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에 보면 261년(신라 첨해 이사금 15)에 달벌성(達伐城)을 축조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 기사는 대구 지역을 지칭하는 지명(地名)을 확실하게 증언해주는 최초의 기록으로, 그 이름이 ‘달벌’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물론 그 기사는 달벌성 축조 이전에 대구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대구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인 2만 년 이전부터였다(대구박물관 전시실 게시 내용). 그리고 청동기 유적이 유난히 많이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그 무렵 대구(달성) 지역 거주집단은 세력이 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철기가 유입되면서 그 세력은 더욱 막강해졌을 것이며, 기원전 1세기 무렵에는 작은 나라를 세웠을 터이다.
그 소국은 변한 12국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더이상 세력이 강성한 나라로 발전하지는 못하고 3세기경부터는 신라문화권에 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대구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 그 이전까지는 무엇이었는지 불확실하고, 첨해 이사금 때의 달벌성 명칭이 비로소 확실하다는 뜻이다.
신라 시대에 대구 지역은 달벌(達伐), 달구벌(達句伐), 달불(達弗), 달구화(達句火) 등으로 불렸다. 달벌과 달구벌의 ‘벌’은 평야, 들판 등을 뜻하는 순수 우리말이다. 이는 백제사람 중 유일하게 동상을 남긴 계백 장군이 전사한 황산벌의 ‘벌’을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그리고 달불의 ‘불(弗)’과 달구화의 ‘화(火)’는 ‘벌’과 같은 소리로 보면 된다.
‘달’벌과 ‘달구’벌, ‘달’불과 ‘달구’화가 함께 쓰였다는 것은 ‘달’과 ‘달구’가 같다는 뜻이다. 여기서 ‘달’은 닭[鷄]을 의미한다. 경상도 사람들이 ‘닭’을 [닥] 아닌 [달]로 소리 내는 것, ‘닭’을 [달구]라고 부르는 것, 그리고 신라의 국호이기도 했던 계림(鷄林), 즉 신라의 왕족인 김씨들이 닭을 조상신으로 여겼다는 역사적 사실 등에 근거를 둔 견해이다.
그러던 중, 지명을 한자식으로 바꾸는 경덕왕(742∼764년 재위) 때 달구화현(縣)은 ‘大丘’현으로 이름이 바뀐다. 달구화의 ‘달’이 대구의 ‘大’로, 달구화의 ‘구’가 대구의 ‘丘’로 바뀐 것이다. 하지만 대구의 지형을 ‘큰[大] 언덕[丘]’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므로, ‘달’은 달[月]처럼 둥근[圓] 모양, ‘언덕[丘]’은 산을 가리킨다고 보면 많은[大] 산[丘]으로 둥글게[達] 둘러싸인 들판[伐]- 분지[盆地]에 대구(大丘)라는 이름을 붙인 조어(造語) 방식은 대략 이해가 된다. 어쨌든, ‘달구’의 ‘달’이 ‘大丘’의 ‘大’로 바뀐 까닭은 불분명하지만, 대구가 대구(大丘)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757년(경덕왕 16)부터이다. 경덕왕이 한화(漢化) 정책을 써서 우리말 지명을 한자식으로 바꿀 때 ‘달벌’ 또는 ‘달구벌’도 ‘大丘’로 바뀐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대구(大丘)는 대구(大邱)로 바뀐다. 1750년(영조 26)에 대구사람 이양채(李亮采)가 왕에게 상소를 올려 대구(大丘)를 대구(大邱)로 바꾸어야 옳다고 주장한다. 구(丘)가 공자님의 이름[孔丘]에 쓰이는 글자이므로 지명에 써서는 안 된다는 요지였다. 그러나 다른 지명에도 구(丘)를 쓰는 곳이 많고, 이미 천년씩이나 써온 것을 구태여 바꿀 필요가 없다는 중론에 밀려 임금의 윤허를 얻지는 못하였다. 그 와중에, 대구(大丘)와 대구(大邱)가 뒤섞여서 쓰이는 상황이 되고, 1780년 정조 초기 무렵부터는 주로 대구(大邱)가 애용되었다. 추로지향(鄒魯之鄕)을 자칭(自稱)하는 대구 지역의 분위기가 결국 자신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
그 이후, 1949년 지방자치법이 개정되면서 대구시로, 1981년 대구직할시로, 1995년 대구광역시로 대구는 그 이름이 바뀌게 된다. 그러나 ‘대구시’든 ‘대구직할시’든 ‘대구광역시’든 그것은 매한가지이니, 오늘날의 이름 대구(大邱)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은 결국 조선 정조 때부터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