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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관리툴 2012년11월17일 02시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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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날] 정만진의 대구여행 (11)
대구에 '왕건'이 왜 이리 많을까

정만진(소설가) daeguedu@daum.net

▲드라마 <왕건>의 한 장면. 왕건과 궁예

대구에는 고려가 남긴 '보물'이 별로 없다. 경북대학교 야외 박물관과 동화사 경내에 있는 석조부도 두 점(각각 보물 258호, 601호)이 눈에 띌 지경으로 빈약하다. 하지만 부도 정도로는 관광객의 발길을 끌지 못한다. 경북대 박물관에 있는 보물 271호 수능엄경 권 제10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 외에 팔공산 북지장사의 3층석탑, 동화사 염불암의 청석탑 및 사찰 뒤 큰 바위 양면에 각각 새겨진 마애여래좌상 및 보살좌상, 신무동의 마애불좌상 등의 고려 유물도 있지만 그들은 모두 문화재 등급상 보물보다 한참 격이 떨어지는 유형문화재에 지나지 않는다.

▲독암서원(좌), 독자암(우)

그러나 대구에는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고려의 흔적이 있다. 왕건의 발자취가 바로 그것이다. 왕건군(軍)이 견훤군에게 부서진[破] 고개인 파군재[破軍峙]가 있고, 도주하던 왕건이 혼자[獨] 앉아[坐] 있었던 바위[巖]인 독좌암(獨坐巖)도  있다. 양쪽 군사들이 날린 화살[箭]이 강물[灘]처럼 흘러다닌 시내인 살내[箭灘]가 있고, 왕(王)이 도주할 때 넘은 산인 왕산(王山)이 있으며, 왕이 숨어있던 동굴인 왕굴도 있다.

또, 왕건이 직접 이름을 지어 붙였거나 그와 연관하여 동명이 생겨난 곳도 여럿 있다. 불로(不老)동은 노(老)련한 청장년 사내들이 보이지 않는[不] 동네라고, 연경(硏經)동은 선비들이 공부하느라[硏] 책[經] 읽는 소리가 낭랑하다고 왕건이 그렇게 이름붙였다.

군사들에게 게으름[怠]이 없어야[無] 한다고 훈시한 무태(無怠)동, 왕(王)이 없어진[失] 동네라 하여 실왕(失王)리, 어느 정도 멀리 도망을 쳐서 걱정이 줄어들자 굳었던 왕건의 마음[心]이 놓였다[安]는 안심(安心), 지나갈 때 반(半)달[月]이 밤(夜)길을 비추었다는 반야월(半夜月) 등은 왕건의 발걸음에서 이름이 연유한 곳들이다.

그런가 하면, 사찰과 서원 몇 곳의 이름에도 왕건과 관련한 옛일의 내력이 스며들어 있다. 그가 숨어[隱] 지낸 흔적(跡)이 남은 은적(隱跡)사, 잠시 머물며[臨] 쉰[休] 임휴(臨休)사, 안(安)전하고 편안하게[逸] 지낸 안일(安逸)암, 혼자[獨] 앉아있었던 바위[巖]에서 이름을 따온 독암(獨巖)서원이 바로 그들이다. 국가 고려는 비록 대구에 많은 보물을 남기지 않았지만, 태조 왕건 본인은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수많은 발자취를 팔공산에서 앞산 일대에 이르기까지 줄지어 남기고 있는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신라를 지원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팔공산 동화사 아래에서 견훤과 대회전을 치른다. 이 한판 승부가 바로 동수(桐藪)대전이다. 동수(桐藪)의 '수(藪)'와 동화사의 '(寺)'는 같은 뜻이므로(동수는 동화사의 다른 이름) 동수대전은 곧 동화사대전이다. 싸움터는 은해사 입구 태조지(太祖旨)에서부터 동화천이 금호강과 만나는 살내[箭灘]까지 매우 넓었지만, 승부를 판가름한 일전은 동화사 들머리인 파군재 일대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전투의 이름이 그렇게 정해진 것이다.

▲금호강
▲동화천

그러므로 동화천과 금호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일대에 '화살[箭]이 내[灘]를 이루었다'는 뜻의 살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왕건군과 견훤군이 치열하게 싸우는 과정에서 무수한 화살이 허공을 가르고 동화천 양옆으로 떨어졌는데, 화살이 동화천을 뒤덮어 새로운 내를 이룰 지경이었다는 뜻인 까닭이다. 그러나 지금 그 살내의 동화천은 대구 지역에 유일하게 남은 자연 하천이니, 이 또한 화살을 모두 걷어내느라 노고를 아끼지 않은 우리네 선조들의 덕분인가.

▲연경동과 동화천

대구에서 금호강 무태교를 건너 파군재 삼거리로 향하다가 왼쪽 산골짜기로 접어들면 연경마을로 가게 된다. 동수대전의 한 귀퉁이었던 연경 마을은 본디 글 읽는 소리로 가득찬 학문의 요람이었다. 마을 이름이 경(經)전을 공부한다(硏)는 의미인 것만 보아도 그런 추측은 가능하다. 언젠가 왕건이 이곳을 지나갔는데,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나무나 낭랑하여 그가 지명을 그렇게 붙였다고 전한다. 금호강과 동화천의 접점인 살내[箭灘]에서 파군(破軍)재로 가는 무태(無怠) 지역 중간쯤에서 다시 도덕산(道德山) 아래로 굽어 들어가야 나오는 이 마을은 21세기인 현재에도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적요한 골짜기이니, 그 당시에야 얼마나 고요한 산촌이었을지는 충분히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도덕암

송림사 맞은 편에서 무태 지역으로 이어지는 산에 붙은 도덕산이라는 이름도 연경마을에서 유래한다. 글 읽는 선비들이 많아 도덕에 관한 한 연경마을을 따라올 곳이 없다는 뜻에서 동네 뒷산에 '도덕산'이라는 고상한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대구 최초의 서원인 유교의 요람 연경서원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린 지 오래인 지금, 도덕산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는 모과나무(수령 800년)를 자랑하는 불교 사찰 도덕암만 의연히 남아 있고, 연경마을 자체도 도시 재개발 국면을 맞아 거의 대부분이 철거되고 폐가만 여기저기 어수선하여 보는이의 마음을 자못 쓸쓸하게 한다.

무태는 연경마을 옆을 휘돌아 흐르는 동화천(동화사에서 연유된 이름) 좌우의 들판 지역이다. 나태(怠)가 없다[無]는 뜻인 무태마을의 이름도 왕건이 붙인 것이라 한다. 동화천 주변에 주둔할 때 왕건이 군사들에게 견훤군과 전쟁 중이니 절대 게으름[怠]이 없어야[無] 할 것이라고 훈시했다는 데서 그 이름의 유래를 찾기도 하고, 이 마을 사람들이 부지런한 것을 보고 그렇게 작명을 해주었다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무태라는 지명은 왕건이 이곳을 직접 밟은 역사의 흔적임에 틀림이 없다.

▲신숭겸 장군 유적지
▲신숭겸 유허비
▲신숭겸 유적지와 왕산

살내 전투 이후 신숭겸의 지원군이 도착하지만 끝내 왕건의 군(軍)사는 파군(破軍)재에서 견훤군에게 철저하게 부서지고[破] 만다. 지금 그 자리에는 신숭겸장군 유적지가 조성되어 있다. 유적지 내에는 신숭겸 장군이 그곳에서 죽었음을 기리는 순절지지비(殉節之地碑)비, 영정을 모신 표충사, 부속건물인 숭절당과 표충재 등 많은 볼거리들이 자리잡고 있다.

동수대전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왕건은 황급히 파군재 일대를 떠나 봉무동을 거쳐 평광동 시량리로 갔다가 시내를 타고 불로동까지 내려온다. 봉무동 앞을 휘감아 흐르는 동화천 개울가의 독좌암(바위[巖], 혼자[獨], 앉을[坐])에 혼자 앉아 잠깐 넋을 수습한 뒤, 몸을 은신하기 위해 마을 뒷산을 넘어 평광리 끝자락인 시량리로 피했을 듯하다. 물론 시량리라는 마을이름의 내력도 왕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하는 바로는, 굶주림과 피로에 지친 웬 낯선 사람이 숲속에 있는 것을 본 주민이 주먹밥을 준 후 잠시 뒤에 와 보니 그가 사라져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왕이었다. 그래서 '왕(王)을 잃은[失] 마을[里]'이라는 뜻의 "실왕리"라 부르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발음하기 쉽게 바뀌어 '시량리'가 되었다.

시량리는 평광동 중에서도 가장 산골 쪽에 숨어있는 끝마을이다. 그러므로 시량리에서 줄곧 걸으면 평광동으로 나온다. 평광리에서 다시 걸음을 재촉하면 이번에는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1호인 도동 측백나무숲을 지나 불로동에 닿는다. 시량리를 벗어난 왕건도 (대구시 동구청이 '왕건길'이라 부르며 관광자원화하고 있는) 그 길을 하염없이 걸었을 것이다. 측백나무숲 아래를 흐르는 맑은 물은 한 모금 손으로 떠 마시며 권토중래를 다짐했거나, 혹은 처량하게 된 신세를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측백숲에서 잠깐이면 닿은 불로동에 도착한 왕건은 전쟁통에 끌려갔거나 피난을 가버린 바람에 마을 안에 노(老)련한 중장년 사내들이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는[不] 것을 보고 한탄을 했고, 그 이후 그 마을에는 불로(不老)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그래도 불로동은 파군재가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여기까지 왔다고 해서 안심을 할 수는 없다. 왕건은 정신없이 계속 걷고 뛰었을 것이다. 반(半)달[月]이 흐릿하게 밤[夜]길을 비춰주는 곳까지 왔을 때 그제야 왕건은 마음[心]이 놓였다[安]. 지금 고모령에서 금호강 건너편을 바라볼 때 그 일대를 반야월 또는 안심이라 부르는 연유가 바로 왕건에게 있다는 말이다.

이제 왕건은, <대구시사>의 표현을 따르면, '금호강을 건너 지금의 경산 압량 지역이나 대구의 수성구 고모동 방면을 지나'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주로 천변을 이용하거나, 또는 적대 세력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산기슭의 외곽을 이용'하여 대구의 앞산 지역으로 향한다.

▲왕굴

앞산에는 안일(安逸)암이 있다. 왕건이 안(安)전하고 편안하게[逸] 하게 머문 절이라는 뜻이다. 안일암 뒤로 앞산 거의 정상까지 올라가면 왕건이 숨어 지냈다는 왕굴이 나온다. 안일암에서 고산골 쪽으로 더 나아가다가 낙동강승전기념관  옆으로 난 산길을 10여분 오르면 나오는 은적(隱跡)사는 왕건이 숨어[隱]지낸 자취[跡]가 깃든 절이다. 은적사 바로옆에도 왕굴이 있다. 그런가 하면, 안일암과 은적사의 반대편 앞산비탈에도 왕건은 이름을 남긴다. 임휴(臨休)사, 왕건이 잠시 머물면서[臨] 쉰[休] 절이라는 뜻이다.

앞산에 머물던 왕건은 견훤군의 수색으로부터 안전해지자 이윽고 '성서 지역을 거쳐 낙동강변을 따라 고려의 통제를 받고 있던 성주 지역으로(<대구시사>의 표현)'  옮겨간다. <대구시사>는 견훤이 공산전투 대승 이후 벽진군(성주)을 크게 공격했다는 기록을 그렇게 해석하는 근거로 원용한다. 왕건이 벽진군을 거쳐 완전히 개성으로 탈출한 것이 확인되자 견훤은 그 분풀이로 성주를 무참하게 공격하였다는 것이다.

대구에는 '왕건'이 많다. 아마 우리나라 어디에도 이만큼 그가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그것도 경쟁 상대인 견훤에게 철저하게 참패한 후 고독하게 패주하는 길을 따라 남긴 흔적이니, 그 길과 유래를 둔 지명들은 보고 듣는 이들의 마음에 잔잔한 여운을 준다. 대구에 남은 왕건의 흔적이 역사적이고 교육적이라는 말이다.

특별히 대구시가 키워야 할 문화유산은 어디일까. '왕건'이 그 중 하나이다. 대구에만 있고 다른 곳에는 없는, 대구의 것은 대단하지만 다른 곳의 것은 왜소한, 차별성이 뚜렷한 것들을 부각시켜야 한다. 팔공산의 관봉석조여래좌상도 그 중 하나이고, '왕건' 또한 그렇다. 대구에 고려 시대 보물이 별로 없는 것을 한탄하지 말고, '왕건'이 유난히 많이 있다는 데 주목하자
 

정만진(소설가) daeguedu@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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