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6일(목) 근로복지공단 앞 도로에서 산재노동자 피해사례 증언대회를 했다. 원래 장소는 실내였는데, 공단이 취소하는 바람에, 부득불 건물 앞 도로에서 열린 거다. 직사광선 뙤약볕에서 근로복지공단이 산재노동자들을 어떻게 배제하는지에 대한 여러 사례를 들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은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라는 기구를 통하여, 산재노동자에 대한 불이익과 탄압의 도구로 노동자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세계 최장시간의 노동으로 발생하는 직업성질병에 대한 불승인율이 급격히 높아져서 뇌심혈관계질환은 80% 이상, 근골격계질환은 60%에 가까운 불승인율을 나타냈다. 노동직종에 따라 작업환경이나 주로 쓰는 신체부위가 다름에도 모든 노동자에게 일률적인 기준을 적용한다든지, 작업관련성이 없다, 개인 질환이다, 퇴행성 질환이다 등의 사유로 불승인 난 사례가 많았다.
근로복지공단이 이렇게 산재 진입 장벽을 높이고 산재노동자 강제종결을 통해 벌어들인 돈이 무려 7조 5천억 원이나 했다. 그 덕에 한국능률협회에서 지급하는 국가생산성평가에서 우수, 최우수를 수년째 받다가 결국 대상까지 획득하였다. 생산성평가는 거둬들이는 보험급여보다 지급하는 보험급여가 적으면 적을수록 점수를 높이 받는데, 공공기관이 이렇게 능률성이 높은 기관이 됐다는 것은, 산재노동자들의 처우나 권리보장보다는 수지개선에 골몰하였다는 뜻이고, 그만큼 산재노동자들에 대한 공공성이 최악이었음을 반증한다.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자본 우선 풍토가 공공성이 우선이어야 할 공공기관까지 덮쳤고, 그 와중에 근로복지공단도 수익성이 최고목표가 된 까닭에 산재노동자만 홀대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산재노동자들에게는 인색하고, 야박하게, 불리한 법 적용으로 악명을 떨치는 근로복지공단 직원들 자신들은 구석구석 비리로 꽉 차 있었다. 뇌물수수, 인사청탁비리 등으로 공단 재정이사부터 말단 직원까지 어둠의 온상이었다. 더 이상 노동자들이 기댈 곳이 못 되는 곳이었다.
근로복지공단의 실체가 이렇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어째서 공단이 삼성전자에서 백혈병으로 목숨을 잃거나 투병 중인 노동자들에게 산재인정을 하지 않는지, 어째서 공단이 가까스로 산재인정을 받은 노동자를 상대로 삼성의 쟁쟁한 로펌변호사들과 한통속이 돼서 항소하는지가 이해됐다. 기가 막힌 일이다. 정녕 사람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보고 싶다. 다행히도 있다. 예수께서 그것을 보여주신다.
오늘 복음말씀의 요지는 이렇다. 예수께서 한 마을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쳐주실 것을 간청받았다. 예수는 그를 무리로부터 ①따로 데려가서, ②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③침을 뱉어서, ④그의 혀에 손을 대시고, ⑤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고, ⑥에바다(열리라)라고 말씀하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하게 되었다는 치유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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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애인과 병자들을 치유하는 예수. 예수는 그들을 치유사건의 주체적인 존재로 만들었고, 그를 통해 그들은 치유과정에서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 | |
유심히 본 사람은 이 치유과정이 좀 특이함을 알아챘을 것이다. 뭐가 특이한가? 예수께서 여러 동작을 하셨다. 굳이 그렇지 않아도 되는 데 말이다. 이보다 더한 병자를 고치실 때도 예수는 간단히 말씀으로 고치셨다. 현장에 없는 병자까지. 그런데 이 장애인에게는 무려 여섯 가지 동작을 취하셨다. 이건 무슨 뜻일까?
만약 예수께서 공명심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이 사람을 따로 데려가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보는 자리에서 사람들의 눈요기를 채워주며 고쳐 주었을 것이다. 그때 마술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다면 이 장애인은 그냥 대상화된 존재에 불과하다. 치유의 중심에 장애인은 없고 치유자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는 무리를 떠나서 장애인과 단둘이 있는 장소로 갔다. 오직 장애인에게만 집중하려는 거다. 그 뒤 일어난 동작, 신체접촉은 오직 예수와 장애인만 아는 특별한 과정이다.
왜 예수께서는 이렇게 하는 것인가? 이 사람을 주체적으로 세우기 위하여, 해방시키기 위하여, 중심에 놓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치유행위를 장애인이 똑똑히 알게 하려는 것이다. 장애인은 예수께서 손가락을 귀에 넣은 것, 침을 뱉어서 손을 혀에 댄 것을 통해 자신의 장애 부분이 만져지고 있다는 것을 정확히 감지한다.
예수는 무엇보다도 귀먹고 말 못하는 이 사람의 처지가 안타까워서 하늘을 보고 탄식하셨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이제 해방된 사람으로 살게 해 달라고.
박근혜가 박정희가 저지른 사법살인에 대해 조금이라도 탄식하는 마음이었다면, 인혁당 사건에 대해 두 개의 판결 운운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고문으로 억지 자백을 했고, 그게 유죄증거가 돼서 형 집행을 당했다. 다시 말하지만, 고문이 있었다. 재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유신정권의 아귀들이 그린 조작이란 게 밝혀졌다. 그래서 재심에서는 무죄가 나온 거다. 당연히 국가배상이 나온 것이고. 박근혜는 박정희가 저지른 이런 야만의 행위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들, 수십 년 고통당한 가족들에 대해 어째서 탄식하지 못하는가! 그러나 오직 자신의 선거승리를 위해 유권자들을 수단화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인간의 도리가 보일 리 없다. 그러므로 진짜 참말을 못 듣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허여멀건 한 외모와 미소에 속지 마라.
예수는 이 사람의 해방 자체가 유일한 관심사였다. 그래서 에바다(열리라)라고 외쳤다. 눌린 세상을 조금이라도 경험한 사람은 안다. 외침의 힘이 얼마나 유익한지를! 외침에서 오는 카타르시스, 해방감이 이심전심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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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리고의 맹인들 (맹인들을 치유하는 예수) (Les aveugles de Jéricho dit "le Christ guérissant les aveugles") | | |
장애인은 이 모든 과정을 똑똑히 경험했다. 예수가 자기의 치유(해방)을 위해 쏟는 애정과 기운을! 평생 소외 속에서 산 사람이기에 예수가 보여주는, 자기만을 위한 특별한 동작에서 이미 이 사람은 치유를 경험했다.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바로 이거다. 누구를 대상화하지 않고 중심에 놓는 것. 이게 사람중심이다.
예수의 행위는 이 한 사람만을 위한 게 아니다. 사람을 수단화, 대상화하는 현실타파 행위가 이 사람을 통해 상징적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특히 제국의 폭력에 신음하는 이스라엘 사람들, 초기 선조들이 보여준 평등세상 복원보다는 제국에 빌붙어서 오직 탐욕만 누리는 종교권력에 눌린 사람들에게 참 소리를 듣고 말하게 했다. 그래서 복음이다.
지금 세상이라고 다를 게 뭔가. 여전히 자본과 권력은 사람을 대상화하여 노예로 부린다. 착한 사람만 그 체제 속에서 간신히 한 자리 차지하고 겨우 살 수 있다. 강자의 화려한 폭력으로 꽉 막힌 세상에서 그저 선전을 통해 들이미는 것만 구입하고 먹고 누리라고 말한다. 진정 귀와 말이 돼야할 언론매체는 영혼은 없지만, 재주가 좀 있는 기술자들이 전면에 나서서 자본과 권력이 유포하는 거짓선전만 흡수하라고 나팔 분다. 불의하고 불공평하다. 어찌해야 할까.
자본과 권력이 사람세상을 왜곡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 그 와중에 소외당하는 약자들에 대한 연민, 하늘로 상징되는 선한 가치에 대한 믿음으로 탄식하고 외쳐야 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기계에 지배당하여 조용히, 아무 일 없이 사는 사람으로 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외치자, 에바다라고. 그럼 거짓된 세계는 균열이 가게 돼 있다. 예수께서 이미 그렇게 해 놓았다. 그 뒤를 따르자.