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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관리툴 2012년12월11일 18시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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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백목사의 예수읽기 (13)
누가복음 3:1-6 "새로운 길을 닦아라"

백창욱(대구새민족교회) baek0808@hanmail.net

기독교는 12월 2일, 대림절 첫 번째 주일부터 새로운 한 해가 시작한다. 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기쁨을 기념하며 그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계절이다. 대림절 주일이 네 번 지나면 성탄절이 온다. 그러므로 대림절 교회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의미에 대해 더욱 특별히 조명한다.
 
오늘 복음말씀 중, 1,2절을 소개하겠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풀기 위해서이다.

"디베료 황제가 왕위에 오른 지 열다섯째 해에, 곧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유대를 통치하고, 헤롯이 분봉왕으로 갈릴리를 다스리고, 그의 동생 빌립이 분봉왕으로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을 다스리고, 루사니아가 분봉왕으로 아빌레네를 다스리고,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좀 특이한 점이 있다. 황제를 필두로 하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는 권력자들 이름을 쭉 나열한다. 이유가 뭘까? 객관적인 역사를 알리고자 한다면, 단지 황제만 소개하면 될 터이다. 즉 "디베료 황제가 왕위에 오른 지 열다섯째 해에, (나머지는 모두 황제의 시다바리이므로 생략해도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라고 해도 된다. 그런데 일일이 총독, 분봉왕, 대제사장들까지 나열했다. 왜?
 
이해를 돕기 위해 오늘날 한국상황에 맞게 패러디해 보겠다.

"미 대통령 오바마가 2012년 재선에 성공한 해에, 주한미군사령관 제임스 서먼은 이남 땅을 지배하고, 굳건한 한미동맹 하에 이명박이 다스렸고, 이어서 박근혜가 강력한 차기집권자로 나라를 다스리려 하고, 그와 동맹군인 친일 독재 재벌세력은 나라 요소요소에서 백성을 다스리고, 대형교회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권력을 지지하는 나팔을 불고 있을 때에..."

이제 눈치 챘는가? 누가 저자는 객관적인 사실을 나열함으로 역설적으로 이 시대가 얼마나 어두운 시대인가를 증언한다. 실상 객관적인 사실을 넘어서, 주관적인 뜻을 표현할 수도 없다. 최종적인 문제해결은 폭력으로 결론 나는 공포시대에, 지배자에 대해 공개적으로 부정적인 의사표시를 하는 것은 죽기를 각오해야 한다. 그런 현실인지라 복음저자는 그냥 있는 그대로 사실을 나열할 뿐이다. 그러나 읽은 사람들은 그 행간을 대번에 안다. 지금이 어둠의 시대라는 것을, 우리를 덮고 있는 것은 절망뿐임을.
 
하지만 거대한 반전이 일어났다.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요한에게 내렸다." 왜 하나님의 말씀이 거룩한 성전이나 정치경제의 중심인 예루살렘에 내리지 않고 광야에 내렸을까? 온통 권력의 음모만 횡행하는 성전이나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스며들 여지가 없어서이다. 반면에 광야는 권력지배가 미치지 못하는 순결한 곳, 말하자면 해방구이다. 하나님말씀을 맞이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그런 까닭에 광야에 하나님 말씀이 내렸다.

오늘날 광야는 어디인가? 시대의 진실을 알리는 현장이다. 대한민국의 실상을 제대로 알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 지난 5년 동안 원통한 일을 당하고, 신음하는 산하와 사람들이 울부짖는 현장으로 가야 한다. 제주강정 해군기지 건설현장, 용산 남일당, 대한문 농성촌, 울산과 평택, 밀양과 청도의 송전탑 현장이다. 파헤쳐진 4대강, 그리고 잘못된 정책으로 소외당한 사각지대 약자들의 현장도 있다. 수백만 마리 도야지를 묻은 삼천리 방방곡곡도 잊을 수가 없다.

권력자들은 현장을 싫어한다. 이명박이 인기관리를 위해 시장은 가지만, 쌍용이나 용산, 강정에 간 적은 없다. 결코 현장에 나타나지 않는다. 왜? 자신들의 악독, 무능, 부패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므로 그들은 본능적으로 현장을 회피한다. 그들은 깊은 장소에서 오직 지시만 내린다. 그러므로 더더욱 그들은 하나님 말씀인 시대의 진실을 접할 기회가 없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온통 어둠이 지배하는 현실에 하나님의 은총이 내려왔다. 복음이 시작됐다. 쟁쟁한 권력자들과 대조적으로 야인에게 하나님 말씀이 임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요한은 파격행보를 한다. 요단강 주변 지역에 다니면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다. 침례의식은 이방인이 유대교에 입교할 때나 받는 거였다. 유대인들은 혈통적으로 또 율법 때문에 구원은 따 논 당상이고, 그래서 따로 침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한은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들에게 회개하고 그 표시로 침례를 받으라고 외쳤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죄사함 형식을 일거에 허무는 파격이다. 회개가 필요한 유대인들은 성전에 가서 자기 죄를 대신할 짐승을 바쳤다. 그러나 요한은 성전 대신에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라고 한다.

▲예수는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왜 성전이 아니고 요단강인가? 요단강은 광야생활을 마친 조상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처음 이적을 경험한 강이다. 구약성서 여호수아서 3장을 보면, 제사장이 법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서자 강물이 멈췄다. 그리고 애굽에서 나올 때처럼 강이 갈라지고 백성들은 맨땅으로 지나갔다. 즉 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이유는 조상들이 요단강을 건너면서 야웨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함으로 과거의 때를 벗었듯이, 우리가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외침이다. 이제 혈통성에 기대어 거짓안전에 빠지지 말고 이 썩어빠진 성전체제 권력자들에게 휘둘리지 말고, 조상들이 요단강에서 겪은 것처럼, 순수하게 하나님을 대면하자는 초대이다.

누가저자는 요한의 행동을 이사야 예언의 성취라고 하면서 이사야서 40장 3-5절 말씀을 인용했다. 이사야 40장은 제2이사야의 저작이다. 제2이사야는 바벨론포로로 끌려가 있는 이스라엘에게 이제 너희가 본토로 돌아갈 것이라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예언자이다. 누가저자가 제2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한 이유는 자기들 시대 어둠을 반전시켜 줄 말씀으로 제2이사야의 예언이 가장 적절하기 때문이다. 제2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한 누가 3:4-5절을 요약하면,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평평하게 하고, 굽은 길을 곧게 하고, 험한 길을 평탄하게 해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이다. 그런데 이 말은 로마제국 실정을 아는 사람에게는 좀 생뚱맞다. 왜냐하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로마는 이미 모든 속주 땅까지 평탄한 길을 닦아놨기 때문이다. 로마가도는 팍스로마나(로마의 평화)를 유지하는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

로마가도를 모를 리 없는 누가저자가 새로운 길을 내자는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제국의 지배체제에서 벗어나서 다른 길, 다른 대안을 만들자는 선언이다. 그 길은 어떤 길인가? 글 맨 앞에 소개한 누가 3장 1,2절에 나오는 권력자들을 보라. 그들은 오직 통치하고 다스리고 다스리고 다스릴 뿐이다. 그들은 다스릴 뿐이고 백성은 다스림을 받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예수는 섬기는 사람이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누가 누구를 다스리는 세상이 아니고 오직 서로 섬기는 세상이다. 그러므로 섬기는 세상을 구하는 사람들이 로마지배체제를 따라갈 수는 없는 일이다. 요한은 선발대로 앞장서서 이 일을 수행했다. 황제의 소식이었던 복음과 황제의 보호를 구원이라고 알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섬기는 지도자 예수 그리스도가 새로운 복음이고 구원이라고 선포했다.

나는 섬기는 지도자상이 꼭 교회 울타리에만 필요한 덕목이라고 보지 않는다. 민주주의 시대는 세상 통치자들도 섬기는 지도자가 될 것을 요구한다. 그동안 지배자들이 퍼뜨리는 거짓선전에 세뇌돼서 국민의 절반은 분간력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어리석게도 자신들이 계속 노예가 될 것을 모르고, '독재자의 딸'에게 변함없는 지지를 보내고 있다. 한 번도 민주공화국을 살아본 경험이 없어서 생기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자각하고 깨어있는 민중이 역사의 물꼬를 터나간다.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에 쩔어있는 노예살이를 거부하고 사람 사는 세상으로 가자고 나선다. 그 덕에 인류가 발전했고 역사의 정의를 세울 수 있었다. 이제 이번 대선에서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울 때이다. 새로운 길을 가자는. 함께 하자.
 

백창욱(대구새민족교회) baek08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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