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사는 인문계 고등학교 학생. 보통 이런 정체성을 가진 사람 대부분은 대학 진학을 고민한다. 사회적으로도 고등학생이 수능을 치고 대학으로 진학하는 것이 당연한 관습인 것처럼 취급하고 있다. 초등학교를 거쳐 중,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대부분 사람은 '거기서부터 인생이 시작된다'고 한다. 그전까지 시간은 단지 대학을 나온 이후의 준비과정이라고.
물론 이 틀을 벗어나는 사람도 많지만, 사회는 그런 소수자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있다. 검정고시를 치르거나 대학을 진학하지 않으면 마치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 마냥 이상하게 생각한다. 말 그대로 '혐오'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흔히들 말하는 문제 학생이라거나, 성적이 부진하다거나. 결론적으론 ‘대한민국의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했어! 이 부적응자!’라는 사회적 편견으로 틀에 박히지 않은 사람을 색안경 쓰고 바라본다. 그 사람들은 많은 차별적 대우를 견디고, 또한 남들보다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많은 사람은 그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남들이 겪는 것을 똑같이 견디지 못했으니 그 정도의 위험은 감수하라는 식으로. 대한민국 모두가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고 있는데, 남들은 다 겪는 그 어려운 나날들을 나 몰라라 하고 피하는 것은 결국 현실도피니 어쩌니 하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갖다 붙인다. 결국, 수많은 청소년은 자신의 의지든, 아니던 어쩔 수 없이 초중고, 그리고 대학교로 몰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와중에 나는 그 모든 시선을 무릅쓰고 그 틀을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걸어 나왔다.
돈보다는 커피를 사랑하게 된 한 남자 고등학생
나는 커피를 사랑하는 고등학생이다.
중학교 때 어찌어찌 엄마가 마시던 손 내림 커피를 얻어 마셨는데, 그 향과 맛에 반해 그때부터 커피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몸에 안 좋다며 마시지 말라는 부모님의 잔소리도 뒤로하고 몰래몰래 커피전문점에서 한두 잔씩 마시곤 했다. 학년이 올라가고서는 매일 카페를 들락날락 거렸고, 매우 다양한 종류의 커피를 시도했다.
아메리카노나 에스프레소는 물론, 시럽과 파우더를 추가한 커피들까지. 그렇게 나의 혀는 커피 맛에 길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매일같이 마시는 커피에 비해 나의 용돈은 너무 부족했고, 그렇기에 집에서 내가 스스로 커피를 만드는 방법을 모색하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는 스스로 손 내림 커피를 만들어 마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많은 커피 원두의 향과 맛에 익숙해지기 시작할 때, 나와 커피는 때래야 땔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좀 더 많은, 그리고 자세한 커피에 대한 정보를 슬쩍슬쩍 공부하다가 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다양하고 매력적인 커피, 그리고 그 커피를 다루는 직업들이 많다는 걸 발견했고 난 순식간에 그곳에 매료됐다. 그때부터 나의 진로를 커피로 해야겠다는 결정을 했고 이 결정은 몇 년 넘게 바뀌지 않고 있다.
사실 많은 사람이 직업을 선택할 때의 가치기준이 다르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대부분 사람들은 '돈'이라는 가치기준을 두고 직업을 선택한다. 그렇기에 학교에서 원하는 직업을 보면, 열에 여덟 이상은(사실 아홉 이상이라 하고 싶지만) 전문직을 선택하거나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학과 중 가장 성적이 높은 학과, 혹은 높은 대학을 선택한다.
이런 현상이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어디서나 두드러지는 편이다. 더군다나 학부모도 그런 현상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자식이 가장 좋은 대학, 가장 좋은 학과(거기다 좋은 직업이 추가되면 금상첨화)에 골인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물론 나의 부모님도 다를 바는 없었다.
처음 커피로 진로를 정하고 싶다고 했을 때, 그저 나를 한때 겉멋 든 미숙한 청소년으로 보았고, 나의 결정은 주위에 늘어나는 수많은 카페에 휘둘려 우발적으로 결정한 것으로 여겼다. 사실 누구보다 나의 대학진학, 그리고 좋은 학과에 들어가는 걸 바란 사람이기도 했다.
그동안의 노력이 '커피'에 무너지는 걸 본인들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진로를 선택하는 가치기준은 ‘돈’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 명절 때마다 나의 진로를 비웃으며 “넌 그냥 공장이나 들어가라”, “군대 말뚝 박아라”, “물장사해서 먹고살겠느냐”라며 나를 비아냥거렸다. 그렇게 집안과 나의 갈등은 깊어갔고, 부모님과 나 사이에 감정의 골은 더 깊어졌다.
학교에서 대학을 안 간다는 학생
학교에서도 나를 향한 취급은 마찬가지였다. 진로를 선택하고 교과공부는 뒷전이 됐다. 커피공부와 함께 커피와 관련된 진로를 탐색했다. 자연스럽게 성적은 떨어졌고, 담임선생님은 내가 헛바람이 들어 공부하지 않는 슬럼프로만 취급하고 나에게 끝없이 성적상승을 요구했다. 그렇게 또 1년.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내가 진로를 선택하고 공부하는 가치기준은 인정받지 못했다. 난 그저 사춘기 시절 잠시 방황 중인 청소년으로 취급됐다. 그와 동시에 나의 진로는 잠시 지나가는 바람이라며 크게 나의 진로 고민을 공감해 주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고, 나의 모든 주위환경은 대학으로 나를 몰아넣었다. 그것도 아주 폭력적으로. 집, 학교 할 것 없이 나를 자신이 원하는 인간상으로 만들려고 했고, 끝도 없는 스트레스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학년 초, 수많은 폭력에 도저히 견디지 못한 나는 가정과 학교와의 완전한 분리를 꿈꾸고 집을 나왔다.
내가 원했던 공부를 했고, 나의 모든 시간은 나의 의지대로 사용했으며, 한 시간이라도 느긋하게 산책하는 것마저 나의 생활 곳곳에 긍정적인 효과를 미쳤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고, 나는 더 폭력에 예민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내 꿈의 한발짝. 바리스타가 되었다.
지금은 어찌어찌 소재가 들켜 집으로 끌려 들어와 다시 학교에 묶이게 되었다. 다시 나의 시간은 누군가에 의해 굴러가고, 내가 있을 공간도 스스로 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학교와 가정 둘 다 어느 정도 나의 결정에 대해 본인의 의사를 주입하는걸 포기한 듯 보인다.
어찌 보면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청소년 중에서는 아주 많은 혜택을 얻은 것이다. 학교에 존재하는 동안 반 안에 있는, 혹은 나를 보는 학생들은 '대학'이라는 당연한 명제에 의문을 던지기도 했고,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나를 걱정하기도 했다. "대학 안 가면 뭐 하려고?" 라고.
그러나 나는 항상 생각한다. 막연히 누군가 정해준 진로를 향해 아무것도 모른 채 걸어가기보단 나 스스로 걸어갈 길을 닦아 가는 것도 설레고 즐거운 일이라고.
청소년도 주체적인 인간이다.
내 주위 많은 학생은 여전히 조마조마하고 겪어보지 않음에 대한 공포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대학, 혹은 재수를 하고 그렇게 남은 시간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 공부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아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이다.
하지만 난 내년 1월 에티오피아로 떠난다. 여전히 막연하고 보이지 않는 나의 미래를 위해 미약한 발걸음을 내딛으려 한다. 그리고 재배, 감별사, 로스터, 손 내림 전문가, 바리스타, 생두무역상 등등. 커피 한잔에 닿은 수많은 사람의 숨결을 공부할 것이다.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누군가가 걸어갔고, 그 희미한 결과를 볼 수 있는 사람에 비해 나는 그들과 너무나 다른 길을 선택했다. 또, 너무나 막연하다. 하지만 나를 매료시킨 커피라면 그 길 끝에 실패가 있더라도 걷는 동안은 행복할 것이다. 비단 이것이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여전히 한국사회는 대학이라는 한 가지 답안만 주입하고 있다. 학생들도 그 한 가지 목표를 바라보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선택하는 길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 중에선 이미 자신이 원하는 꿈을, 미래상을 포기한 사람도 많다.
이미 사회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원화되었다. 획일화된 커리큘럼과 경쟁만을 부추기는 경쟁교육은 사라져야 한다. 지금의 경쟁사회는 이미 너무 많은 희생을 담보로 이루어졌고, 그 부작용 또한 많은 사람의 피로 얼룩져있다.
하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은 학생들의 사고와 진로를, 취향을 단순하게 만든다. 그렇게 울부짖는 창의력은 희미해진 지 오래다. 대학은 필요하다. 다만 그 의미가 썩어 문드러진 대학은 필요 없다. 정말 큰 배움을 위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 적어도 그 귀중하고 신중한 선택을 무시하고 자신의 취향대로 바꾸지는 말아야 한다.
언젠가는 청소년 스스로 선택이 한낱 "사춘기 때의 방황"으로 치부되지 않는 사회가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