예를 씻겨 준 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다.
마리아를 보자. 가브리엘 천사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놀라운 소식을 전하면서 최고의 찬사를 보낸다.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야,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하신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마리아는 기절초풍할 일을 겪었지만, 놀라울 정도로 담담히 순종한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는 아이의 잉태를 천사가 말한 관점으로 받아들이겠다고 고백한다. 바로 이 점이다. 마리아가 복된 이유는 예수의 어머니여서가 아니라, 어머니가 되리라는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야기에서 보듯이,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찾아가서 만난다. 이 만나는 장면을 주목하자. 기구한 운명을 당한 사람들이지만, 신세한탄하거나, 비탄에 잠겨 있거나, 자기 운명을 탓하면서 질질 짜지 않는다. 분위기가 극히 밝다. 숨어 살았던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방문을 받자,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큰 소리로 외친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그 사람 영혼이 최고가 됐다는 뜻이다. 교회는 '성령충만받으라'는 인사말을 한다. 그만큼 좋은 말이다. 그리고 큰 소리로 마리아를 축복한다. "그대는 여자들 가운데서 복을 받았다"고. 이스라엘에서 처녀가 애를 가진 일은 돌 맞아 죽는 저주인데, 엘리사벳은 반대로 최고의 축복을 하는 거다. 너무 좋으니까 뱃속의 아이도 기뻐서 뛰놀았다고 한다.
엘리사벳의 환대를 받은 마리아가 답가하는데, 15살 여자의 노래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내용이 담대하다. 이 노래가 너무 고귀해서 교회는 '마리아의 찬가'라고 명명하고 기념한다. 변혁적이다 못해 전복적이다. "그(하나님)는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 보내셨습니다."(누가 1장 52-53절) 이미 마리아는 어린 나이이지만, 권력의 폐단이 민중을 압제하는 현실을 깨우친 게 분명하다. 그런 경험과 각성이 없으면 이런 전복적인 노래를 할 수가 없다.
두 사람은 비정상적인 상황의 잉태에 대해 비관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으로 돌파했다. 율법이 어떻든 사람들 시선이 어떻든 잉태한 아이를 온전히 낳기 위해서 세상 통념과 정면으로 맞섰다. 어머니의 생명력이 담대한 여인을 만들었다. 바로 이 두 여인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다. 두 어머니의 생명력이 세계를 변혁하는 두 인물을 낳았다. 예수와 요한은 그런 어머니의 정신세계 속에서 자랐기에, 세계에 하나님나라를 던져서 변혁을 선도하였다.
사실 마리아의 찬가는 실제 마리아가 읊은 게 아니라 누가복음 집필에 앞서 유행한 노래이다. 예루살렘 원시교회가 부르던 노래라고 한다. 왜 예루살렘 원시교회는 이런 전복적인 노래를 불렀을까? 그들은 가난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서 여러 군데에서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연보를 한다고 말했다. 예루살렘교회는 정치, 사회, 경제에서 못난 자들이었지만, 예수정신은 투철했다.
마리아의 찬가는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이들이 하나님의 구원이 담긴 예수사건을 기리는 노래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은 예수사건을 경험한 후,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잘난 자들 대신 못난 자들을 거두신다는 굳은 확신으로 자기시대를 감당했다. 결코,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예수와 신앙을 팔지 않았다. 권력 앞에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들의 체험과 신앙이 녹아든 노래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노래로 헌정할 수 있었다. 마리아 역시 자신들과 똑같은 삶, 생각, 신심을 가졌기에.
고난에 처한 사람들이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자존감을 지키면서 사는 길이 딱 하나 있다. 서로 연대하는 것이다. 약자들이 강자들에게 먹히지 않고 사람답게 사는 길이 딱 하나 있다. 약자끼리 연대해서 강자가 약탈하지 못하도록 투쟁하는 것이다. 대중이 주류에 종속돼서 마름이나 노예로 살지 않고 자유인으로 사는 길이 딱 하나 있다. 주류세계로 가지 않아도 지장 없도록 그들만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자신에게 닥친 기구한 운명에 비관하지 않고 성령으로 위기를 승화시킨 여인들처럼, 멘붕을 떨치고 다시 일어나자. 할 일을 하자. 지구는 돌고 세상은 바뀐다. 그리고 역사는 발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