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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관리툴 2012년11월13일 17시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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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백목사의 예수읽기 (11)
마가복음 12:28-34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다"

백창욱(대구새민족교회) baek0808@hanmail.net

▲예수와 율법학자.

예수와 율법학자는 늘 앙숙이었다. 율법학자들은 대표적인 적대세력이다. 그들은 예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기 싫었다. 마가 11장 27절을 보면,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거닐고 있는데, 율법학자들이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떼를 지어 시비를 건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성경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높이고자 다른 이들이 예수께 경어를 쓰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 그랬겠는가? "야, 너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야, 민중을 홀려먹는 기술은 어디서 배운 거야?"라고 했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를 극도로 경계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기득권세력이 극히 민감해 하는 부분은 자기들의 밥그릇을 빼앗아 가는 놈이다. 예수는 그렇게 지배세력에게 신음하는 민중들을 빼앗아 갔다. 그러니 질색할 밖에.
 
예수입장에서는 기득권 적대세력 중, 가장 사악한 집단이 율법학자였다. 그들은 율법을 활용하여 민중을 발가벗기는 대표적인 탐욕집단이었다. 그래서 마가 12장 38절을 보면, 예수는 수많은 적대세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따로 말씀한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라고.
 
그런데 뜻밖에도 오늘 복음말씀은 예수께서 그 적대세력의 한 멤버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화기애애하게 상대방을 추켜 세운다. 율법학자는 '예수가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았다'고 했고(12장 28절), 예수께서는 '율법학자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34절).

사면이 적대세력으로 둘러싸인 어둠의 현장이더라도, 어디에서나 늘 한줄기 빛은 있기 마련이다. 완전히 삼성과 대림의 용역으로 전락해버린 제주강정해군기지 공사현장의 경찰놈들 중에도, 양심의 가책을 겪는 이들이 있다. 어떻게 아느냐고? 눈을 보면 안다.

오늘 복음말씀 핵심은 예수께서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답한 말씀이다. 율법학자는 물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인 것은 어느 것입니까?"(12장 28절)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12장 29-31절)라고.

이 말씀은 예수의 고유말씀이 아니다. 첫째는 신명기 쉐마(신 6:4,5, '너희는 들으라'는 뜻) 말씀이고 둘째는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을 인용한 거다. 기독교에서는 예수께서 답한 말씀을 '사랑의 이중계명'이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율법규정이 613개인데, 그것을 압축하면 십계명이고, 또 압축하면 이 두 개의 계명이 된다고 해서 '사랑의 이중계명'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설교자들이 등한시하는 부분이 있는데, 하나님말씀이 나온 배경과 그 말씀의 맥락을 잘 모르고 그저 막연히 좋은 말씀, 공중에 떠 있는 말씀으로 나팔분다는 데에 있다. 단언컨대, 어떤 하나님말씀도 시대배경, 상황, 문제의식 없이 나온 말씀은 없다. 설교자들은 그것을 밝혀내야 한다. 그래서 힘든 거다. 그러니 불의한 현실상황에 도통 관심 없는 이들이 그저 듣기 좋은 말, 교회대중에게 영합하는 말로 대강 우려먹는 거다.

그럼, 소위 '사랑의 이중계명'이 나온 배경, 맥락은 무엇인가?

우선 으뜸계명은 이것만 있는 게 아니다. 예수 당신이 하신 말씀도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마태 7:12) 율법과 예언서를 한 계명으로 줄이라면 이 말씀이라는 뜻이다. 주옥같은 말씀이 여럿 있지만, 이것만 인용했다. 예수는 어째서 당신의 고유한 말씀으로 대답하지 않고 신명기 쉐마와 레위기 말씀을 인용한 것일까?

이해를 돕기 위해 짧은 신학강연을 하겠다. 신명기서는 기원전 587년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망한 후, 포로기 시절에 썼다.(오경이 다 그렇다.) 나라도 망했고, 야웨신앙도 뿌리 채 흔들리는 정신적 신앙적 공황기, 신학적 위기에 답하기 위해 나온 책이다. 

신명기역사가는 출애굽해서 가나안 진입을 눈앞에 두고 새로운 결단을 하는 히브리원조의 사례를 통해 출바벨론해서 다시 고향땅 이스라엘로 돌아가고자 하는 포로기 백성의 회개와 열망을 담았다. 예수가 이런 신명기의 맥락에서 쉐마 말씀을 인용한 것이라면 제국의 식민지살이를 하는 이스라엘 현재에 딱 맞는 말씀이다.

그들이 반성적으로 회고하는 가장 결정적인 내용은, 우리가 야웨를 제대로 믿지 않았다는 거다. 그래서 신명기 역사가는 쉐마 말씀을 절절이 다시 썼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평등세상의 교훈을 팽개치고 기득권의 이익수단으로 전락해버린 율법을 복원하는 길은 오직 야웨 그 분만을 뜨겁게 사랑하는 길뿐임을 다시 강조했다.

그랬을 때 히브리원조가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들어갔듯이, 왕국시대 이스라엘 조상들이 출바벨론하여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왔듯이, 제국의 식민지살이하는 우리도 다시 출로마하여 하나님나라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는 이런 의도에서 신명기의 '쉐마 이스라엘'을 율법전승 대표로 인용하였다.

그럼, 레위기 인용말씀은 어떤 맥락인가? 신명기역사가가 강조한 두 개의 전승전통이 있다. 하나는 앞에서 말한 율법전승전통이고, 또 하나는 제사전승전통이다. 레위기는 제사전승을 집중적으로 담은 책이다. 포로기 백성들은 레위기를 통해, 제사조차도 형식으로 변질시키고, 이익의 도구로 삼켜 버린 자신들의 행위를 반성하며 바른 제사야말로 야웨의 은총을 입는 수단임을 재천명하였다. 그런데 레위기에 담겨 있는, 그 숱한 제사 관련 말씀 대신에, 이웃사랑 계명을 인용한 것은 제사가 형식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 요체는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길임을 고백하는 거다.

이스라엘이 망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간 배후에는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동포를 지독하게 학대하고 발가벗긴 죄악이 있었다. 같은 식민지시대 문서인 예레미야, 에스겔서 등을 보면, 그 시대 권력자들이 백성들을 어떻게 짓밟았는가에 대해 잘 나와 있다. 그렇게 같은 동포를 짓밟았으니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었음을 이들은 뒤늦게 절감했다. 그래서 다시는 겉만 번지르르한 제사를 하지 말고 이웃을 아끼자. 그래서 히브리 조상처럼 평등세상을 경험했던 거룩한 백성이 되자는 다짐과 결단을 레위기에 담은 거다. 그러므로 예수가 그런 정신이 담겨 있는 레위기 말씀을 으뜸계명 두 번째로 인용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사랑의 이중계명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의 의도를 율법학자가 정확히 파악했다. 그것은 그의 답에서 알 수 있다. 율법학자가 예수께 말하기를,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더 낫습니다."(12장 33절)라고 했다. 예수는 으뜸 둘째계명으로 레위기 말씀을 인용할 때, 번제나 희생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명기역사가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레위기의 정신은 그 어떤 제사보다도 이웃사랑이 낫다는 말씀으로 요약한다.

율법학자는 예수가 레위기를 인용한 의도를 정확히 알아보고, 자기의 생각을 덧붙인 것이다. 그러니 예수가 기뻐할 밖에! 율법학자들은 모두 다 똑같은 놈들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자기의 말을 알아듣고 맞장구를 치는 사람이 있다니! 그래서 예수는 기쁜 마음에 율법학자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12장 34절)라고.

이것이 예수가 소위 '사랑의 이중계명'을 인용한 이유에 대해, 내가 해석한 배경과 맥락이다. 오늘도 하늘은 제국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사람을 비인간화시키는 이데올로기를 추종하는 기술자, 전문가 대신에 평등평화정의세상을 향하는 사람을 찾는다. 그들 역시 하나님나라가 멀지 않으리라.

백창욱(대구새민족교회) baek08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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